#064.
별이 빛나는 밤 4
이젠 당연하다는 듯이 제 곁을 지켜 줄 사람이 없다. 당장은 정하진이 곁에 있지만, 눈앞의 남자는 지수가 가이딩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떠날 사람이었다. 망각하고 있던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된 지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도 못 했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율이를 생각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치고 얼굴은 착잡해 보였다. 지수는 정하진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널 지켜 줄 사람이 이젠 곁에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돌려 꺼낸 것을 미안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수는 정하진과 함께 지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와 대화하면 할수록 참 올곧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웃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무뚝뚝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배려심 많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수는 이 남자가 제게 미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부러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포션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시면 말하세요. 저 이거 두 개나 있거든요.”
“예. 그럴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필요할 때가 온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재차 끄덕인 지수가 몸을 앞으로 돌려 똑바로 앉았다. 정하진 역시 지수를 따라 시선을 TV로 돌렸다. 뉴스에선 여전히 새로운 소식 없이 영양가 없는 대화만 오가고 있었다. 뉴스에 금세 흥미를 잃은 지수는 자세를 고쳐 소파 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새 소식을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으니까. TV에 집중하지 못한 채 지루해하고 있으니, 문득 쓰지도 못하고 덮은 일기가 떠올랐다.
‘아, 그래. 일기나 쓰자.’
인벤토리에서 일기를 꺼내 무릎에 펼치고 페이지를 뒤로 팔랑팔랑 넘겼다. 아까 쓰다 만 페이지엔 날짜와 날씨, 그리고 숫자 1. 만 적혀 있었다. 잠시 여백을 노려본 지수는 새삼 뭘 써야 할지 몰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루에 좋았던 일을 딱 세 개만 적는 게 전부인데도 마땅한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고민하고 있을 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펭귄 로봇과 반려 햄스터가 보였다. 이제 창밖 구경은 마쳤는지, 반질반질한 정수리에 토토를 태운 포포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토토가 “쮜이잇~! 쮜잇~! 쮝~!!” 하고 신나게 울었다. 예전부터 둘이 저러고 노는 모습을 종종 봤었는데, 여전히 사이가 좋아 다행이라고 여긴 지수는 피식 웃으며 펜을 딸깍였다.
“…….”
솔직한 마음으론 아직 감사한 일 따위를 떠올리거나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오늘 일기는 다 썼냐고 물어봐 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하지만 지수는 꿋꿋하게 펜을 움직였다. 이 간단한 일기를 채우는 일은 다른 이도 아니고 강재윤이 부탁한 일이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쓰고 싶었다.
‘나중에 형을 만나면 왜 이런 귀찮은 걸 시켰냐고 꼭 한마디 해야지…….’
언젠가의 미래에 그를 만나면 일기를 핑계로 꼭 온갖 생떼를 다 부릴 계획이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나는 형이 없어서 이만큼이나 힘들었지만, 형이랑 했던 약속은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제 투정을 들은 강재윤은 언제나처럼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가 약한 소리를 하면 그동안 혼자 고생 많았다고, 형이 지수 너만 남겨 두어서 미안했다고 사과할 것 같았다.
그럼 지수는 알면서 왜 그랬냐고 한마디 해 줄 생각이었다. 아니, 열 마디를 해도 부족했다. 어떻게 날 두고 떠날 수 있냐고, 인간이 왜 그렇게 못됐냐며 일부러 무시무시한 표정도 지어 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잔뜩 힘준 얼굴은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함박웃음을 터뜨리겠지만 말이다.
* * *
뉴스는 계속 켜 두었지만,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균열은 더 벌어지지 않았고 먹구름이 몰려든 상태로 다른 징후로 번지지도 않았다. 일단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지수는 정하진이 내민 물과 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처방 약이었다.
“아……. 저 완전 잊고 있었어요. 감사해요.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만약을 위해 제가 계속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민 미지근한 물과 함께 약을 삼킨 지수는 딱히 물비린내가 나는 것도 아닌데 습관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미지근한 물은 언제 마셔도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준비해 준 그에게 싫은 내색을 보이긴 싫어 얼굴을 펴고 침대에 누웠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세를 잡은 후, 두툼한 호텔 이불을 덮은 지수는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와 그 주변을 둘러봤다. 이 스위트 룸에서 지수가 고른 침실은 작은 침실이었다. 거실이나 큰 침실과 달리 안에 소파나 의자가 없었기에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도 넓은데 여기 앉으세요. 누우셔도 되고요.”
“…….”
거절하려나 싶었는데, 정하진은 의외로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수의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그는 긴 다리를 쭉 뻗고 자세를 편히 하더니 침실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하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 돌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문틈에 반쯤 몸을 내민 포포와 그 정수리 위에 토토가 보였다. 설마 저것도 숨은 거라고 저러고 있는 건지, 둘 다 몸을 절반씩 내놓고 있는 게 귀여웠다.
“토토야.”
“쮜?”
“아빠 폰 이제 줄래?”
“쮜잇.”
아직 아니라는 듯이 토토가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수는 재촉하지 않고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알았어. 둘이 거실에서 더 놀다 와도 괜찮아.”
“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토토가 작은 앞발로 포포의 정수리를 찹찹 두드렸다. 포포는 패널에 출력되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어 웃으며 말했다.
“한지수 님. 저는 그럼 토토 님과 별구경을 더 하고 올게요.”
“응. 난 먼저 잘게.”
“네, 좋은 꿈 꾸세요. 한지수 님.”
“쮜!”
밤 인사를 건넨 포포가 토토를 태운 채 거실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수는 둘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정하진을 흘긋 올려다봤다. 저 귀여운 콤비를 보고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진짜 웃는 걸 못 봤네. 포포도 웃는데.’
정하진이 웃는 얼굴을 본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가 퍼진 이후, AI가 아니냐는 농담도 돌았었는데, 지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비록 패널에 출력되는 화면이지만, 그래도 포포는 웃을 때 ‘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곁들이며 눈을 반달로 접어 웃었다. 가끔 정말 과장되게 웃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을 땐 아예 눈을 호선으로 만들고 양팔로 배를 부여잡은 채 상체를 뒤로 젖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만약 정하진이 진짜 AI 로봇이라면 포포보다 훨씬 빨리 만들어진 대선배쯤이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웃는다는 옵션 자체가 없는 1세대 AI 로봇 말이다.
지수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정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수는 저를 향한 시선을 피하는 대신, 그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물었다.
“정하진 에스퍼.”
“예?”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예. 됩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칼답에 지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이 진지함을 넘어서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그가 절대로 웃지 않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대뜸 그에게 ‘정하진 에스퍼는 왜 안 웃어요?’라고 묻는 건 역시 좀 무례한 것 같아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 정도까지 웃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웃으면 죽는 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
병이라기보단 제약이겠지만. 각성자들 사이에선 더 큰 이득을 위해 페널티를 감수하고 후원자와 모종의 계약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국의 한 에스퍼는 눈가리개를 한 후원자에게 눈 한쪽을 내주는 대신 A급 각성자에서 S급 각성자로 등급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어쩜 정하진은 누군가에게 제 미소를 준 걸지도 몰랐다.
“으음~ 아니에요. 이건 나중에 물어볼래요.”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무슨 질문을 들어도 침착하게 대답하겠다고 나름대로 각오했는데 말입니다.”
“아하하, 그럼 나중에 꼭 물어볼게요. 정하진 에스퍼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정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수는 여분 베개를 자신의 베개 위에 포개 올리고 옆으로 누워 물었다.
“제 팬이라면서요?”
“예. 팬입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거 없어요?”
“…….”
평소보다 배는 더 진지해진 정하진의 표정을 본 지수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뭐든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남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궁금한 게 없냐는 단순한 질문에도 저런 진중한 얼굴을 하는 게 조금은 재미있었다. 잠시 눈을 피한 그는 뭔가 고민하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다시 지수와 시선을 맞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거나 물어봐도 됩니까?”
“네.”
“조금 이상한 질문도 괜찮습니까?”
“오, 기대된다. 뭔데요?”
아이돌로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이상한 질문은 셀 수 없이 많이 들은 덕분에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꽤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는 이 점잖은 남자였다. 정하진이 제게 이상한 질문을 해 봤자 뭐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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