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84화 (84/172)

#084.

터지는 게 낫지 5

괜찮냐고 물으려던 정하진은 입을 벌렸다가 급히 다물었다.

“으으음…….”

품에 안긴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였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약에 취해 잠든 한지수는 새벽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정하진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리곤 냅다 정하진의 침대로 다이빙하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 내며 찰거머리처럼 붙어 눈물을 쏟았다.

정하진은 한지수가 쏟아 내는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지수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할 대상은 정하진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한지수의 곁을 지킨 강재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온갖 이야기와 투정들. 정하진은 이에 반응하는 대신 한지수가 잠들 때까지 조용히 등을 보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폭풍 같았던 오열의 증거로 한지수의 양쪽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깨고 나면 시야가 평소보다 좁아져 있을 게 분명했다. 자세가 불편한지 꼬물꼬물 뒤척이느라 숨소리가 불규칙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정하진은 한지수의 수면에 방해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등급에 비해 오히려 피해 규모는 적은 편이다. 그러니 그리 심각할 필요 없다. 여긴 안전할 거다.”

“쮜이…….”

“집이 사라져서 속상한 건 알겠지만, 너도 조금이라도 더 자도록 해라. 네가 기운 없으면 한지수 가이드가 걱정할 거다.”

“쮸.”

한지수와 제 보금자리가 쓸려 나간 게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건지, 축 늘어져 힘없이 대답한 토토가 침대 옆 협탁으로 폴짝 점프했다. 협탁엔 한지수가 이 방으로 침입하고 나서 정하진이 깔아 준 수건이 있었다. 가장 푹신한 위치에 자리 잡고 누운 토토는 눈을 깜빡이며 정하진 품에 안긴 제 집사를 바라봤다. 약 덕분에 잠은 계속 자고 있지만 얼굴엔 짙은 피로감과 해소 못 한 슬픔이 묻어났다.

“……쮜이.”

작게 집사를 불러 보더니,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수건에 고개를 파묻는다. 이 조그마한 녀석은 또 뭐가 그리 서러운지, 포동포동한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하진은 저도 모르게 나올 뻔한 한숨을 삼켜야 했다.

털 뭉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든 그는 토토를 저와 한지수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코를 훌쩍이며 우는 토토의 작은 등을 보듬어 주었다. 그리 울지 말라고 한 행동이었건만 위로가 오히려 자극됐는지 이 털 뭉치는 딸꾹질까지 하며 울기 시작했다.

“쮜히힉, 쮜잉.”

“뚝. 그만 울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쮜에에엥…….”

“한지수 가이드는 잘 버티고 있다. 토토 너도 그렇고. 다 잘될 거다.”

“쮜이잉……. 쮜히잉…….”

무뚝뚝한 목소리로 쏟아 낸 다정한 위로를 들은 토토가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순간.

“으음…….”

얕게 잠든 상태로 뒤척인 한지수가 뭔가 찾는 듯 손을 뻗어 정하진의 가슴을 몇 번 짚고 주물럭거리더니, 이게 아니라는 듯이 다시 여기저기 더듬었다. 이리저리 여러 번 헛손질한 손이 기어이 둘 사이에 있는 털 뭉치에 닿았다. 저가 원하던 게 맞는지, 익숙하게 손을 옹송그려 토토를 감싸 잡곤 제 가슴에 품듯 안았다. 그리곤 엄지로 토토의 몸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형아랑 자자…….”

“쮜…….”

나지막한 잠꼬대로 제 집사가 꾸고 있는 꿈을 파악한 토토는 엄지를 꼭 끌어안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토토의 눈가에 아침 이슬처럼 작은 눈물이 맺혔다. 훌쩍일 때마다 전신을 들썩이는 햄스터를 지켜보던 정하진은 복잡한 심경을 추스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하진과 토토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쉽사리 잠들지 못한 어두운 새벽이었다.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어서, 누군가는 빠른 수습을 위해서, 누군가는 오랜만에 크게 터진 재난 현장을 담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앞으로 더 큰 재난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가슴이 답답해서 잠들지 못한 그런 새벽……. 김현아 역시 잠들지 못하고 마셔 봤자 취하지도 않을 술을 비우고 있었다.

“쯧. 이것도 실패인가.”

중얼거리며 잔을 내려 둔 김현아가 선물 받은 술병의 등급을 확인했다. 라벨에 적힌 설명을 보면 S급 각성자도 약간의 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던전산 재료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SS급인 김현아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술에 취하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시면 그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텐데.”

“술도 이해해 줄 겁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말을 들은 김현아는 피식 웃어 버렸다. S급인 그 역시 취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깠으니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마저 마시죠.”

의사가 들었다면 다소 걱정할 법한 핑계를 댄 김현아가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빈 유리잔에 예쁜 복숭아색 술이 차올랐다. 순식간에 가득 채워진 술을 본 조슈아가 곤란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조슈아의 잔부터 채운 김현아는 제 잔도 가득 채우더니, 한 번에 쭉 마시곤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 고픈데, 마실 수 있는 술이 없네요.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김현아답지 않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안타깝습니다. 우린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야겠군요.”

태연한 대답에 김현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혹시 동시통역 아이템이 잘못 통역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술병을 바라보는 조슈아의 표정에 서린 안타까움은 진심이었다.

각성 전 조슈아도 술을 꽤 즐겼던 걸까? 애초에 사제가 술을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뭐 세상엔 다양한 즐거움이 있는 법이었기에 그러려니 웃어넘겼다.

잔을 완전히 비운 조슈아가 빈 잔을 내려다보며 아쉽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현아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김현아 에스퍼. 나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 뭡니까?”

“한지수 가이드……. 그가 궁금합니다. 그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예? 우리 지수요?”

갑자기? 걔는 왜? 지금 이거 대체 무슨 의미?

김현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바라보자, 그 눈빛을 읽고 크게 당황한 조슈아가 손까지 내저으며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지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그리고 나는 성직자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제발.”

“아, 예에…….”

그래. 비록 조슈아가 이 새벽까지 김현아와 어울려 취하지도 않는 술을 마셔 주고 있긴 하지만, 그는 각성 전부터 악마를 때려잡는 바티칸 소속 구마 사제였다. 김현아가 종교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편이긴 해도 그가 신실한 성직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구마 사제란 악마를 퇴치하는 성직자 아닌가. 애초에 신앙 깊은 독실한 사제가 아니라면 신성력으로 악마를 쥐어팰 수는 없을 테니, 그를 의심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단지……, 이 점을 잠시나마 간과한 이유는 한지수에게 낀 도화살 때문이었다. 평소 힘 좀 쓰거나 얼굴 좀 쓴다는 에스퍼들이 한지수를 두고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이 종종 있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눈이 뾰족해져 버렸다.

“미안합니다. 걔가 좀…… 평소에 이상한 사람이 워낙 많이 꼬여서…….”

찰나였지만, 불경한 눈초리를 지은 건 엄연히 제 실책이었다. 조슈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 김현아가 마저 말해 보라는 듯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평소 얼굴로 돌아온 그녀를 확인한 조슈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조금 전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아까 한지수 가이드를 축복했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나?

“첫 번째는 김현아 에스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당신이 그를 아끼는 것을. 그러니 그에게 축복해서 나쁠 것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오, 그거 탁월한 선택이네요. 지금껏 나랑 좋은 관계 유지해서 손해 본 사람은 없으니.”

나쁜 관계인 사람이 어떤 손해를 봤는지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전혀 모르는 조슈아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내 선택은 옳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술을 권했으니, 앞으로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음?”

김현아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질문을 애써 삼킨 듯한 얼굴로 바라보자, 조슈아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일순 크게 흔들렸다. 잠시 눈치 살핀 그는 조심스럽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겐 한국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내게 말하길, 한국인은 함께 술을 마셔야 진정한 친구로 받아 준다고 했습니다. 아닙니까?”

그건 그 사람이 그냥 술을 좋아해서, 조슈아랑 어떻게든 대작하려고 지어낸 소리 같긴 한데……. 저 아기 사슴 같은 촉촉하고 올망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 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조금 미묘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김현아는 파티나 떠들썩한 술자리는 꺼리는 편이었다. 술을 마실 수 있다면 혼자 조용히 마시는 편을 선호했으니까. 그런 김현아가 누군가를 곁에 두고 함께 잔을 기울인다면, 인간적인 호감이 있어서일 테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써 합리화하며 긍정해 주자 눈앞의 천사가 크게 안도하며 생긋 미소 짓는다. 그러다 곧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유는, 한지수 가이드의 영혼의 울림이 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