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너의 파편 2
생각해 보니 시간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수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만약 그와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면 시간도 그만큼 지나 있었겠지만, 지구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기억의 증거가 되어 주었다. 어떤 능력자라고 해도 사람이라면 별의 시간을 조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이건…….”
또 하나의 파편이 스쳐 지나가며 책을 읽어 주는 정하진이 보였다. 병실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그가 한지수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오늘은 여기까지 읽을까요?] 하고 묻는다.
이 파편에서 지수는 그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의식이 없어도 그의 동생이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조심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배려와 욕구는 당연히 별개였다. 그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런 제 생각을 들키면 그가 기뻐할 거라는 걸 알아서, 말로 표현하는 대신 은근히 그의 손목을 쓰다듬고,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간드러지게 웃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허, 참나…….”
정하진을 보며 가슴이 뛰고,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을 기대하며 저런 앙큼한 짓을 했던 기억이 스쳐 간 순간. 지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없네.”
단순히 어이없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말을 빼면 표현할 길이 없었다. 복잡한 상념을 떨치고자 무의식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하진은 좋은 사람이었다. 제게 헌신하는 이유를 몰라서 그렇지, 어쨌든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쉽게 웃어 주진 않아도 사정이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가 웃지 않는다 해서 다정하지 않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지수에게 최선을 다하는 남자였다. 늘 지수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사소한 것 하나부터 열까지 지수를 배려했다. 무뚝뚝하다곤 해도 종종 지수의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호감이 있냐고 묻는다면, 지수는 당장 대답하기 힘들었다. 인간적인 호감이야 당연히 충만했지만, 연애 감정과는 별개였다. 무엇보다 지금 지수는 누군가를 만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나, 이런 지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파편이 스치고 지나가며 다른 잔상을 남겼다. 정하진을 침대로 쓰러뜨린 지수가 그의 몸 위로 올라타 장난스레 웃는 장면이.
지수는 저를 올려다보며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웃는 그를 보는 게 좋았다. 그가 큰 손을 뻗어 제 등과 허리를 보듬어 주고, 허벅지를 꽉 잡아 안정감 있게 자세를 바꾸는 것도 좋았다. 나중엔 꼭 폭주 전처럼 굴긴 해도, 어쨌든 제정신일 땐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힘들지 않게 조절하려 애쓰는, 그와 나누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정하진을 향한 것이 분명한 애틋한 감정, 두근거리는 가슴, 애정이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나날들. 이 모든 기억이 낯설고도 익숙해서 지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내 기억인데, 내 기억이 아니라니…….”
조금 전까진 이상하리만큼 저 모든 기억들을 끌어안고 싶었는데, 지금은 또 아니었다. 누군가 다가와 이게 정말 네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모르겠어.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닌 것 같아. 이상한 일이야. 정도로 말을 흐릴 것 같았다.
저건 ‘한지수’의 기억이 맞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아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한 순간, 발밑으로 금이 쩍쩍 가며 새하얀 빛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이 무너져 가는데도 두려움은커녕 한숨만 푹푹 내쉬며 허공에 털썩 주저앉았다.
쩌적- 쩌적-
쩌저적-!
바닥이 갈라져 부서지고,
쿵- 쿠구구구궁-
우르르르릉-
우주처럼 보이던 세상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직 남은 공간의 유성 역시 끊임없이 추락하며 지수를 스쳤다.
콰득- 쿠과과과과-
쿠르르르릉-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광활한 세계가 순식간에 깨지고, 바스러지고, 증발한다. 이내 모든 것이 무너져 보이지 않는 곳까지 추락하자 더는 그 어떤 색도 품지 않은 무(無)의 세계가 나타났다.
“……또 여기야? 저번처럼 꽃밭이라도 보여 주지. 여긴 아무것도 안 보여서 싫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무섭다는 말 대신 싫다고 투덜거린 지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고 놀라는 대신 익숙함이 느껴졌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순백의 세계에 널브러지듯 앉은 지수는 오히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술렁이던 마음이 진정되고 조금씩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불안하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려면 어때. 집중하자. 아까 본 것들……. 일단 내 기억과 다른 게 너무 많아.’
특히 가장 다른 기억 중 하나는 장례식이었다. 복장으로 봤을 때 지수는 상주였다. 강재윤의 영정 사진을 안고 걸을 때, 거리가 꽤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소란을 들으며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평화 길드 에스퍼들이 접근 못 하도록 막긴 했으나 몰려든 이들이 외치는 소리까진 막지 못해서 지수는 그들이 퍼부어 대는 폭언을 모두 들어야 했다.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은 쌔고 쌨어. 아이돌 때도 그랬고.’
하지만 그 말이 주는 아픔의 강도는 악플과 면전에 대고 쏟아 내는 악랄한 말들과 달랐다. 단순한 비난과 쏟아 낼 곳 없어 제게 퍼부어 대는 폭언이 아니라, 한지수라는 사람 자체를 증오하고, 진심으로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외치는 말이 주는 고통은 너무도 달랐다.
그들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아팠다. 심장이 찢기다 못해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대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운 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픈 건, 한지수 역시 그들이 쏟아 내는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지금도 그랬다. 정하진이 제 휴대폰을 관리하고 인터넷을 보지 않게끔 곁을 지키고 보호해 줘서 그렇지, 여전히 인터넷상에선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지수는 가능하다면, 정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강재윤 대신 자신이 사라지고 싶었다. 단순히 강재윤이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는 이유라기보다 그가 없는 세상을 아무짝에 쓸모없는 제가 버티느니, 세상에 이롭고 누군가를 도울 힘을 가진 그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른 누군가가 지수의 이런 생각을 듣는다면 이기적이라 비난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이 부분은 강재윤과 이야기를 다 끝낸 상황이었다. 지수는 대격변 때 못 볼 꼴을 많이 봤다. 지수는 그 당시 겪은 일들이 모두 트라우마로 남아서 늘 강재윤에게 약속을 받아 내곤 했다.
형은 절대로 나만 두고 죽으면 안 된다고. 만약 형이 죽을 것 같으면, 형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땐 꼭 나를 데려가야 한다고. 다만 내가 먼저 죽으면 형은 하고 싶은 대로 살다 와도 된다고, 그냥 나만 두고 가지 않으면 된다고 말이다.
만약 한지수를 잘 모르는 이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런 말 절대 하지 말라고 역정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재윤은 한지수를 잘 알았고, 그의 슬픔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늘 진심으로 대답했다.
꼭 그럴게. 그리고 만약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땐 떨어지지 말고 함께 가자. 형이 지수만 남겨 두고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강재윤은 세상 그 누구보다 한지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남자였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한지수가 버티지 못하리란 것도 잘 아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내가 떠나도 너는 꼭 살아남아서 행복해지라고 말하는 대신, 시간이 약이니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 괜찮아진다고 말하는 대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랬던 그이기에, 강재윤은 한지수의 선택을 이해해 줄 것이 분명했다. 장례식에서 느꼈던 감정과 고통을 떠올리던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 상념으로 빠지려는 생각을 다잡고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날짜상 맞지 않아. 기억 조작은 확실히 아냐.’
변신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이후 날짜만 봐도 그랬다. 기억 속 정하진과 한지수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 같았다. 적어도 1년 이상. 두 사람을 담은 파편 속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었으니까.
‘설마 평행 세계…… 뭐 그런 건가?’
대격변 전, 강재윤과 봤던 미국 히어로 영화에서 비슷한 내용을 봤었다. 거미줄을 쏘는 남자 셋이 동시에 나오던 영화가 떠올랐지만, 정답을 알려 줄 이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어요? 안식~ 이제 슬슬 나오지? 날 여기로 부른 걸 보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같은데……. 뭐야, 진짜 아무도 없어? ……나 지금 혼자 뭐 하는 거니.”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니 1호선 광인이 된 것 같았다. 깊은 한숨을 뱉으며 자조하고 있을 때, 지수의 시야에 광이 번쩍번쩍 나는 구둣발이 나타났다.
“안식, 방금 대체……, 헙?!”
당연히 제 후원자 안식의 신이라 여기고 방금 그건 뭐냐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지수는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얼굴? 아니, 얼굴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웬 토성처럼 고리를 두른 알록달록한 행성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숨이 막힐 만큼 강한 적개심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저를 압박하고 있는 행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