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별이 빛나는 밤 6
저도 모르게 저지른 파렴치한 만행을 들은 지수는 도통 진정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지금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져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지수가 약을 먹은 이후부터 틈틈이 시간을 체크하던 정하진은 평소보다 더 담백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전 정말 괜찮으니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주무시죠. 졸리실 텐데.”
“네에…….”
시종일관 담담하고 평소와 다름없게 구는 정하진 덕분이었을까. 내내 안절부절못할 것 같던 지수는 다행스럽게도 느리지만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아직 긴장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어도 또렷했던 눈빛이 탁해진 게 보였다.
자세를 편하게 바꾸고 두어 번 정도 크게 심호흡한 지수의 호흡이 점차 느려졌다. 상태를 보니, 지금부터 나누는 대화는 내일 아침이 되면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하진의 예상에 확신을 실어 주듯 계속 몸을 주물럭거리던 지수의 요망한 가이딩이 완전히 멎었다.
정신적으로만 잠든 지수는 여전히 눈을 뜨고 정하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내 가슴을 짓누르며 은근한 감각을 이겨 보려 뭉개던 손을 내린 정하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추자, 천천히 눈을 깜빡인 지수가 이내 배시시 웃는다.
지난밤처럼 나를 또 그 사람으로 착각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지수가 어물어물 뭉개지는 발음으로 정하진을 불렀다.
“정하진 에스퍼…….”
“예.”
“그러고 보니, 제가 방금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안 했는데요…….”
질문 내용을 떠올린 정하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불 위로 지수의 어깨쯤을 토닥였다. 잠이나 자라는 의도였다.
“안 하셔도 됩니다. 어서 주무시죠.”
“에이, 어떻게 그래요. 해야죠.”
정하진은 약에 취해 히죽 웃는 지수를 향해 그러다 내일 후회할 거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기억 못 할 확률이 99%였다. 그래도 1%라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 했던 것인데, 망설이는 사이 한지수가 먼저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그동안 따로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까 질문 듣고 생각해 보니까……, 정하진 에스퍼 가슴이 엄청 커서, 엄청 멋있어요. 부러워요. 많이. 아주 많이.”
“……예, 감사합니다.”
“정하진 에스퍼 몸 진짜 멋져요…….”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군요.”
“얼굴도 진짜 잘생겼고…….”
“오늘도 부모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으음, 근데요……. 솔직히 허벅지는 딱히 의식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에…….”
말이 끊어져서 이대로 잠들었나 싶었지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지수의 시선이 정하진의 허벅지에 꽂혀 있었다.
“…….”
“……멋지네요. 바지 위로 근육이 이렇게……, 이렇게 따악~ 보일 정도면, 응. 그래요. 부럽다. 부러워요……. 난 아무리 운동해도 근육이 안 붙는 타입이거든요…….”
“애초에 근육이 붙을 만큼 운동한 적은 있습니까?”
“아야.”
날카로운 지적을 들은 지수는 마치 이마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이불을 코까지 끌어 올려 덮으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제 체질이 좀 근육이 잘 안 붙는다고. 그래도 다행히 먹는 거에 비해 잘 찌진 않는대요. 안 찌는 건 아니지만.”
“하긴, 한지수 가이드는 너무 말랐습니다. 그러니 제가 잘 먹여서 살을 좀 찌워 드리겠습니다.”
“아,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정하진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곧 이불에서 손을 쑥 꺼내더니 옆자리를 두드렸다. 붙어 앉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정하진이 엉덩이를 조금 움직여 가까이 붙자 그게 아니라는 듯이 재차 두드렸다.
“누우면 안 돼요? 계속 올려다보니까 멀미 나요.”
“…….”
어지럽다는 말에 천천히 누운 정하진이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지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정하진은 지수가 별다른 말 없이 눈만 깜빡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먼저 물었다.
“그런데, 왜 살찌면 안 되는 겁니까?”
“살찌면 사람들한테 욕 엄청 많이 먹거든요……. 저 저번에 C급 던전에서 곤충 독에 당해서 팅팅 부었었는데, 그때 뭘 처먹고 저렇게 쪘냐고 1주일 넘게 욕먹었어요…….”
“남이 살찌든 말든 왜 욕을 한답니까. 욕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겁니다.”
“으흐흐…….”
정하진의 말 중 뭐가 그리 웃겼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은 지수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곧 만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하진 에스퍼어…….”
“예.”
“저 진짜 궁금한 거 있어요…….”
“예. 뭡니까.”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는데도 지수는 바로 질문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뭐든 다 물어봐도 된다는 의미로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치켜들었다. 외국 영화에서 샴페인 잔을 내밀며 지어 보일 법한 느끼한 표정을 본 지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개인적인 건데……, 좀 민감할 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예. 상관없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건가요?”
“예.”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고 생각한 정하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불을 슬그머니 내린 지수가 침을 꼴깍 삼키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저도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물을게요.”
“그러시죠.”
정하진은 한지수가 제게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판을 까는 건지 궁금했다. 대략적으로 그가 예상한 질문은 아무리 봐도 내 팬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팬이라고 했냐는 질문 정도였다. 아니면 SS급 에스퍼가 휴식기를 가진다는 이유로 제 곁에 있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는 질문이거나. 예상 질문을 추측하고 있을 때, 내내 우물쭈물하던 지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하진 에스퍼는 그……, 음, 몸값이라고 하나? 어 그러니까, 정하진 에스퍼를 고용하려면 얼마나 필요해요? 시급? 일급? 어떻게 계산해서 받아요?”
“…….”
그 물음에 정하진은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비록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긴 했지만, 답을 기다리는 얼굴은 진지했다. 정하진은 지수의 질문에 대한 답을 허투루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개인과 계약한 적은 없어서 모르겠군요. 보통 길드나 국가와 단건 계약만 해서……. 이 경우엔 돈은 따로 받지 않고 제가 움직이는 데 드는 숙식비나 교통비 같은 걸 비용 청구합니다. 그리고 대가는 아이템으로 대신 받습니다.”
“……오, 어떤 아이템이요?”
“그때마다 다릅니다만, 적어도 SS등급부터 받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국가와의 거래는 그런 식으로 진행했다. 여기서 피치 못할 사정이란 제게 대가를 지급할 능력이 없는 국가나 한 민족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뜻했다. 그땐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준 적도 있었지만, 정하진은 이런 깊은 사정까지 말하는 대신 근본적인 궁금함을 표출했다.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한 겁니까?”
“…….”
“설마 절 고용할 생각입니까?”
“…….”
평소처럼 진중한 목소리가 아닌, 다소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되물으면 당황한 지수가 부정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얼굴로 긍정했다.
“솔직히 말해서…… 가능하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음……, 아까요. 제가 물약 꺼냈을 때요.”
“예.”
“그때…… 정하진 에스퍼가 그랬잖아요. 위험하게 이런 거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고…….”
“예. 그랬죠.”
“그게, 상대가 정하진 에스퍼라 그런 것도 있긴 한데……, 생각해 보니 제가 가진 희귀템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꺼냈던 것 같아요……. 평소엔 늘 재윤이 형이 같이 있었으니까요…….”
“…….”
“재윤이 형이 저한테 귀한 아이템을 많이 줬거든요……. 한국은 공개 경매 방식이다 보니 그때마다 뉴스에도 나오고……. 매번 한지수 가이드가 또 뭘 받았는데 그게 얼마에 낙찰됐다느니, 강재윤 에스퍼가 또 뭘 샀다느니 이런 이야기들……. 심지어 저한테 주지 않은 것도 제가 받았다고 뉴스에 나오고 그랬어요……. 정정 보도 해도 아무도 안 믿었지만…….”
“…….”
약 기운이 퍼질수록 지수의 목소리는 점점 느려졌지만,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해서인지 중간중간 잠시 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간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가이딩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정하진 에스퍼가 제 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면……. 그럼 난 혼자가 될 텐데, 누가 날 잡아다 고문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
“물론 토토가 있지만……, 토토는 방어계 몬스터니까요……. 물리계 에스퍼가 조직적으로 작정하고 떼로 덤비면……. 힘들지 않을까 해서……. 토토가 다치는 것도 싫고…….”
“…….”
필터 없이 줄줄 나오는 말을 들은 정하진은 쉽게 답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온갖 희귀한 아이템을 소지한 가이드. 누군가에겐 단순히 부러움의 대상이겠지만, 누군가에겐 물가에 내놓은 솜사탕만큼 쉬운 존재로 보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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