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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24화 (124/172)

#124.

조우 1

“하…….”

불쾌한 기억이 상기됨과 동시에 자연스레 그 시기, 그러니까 대격변 초창기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직 기억을 계승 받지 못해 불순물 없이 순수한 정하진이라는 사람이었던 시절. 전 세계가 신년 행사로 들떠 있을 때, 대격변이라 불리는 재앙이 터졌다.

지구 각지에 깊은 구멍이 생기며 영화에서나 볼 법한 온갖 괴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류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난생처음 보는 온갖 몬스터를 맞닥뜨려야 했다. 그 혼란함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면, 생존자끼리 모여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전쟁에 가까웠다.

힘든 상황에서 처음엔 모두가 서로를 도우려 했다. 어떻게든 힘을 합쳐서 괴물을 무찌르고 살아남기 위해 쉘터를 공유하고, 식량을 나눴다. 모두가 이 상황을 ‘정부와 군’이 나서서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다른 나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은 워낙 땅덩이가 좁은 데다가 국가 안보가 뛰어난 나라니, 이 좁은 반도 통제쯤이야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정하진, 정하영이 리더로 있던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언젠가 국가가 제 기능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고통스러운 겨울을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혹독한 날씨 때문에,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이유로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약탈을 일삼는 무리에 희생되는 이들이 늘자 사람들은 점차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정부가 구조 중이라고 했잖아, 군을 보내 지역마다 구조 활동을 한다고 했는데, 여긴 대체 언제 오지?

라디오에서 나오던 대피소 안내 방송이 왜 멈췄지?

저 사람들은 고작 음식 좀 빼앗겠다고 우릴 이렇게 만든 거야?

이럴 때일수록 서로 뭉쳐야 하잖아.

또 뺏길 순 없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도와주지 마. 일부러 위험한 척하는 걸 거야. 저런 식으로 사람을 유인해서 물자를 뺏으려는 게 분명해. 다들 들키지 않게 이동해.

저 건물에 사람들이 있었어. 군복 입은 사람도 몇 명 있지만 군인 같지 않았고 우리 흔적을 발견한 것 같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쳐야 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차 피폐해졌다. 살기 위해 계속 이동하며 괴물과 그보다 더 잔인한 사람을 피해야 했고, 생존자를 만나도 반가워하기보단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원치 않게 한 무리의 지도자가 된 터였기에 가능하면 만나는 생존자를 전부 수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룹 내 사람들은 점차 분열했고, 어떻게든 도우려는 자들과 어떻게든 저만 살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자로 나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후자의 사상에 가담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내심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불쑥 치솟았다. 정하진 입장에선 정하영과 정하율을 데리고 셋만 떠나는 편이 훨씬 더 편하고 안전한 길이었다. 직업상 외워 둔 몇몇 좌표의 벙커로 가서 버티면 되었으니까.

정하진 본인도, 정하영도 제 동생 하나쯤은 지킬 능력이 충분했다. 그와 동시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생존 기술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뭉치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마찰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깊어진 골로 인해 온갖 사고가 터지는 거였다.

심지어 이젠 다른 무리의 것을 약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생기고, 몇몇 장정들은 정하진이 무리의 리더라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며 말을 듣지 않기도 했다. 결국 정하진은 선택해야 했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류애를 잃지 않고 어떻게든 서로 도우려는 사람들만 데리고 무리를 이탈해 다른 곳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후자까지 어르고 달래며 고생길을 자처할 것인지 말이다.

공교롭게도 육체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진 이들 대부분이 후자에 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에도 정하진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살면서 온갖 더러운 일을 많이 보고 살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면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그룹 내에서 이미 분열된 자들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고, 후자에 속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인 사람들을 약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자니까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서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논리를 펼치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기생한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엔 당연하게도 병약한 정하율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하진은 선택하기 전에, 다시 한번 후자에 속한 이들을 설득해 보려 했다. 그래서 후자 무리에 속한 이들과 약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로 잠시 그룹을 이탈했다. 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배려하고 서로 다시 잘해 보자고 격려할 셈이었다.

정하진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하늘이 도왔는지, 운 좋게 아직 약이 종류별로 많이 남아 있는 약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괴물도 없었고, 무엇보다 물자가 많이 남아 있었기에 모두가 기뻐했다. 정하진은 이 좋은 분위기를 틈타 이들을 잘 어르고 달래 볼 예정이었다.

후자의 무리에서 리더격이 된 남자가 정하진에게 이 약국에선 물건 하나 챙길 생각 말고 돌아가라고. 네가 그동안 한 일을 생각해 목숨은 살려 줄 테니, 정하영을 포함한 여자들은 두고 네 남동생이랑 노인들만 데리고 꺼지라는 발언을 뱉기 전까진 말이다.

정하진을 둘러싼 여덟 명의 남자 모두 자신들이 새로 차출한 리더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결의를 다진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런 역겨운 이야길 저들끼리 언제 꺼내고 의견을 모은 걸까. 당시 정하진은 무의식중에 저를 둘러싼 남자들을 둘러보며 가늠했다.

가까운 녀석을 먼저 제압하고, 그 녀석이 든 낫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는 두 명의 목을 긋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저 뒤에 방망이를 든 힘 좋은 놈 셋은 일격에 처리가 힘들겠다는 계산을 하던 순간, 저를 둘러싼 남자들이 모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남자가 카운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기척에 예민한 정하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다가온 남자는 패딩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지퍼를 카라 끝까지 끌어 올려 코끝까지 가린 상태였다. 덕분에 그늘진 눈만 겨우 보였는데, 언뜻 보인 눈빛은 너무도 곱고 선량해 보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를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아주 천천히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린 정하진은 그를 경계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와 잠시 눈을 맞추고, 몇 번 눈을 깜빡인 후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누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필요한 약만 챙겨서 나갈 테니 불필요한 논쟁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카운터 위에 쭈그리고 앉아 면면을 살피던 남자는 그 예쁜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즐거운 듯이 물었다.

“내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요, 쟤들은 당신과 의견이 다를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할 건가요?”

기이하게도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설마 아는 사람인가? 당장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으나 기억을 되짚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대화의 공백이 길어져서 혹여라도 이 거대한 압박감을 주는 남자의 감정이 상하면 곤란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저 혼자 빠르게 돌아가서 사람들을 챙겨 떠날 생각입니다.”

사실상 계획 없이 뱉은 즉흥적인 대답이었다. 당연하게도 저런 생각을 가진 놈들과는 절대 한 무리에 있을 수 없었다. 저들이 제게 덤비려는 걸 이미 알게 됐으니 바로 처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 사람을 단칼에 죽이는 것보다 산 채로 제압만 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저들의 상태에 있었다.

“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지금 다들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봤어요.”

이상한 소문이 나돌던 시기였다. 사람 같지 않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어쩌면 인두겁을 쓴 악마일 수 있다는 소문을 몇몇 무리와 스치며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소문이 진짜라고 주장하듯 어떤 힘에 묶인 여덟 명의 남자들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공포에 희게 질린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이거 왜 이러냐는 소리, 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신을 아예 꼼짝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모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팔과 다리가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인 듯이 허공에 고정 당한 채였다. 허리를 활처럼 휘다 못해 새우처럼 펄떡이는 추태를 지켜보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오지랖에 조언 하나 할게요. 내가 비슷한 놈들을 몇 번 봤는데, 살려 두면 분명히 사고 칠 겁니다. 그러니 두고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

정하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두려운 건 이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눈만 내놓고 실실 웃는 남자였다.

“……당신……, 당신은 사람……입니까?”

정하진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정하진뿐. 보이지 않는 힘에 결박당한 이들이 왜 남자를 자극하냐며 게거품을 물고 따지려 들었지만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일 거고요. 아, 당신은 일단 할 일부터 챙기시죠. 약 챙기러 오셨을 텐데.”

“…….”

정하진은 허락처럼 한결 가벼워진 중압감을 느끼며 카운터를 뛰어넘어 선반 뒤로 돌아가 정하율이 평소 복용하는 약을 찾기 시작했다. 성분이 비슷한 약까지 예비용으로 찾으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 처치 도구와 항생제 등을 가져온 가방에 쓸어 담았다. 정하진이 그러는 동안 카운터 위의 남자는 제가 묶어 둔 무리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자자. 여러분. 우리 그룹에 아픈 사람도 많고 어르신도 많아서 내가 옮길 약이 좀 많아. 여기 있는 거 웬만한 건 다 챙길 생각인데……. 하필 또 산을 좀 타야 하는 위치라, 나 혼자 들고 가자니 심심할 것 같거든. 그러니 몇 명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산 잘 타고 힘 좋은 사람 손?”

“크, 크윽……. 우선 이것부터 풀어 주면, 크허억!”

“히이익!?”

“끄, 끄아아악!”

“우와아아악!!!”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라 가방을 둘러메고 카운터로 나간 정하진 앞에 보인 건, 제게 가장 반감이 심했던 저들의 리더 격인 남자였다. 축 늘어진 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힘에 붙들려 힘없이 서 있었지만, 아래턱 위로 있어야 할 머리의 상단이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히, 히익……, 히이익!”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정하진은 주변 남자들에게 튄 혈흔과 남아 있는 하관으로 남자의 머리가 터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폭발 사고라면 몇 번 본 적이 있는 경력 덕분인지,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제 심신을 압박한 것 때문인지 더없이 끔찍한 상황임에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남자에게서 느껴진 분위기 탓에 정하진은 마치 목줄 풀린 맹수를 상대하듯 천천히 움직이며 침착하게 남자를 가늠했다. 남자 역시 정하진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제 옷에 튀긴 피를 대충 털어 내며 말했다.

“아, 쓰읍. 딱밤만 날리려고 했는데……. 손 하나 줄었네. 미안해. 내가 아직 힘 조절이 힘들어서.”

작게 투덜댄 남자가 나머지 일곱 명을 쓱 둘러보더니 생긋 눈웃음치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무보수로 험한 산길 등산하며 무거운 짐 배달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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