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00화 (100/172)

#100.

좋은 꿈 2

동생의 움직임을 느껴 부둥켜안았던 몸을 조심스럽게 놓은 정하진의 시선이 작고 새하얀 손이 잡은 옷자락으로 따라붙었다.

마찬가지로 제 옷자락을 내려 보던 지수는 당황한 듯이 연신 눈을 깜빡이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음……. 아, 안녕하세요?”

“…….”

정하율은 쭈뼛거리는 지수를 향해 작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곧 다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공백에 한지수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 정하율이 먼저 살풋 미소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인사를 건넸다.

“지수 형……. 안녕하세요. 형들 목소리 들릴 때마다…… 형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목소리가…… 들렸어요?”

지수가 놀라 저도 모르게 되묻자, 정하율의 눈매가 더 가늘게 휘었다.

“네. 우리 형이랑……, 지수 형이랑. 그리고……. 토토…… 목소리도요…….”

“쮜이!”

정하율은 아직 알려 주지 않은 햄스터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며 제 가슴 위에 엎드린 토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제 사이에 꽉 껴 있던 토토는 비실비실 일어나더니 온몸을 푸르르 털었다. 그리곤 위풍당당하게 두 발로 서서 토실토실한 배를 내밀었다. 정하율은 토토에게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토토야…… 안녕?”

“쮜!”

토토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화답 인사를 건넸다. 정하율은 토토의 당찬 모습이 귀여웠는지, 쿡쿡 웃더니 정하진과 한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계속…… 계속 들었어요…….”

“…….”

“읽고 싶었던 책도…… 들어서 좋았어요……. 지수 형이 해 준…… 이야기도…… 재미있었……, 콜록. 콜록콜록.”

아직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든지 말하는 중간중간 계속 침을 삼키고 호흡을 골랐지만, 결국 기침을 터뜨렸다. 내내 얼빠진 얼굴로 있다가 그제야 정신 차린 정하진은 섣불리 물을 먹이는 대신 너스콜을 눌렀다.

“하율아, 아직 너무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으응…….”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의료진이 도착했다. 덕분에 병실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지수는 의료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침대에서 떨어진 구석 1인용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토토가 지수에게 달려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잠시 침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수는 허벅지를 딛고 선 토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토토 역시 지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어째 얼굴에 수심 가득한 것이…… 마치 지수의 기분을 파악하려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쮯.”

“…….”

지수는 토토에게 대답하는 대신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토토는 뭘 알고 이러는 걸까?’

토토가 사람의 말을 아마도 거의 알아듣고, 신기할 정도로 똑똑한 것도 알지만, 지금 저를 살피는 토토의 눈빛은 꼭 지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너무 확대 해석하는 건가 싶다가도 이렇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나, 조금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직감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렇기에 지수는 더욱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너의 집사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토토를 향해 웃어 주고, 평소처럼 쓰다듬으며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에 묻힐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토토야, 왜 그래?”

“쮜이, 쮜이잇-.”

앞발로 지수의 손가락을 끌어안더니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응? 왜 그런 얼굴이야, 토토야. 아빠 괜찮아.”

“……쮜이.”

그래도 안심되지 않는 걸까? 이젠 귀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갸웃한다.

지수는 재차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토토를 손바닥에 올려 정수리에 쪽 뽀뽀해 주었다. 그러자 토토도 기다렸다는 듯이 지수의 턱을 붙잡고 입가에 쪽쪽 뽀뽀하며 엉덩이를 씰룩대기 시작했다.

토토의 애교 덕분에 가볍게 웃은 지수는 조금 전보다 더 나아진 기분으로 의료진과 정하진 사이에 파묻히다시피 한 정하율을 바라봤다.

4월 30일.

오늘은 현재 한지수가 누구보다 의지하고 있는 정하진의 동생 정하율이 기적처럼 깨어난 날이기도 했고, 너무너무 그리운 제 동생 한지율이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축하할 일만 가득한, 그야말로 축복받은 기쁜 날로 기록되어야 마땅한 날이었다.

* * *

[속보] 4월 30일 오전 정하진 에스퍼와 정하영 에스퍼의 동생 정하율 군 5년 만에 의식 돌아와

[속보] 동생 소식에 던전 클리어 후 보고 없이 바로 자리 이탈하는 정하영 에스퍼의 모습 (사진)

[단독] 병원 내부 관계자가 밝힌 정하율 군 현 상태 ‘양호’

[단독] 정하영 에스퍼 첫 장기 휴가 신청한 것으로 알려져

[단독] ‘동생은 안정이 필요한 비각성자. 과한 관심 거두어 주길’ 기자 회견 거절하며 정중히 요청하는 정하진 에스퍼 (사진)

[속보] 각성자 협회 ‘정하영 에스퍼 민간인 폭행’ 관련 뉴스는 근거 없는 날조라 강한 비판, 자택 주소 추적하려는 너튜버를 따돌리려는 조치였을 뿐

[단독] 지나친 관심과 도 넘은 스토킹에 정하진 에스퍼 드물게 비각성자에게 힘 드러내…….

[속보] 정하진 에스퍼 차량 불법 추격하던 너튜버와 ○○일보 기자 빗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로 중상

각종 SNS에 정하영 에스퍼 목격담 끊이질 않아, 각성자 사생활 침해 수준 심각

언론은 앞다퉈 정하율의 이름을 실어 날랐다.

물론 요 며칠간 쏟아지는 뉴스가 아니더라도 평소 각성자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하율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수가 없었다.

SS급 에스퍼 정하진과 S급 에스퍼 정하영의 늦둥이 동생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대격변 이후 초기 통신망이 복구됐을 무렵, 언론이 재기능하며 공개된 생존자들의 인터뷰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향도 컸다.

서서히 문명을 되찾아 가기 시작하던 시점. 언론이 다시 기능을 시작하자 여러모로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각성자에게 돌리는 편을 택한 정부가 각성자들을 대대적으로 미디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공중파 방송사 중 두 곳은 앞다퉈 각성자에 대한 목격담과 정보를 수집했다. 덕분에 생존자들이 풀어 놓는 목격담이 쏟아져 나왔고, 각성자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나날이었다.

당연하게도 정하진과 정하영이 리더로 있던 생존자 그룹도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똑같았다.

하진과 정하영은 무뚝뚝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반면, 동생 정하율은 굉장히 다정하고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잘 웃어 주는 아이였다는 것. 놀라울 만큼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말을 꼭 했다.

항상 형과 누나의 말을 잘 들었던 아이. 몸이 약했던 아이. 그래서 늘 어딘가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던 아이. 지병 악화로 몹시 아팠을 텐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늘 웃어 주었던 상냥한 아이.

그런 소년이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대형 던전이 연이어 터지던 날. 갑자기 형과 누나가 있는 선두로 나섰고, 이후 눈부신 빛이 발생했다고 모두가 입 모아 증언했다.

강렬한 빛이 소멸했을 때, 사람들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는 정하율과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몬스터들이었다.

이런 증언 덕분에 정하율이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각성자 등급 검사가 이뤄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온갖 장비로 테스트를 진행해도 정하율은 비각성자로 분류될 뿐이었다.

덕분에 당시 일어났던 눈부신 빛과 몬스터의 소멸은 그저 비현실적인 현상이 또 하나 나타났구나.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얘가 각성자는 아니라는 건데…….’

정하율의 각성 결과에 대해 떠올리던 한지수는 제 옆에 앉은 체구가 작은 소년을 흘끔 바라봤다. 옆자리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앉은 정하율이 지수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얜 나한테 왜 이렇게 붙어 있지?’

이는 한지수만 의아하게 느끼는 점은 아닌 게 분명했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던 정하영 역시 신기한 듯이 힐끔거리며 연신 시선을 주곤 했으니까.

“하율아. 너무 기대지 말고 똑바로 앉아. 아니면 이리 와. 누나한테 기대.”

“…….”

보다 못한 정하영의 지적을 들은 정하율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봤다. 애초에 드라마엔 별 관심 없어 대충 보던 지수가 고개 돌리자,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불편하냐고 말로 묻는 대신 눈으로 질문하는 듯한 모습이 마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의 억울한 표정처럼 보였다.

“…….”

“하율아.”

정하영이 재차 타이르듯 동생의 이름을 넌지시 불렀다. 그러자 정하율은 누나에게 말대꾸하는 대신 한지수를 향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형, 불편해?”

“어? 아, 아니……. 괜찮아.”

이는 진심이었다. 물론 정하율이 귀여운 얼굴로 애절하게 물은 탓도 있지만, 며칠 내내 먼저 살갑게 다가온 정하율과 급속도로 친해져서 그런지 찰싹 붙어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코 저 사랑스러운 얼굴에 홀려 얼떨결에 대답한 게 아니었다. 물론, 조금은…… 어깨가 뻐근한 것 같긴 해도, 어쨌든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한지수 가이드. 억지로 참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뇨, 정말 괜찮아요. 어, 그, 하율이는 가볍기도 하고……. 음, 정말 괜찮아요.”

재차 괜찮다는 말을 들은 정하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수는 정하영의 저 멋진 미소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매들은 하나같이 각자 다른 스타일로 잘생겨서 탈이었다.

‘정하영 에스퍼는 웃을 때 진짜 인상이 달라 보여.’

정하영은 공적인 자리, 카메라가 있는 곳에선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정하영이 한집에서 머무르는 내내 동생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 같았다.

찌르면 피 대신 얼음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소릴 듣는 정하영의 다정다감한 모습이라니……. 하지만 정하율은 누나의 저 모습이 익숙한 듯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누나가 예전보다 훨씬 엄격해졌다며 지수의 귀에 소곤소곤 털어놓기도 했으니, 아마 둘만 있을 땐 더 다정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하진 에스퍼는…….’

무의식중에 주방으로 시선을 돌린 지수는 정하진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늘 그렇듯 토토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훈수를 들으며 요리 중인 그는 동생이 깨어난 날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웃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