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조우 5
정하진은 이날 ‘재윤’이라 불린 남자와 짧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와 나눈 실없는 대화 속에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는데, 그 결과 이 남자가 인간답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정정하기로 했다.
이 남자에게 중요한 건 오직 ‘지수’라 불린 크게 다친 남자 하나였다. 나머지 일행도 제가 챙겨야 할 사람들이니 걱정하긴 하지만, 만약 양자택일해야 할 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지수만 선택할 남자였다.
자신이 의사를 데려올 테니 여기 남아 사람들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지수가 깨어났을 때 일행을 방치한 채 지수만 살리려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선택한 일이었다.
남자는 감정이 없는 이가 아니었다. 슬픔을 알고, 두려움을 알고, 상실을 알고, 사랑을 알았으며,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이 뭔지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뭐든 희생할 또는 희생시킬 남자였다.
정하진은 이런 부류를 잘 알았다. 정하진이 직업 삼았던 업계에서 선호하는 인간상이 이 남자 같은 존재였다. 업계에서 전설로 남은 대선배 중 대부분이 이 남자와 같은 성향을 띠었고, 많은 이들이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위험한 부류지…….’
이 무섭도록 강하지만 앳된 남자는 정하진이 가장 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그와의 인연은 의사가 치료를 끝내면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치료는 금방 끝났다.
두 사람이 있는 작은 봉분으로 다가온 의사는 복부 상처는 처치했지만, 머리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의료 기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흔들리지 않게 고정한 상태로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조심스레 말하며 재윤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의외로 순순히 긍정했다.
이후 정하진은 의사를 데리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재윤 역시 방치해 둔 약 가방을 챙기러 함께 산길을 걸었다. 가방이 널브러진 장소에 도착한 정하진은 불쾌함을 애써 억누르며 재윤을 다시 확인했다. 그는 손수 가방을 챙기더니, 그중 하나를 정하진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가방을 받은 정하진은 이걸 왜 주냐고 묻지 않았다. 재윤은 묵묵히 저를 바라보는 정하진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도와준 값.”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네~ 잘 가요. 다음에 또 봐요.”
“…….”
다음에 또 보긴. 절대 안 볼 거다. 그렇게 다짐한 정하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의사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재윤’이라 불린 남자의 말대로 정하진은 며칠 지나지 않아 각성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처럼 자각하지 못했는데, 한 건물에 물품을 구하러 들어가려 문을 열다가 그대로 문짝을 뜯어 버린 순간, 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하진은 자신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자처럼 혹시나 보이지 않는 힘, 흔히 말하는 염동력을 사용하는 걸까 싶어 물건을 움직이고자 노력해 봤더니, 신기하게도 물줄기가 생겨나 뿜어져 나갔다.
정하진이 각성하여 얻은 능력은 물. 대재앙 시대, 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위생에 더 신경 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식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정하진은 마실 수 있는 물을 만들 수도 있었고, 뜨거운 물과 단단한 얼음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하진이 각성함과 동시에 정하영 역시 각성했다. 처음엔 정하영은 그저 물리적인 힘만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몬스터를 마주쳤을 때 바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했지만, 이틀에 한 번꼴로 정하진 무리에 홀로 찾아오는 남자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곤 했다.
“아니, 뭐 우리만 이런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조심해요. 이 근방 상가 건물 차지한 무리 중 두 명이 범상치 않은 힘을 지녔다고 하니까. 그 자식들 우르르 몰려서 약탈 다니더라고요.”
“…….”
정하진은 제게 이런 정보를 주는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재윤은 종종 이렇게 혼자 정하진을 찾아왔다. 다른 이들이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하진이 혼자 있을 때만 이렇게 나타났는데, 하루는 재윤이 ‘홑몸’이 아니었다.
“……저건 대체 왜 가져온 겁니까?”
정하진은 재윤의 뒤에 있는 거대한 몬스터 시체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남자는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거대한 황소 같은 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군인이죠?”
“……티가 많이 납니까?”
“네. 좀 험한 데서 구르신 티가 나서. 아 다른 게 아니고. 동물 해체할 줄 알아요?”
“……설마.”
정하진이 뒤에 몬스터로 시선을 돌리자, 재윤이 눈을 살포시 접어 웃으며 끄덕였다.
“식용 가능한지 실험 좀 해 보려고요.”
“그러다 탈 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겨울이라 그런지 동물이 너무 안 보여요. 단백질 섭취는 해야겠고……, 낚시도 어렵고…….”
“차라리 낚시하는 법과 생선 손질하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기와 마주치기 싫어하면서 또 단호히 거절은 못 하고, 저리 오지랖을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재윤의 눈이 커졌다. 늘 그렇듯 눈만 빼고 꽁꽁 가린 터라 표정이 다 드러난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놀란 얼굴임이 분명했다. 그 반응에 정하진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저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음? 제 걱정해 주는 거예요?”
“하아……. 다른 사람들이 걱정됩니다. 당신이 먹었을 땐 괜찮더라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먹었을 땐 어떨지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아아, 괜찮아요. 자원자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먹어 볼 거니까.”
“……진짜 자원자입니까?”
“네. 꼭 먹겠다고 하던데요?”
“……그 자원자들 좀 봐야겠습니다.”
“…….”
그리고 정하진은 재윤이 말한 자원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약탈을 일삼던 무리였는데, 재윤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후 나무에 묶여 있었다.
“여기 제가 말한 자원자들.”
“……‘이대로 묶여서 굶어 죽거나 몬스터한테 잡아 먹힐래, 아니면 나랑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틀간 계속 고기 배부르게 먹고 풀려 날래’가 어떻게 자원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심지어 풀어 주지도 않을 거잖아, 라는 말은 생략한 채 물으니, 재윤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아니, 선택지를 줬는데 얘네가 제발 고기 먹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니까요?”
재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묶인 남자들이 울며 외쳤다. 제발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그리고 여기에 방치하지 말아 달라고. 정하진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 주려 했는데, 재윤이 다가와 정하진을 막아서며 말했다.
“얘네가 한 짓부터 듣고 결정해요.”
그리곤 그들이 그동안 저질러 온 짓들을 읊기 시작했다. 불쾌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떨떠름한 정하진의 얼굴을 확인한 재윤은 저들에게 붙잡힌 채 시달리던 약자들이 지금 제 무리와 함께 지내고 있으니, 못 믿겠으면 그 사람들에게 들어도 좋다고 말했다.
거짓은 아닐 것이다. 눈앞에 묶인 쓰레기들을 보는 정하진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하지만 재윤이라는 남자가 하려는 짓은…….
“식용 가능 여부만 확인하면. 인도적으로 굴겠다고 약속할게요.”
“…….”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최대한 먹을 수 있는 부위 가려내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도축은 해 본 적 없어서.”
“하아…….”
결국 정하진은 재윤에게 고기 도축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알게 된 정보는, 소를 닮은 몬스터가 식용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정하진은 재윤의 부탁으로 몇 번 의사와 동행해 그들의 새로운 쉘터를 방문했다. 재윤 일행의 새로운 쉘터는 정하진이 알려 준 벙커였다. 정하진은 벙커에 들어가지 않고 늘 밖에 머물다 의사가 나오면 돌아가곤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얼마 전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습격으로 동생 하율이 또래 아이 몇 명을 잃은 터라, 저 벙커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 생각이 날 것 같아 그랬다.
치료를 마치고 나온 의사와 돌아가며 들은 바로, 일전에 크게 다쳐 의식이 없던 ‘지수’라 불린 남자는 다행히 후유증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 들은 소식 중 그나마 기쁜 소식이었다.
“아, 어디 남의 거 뺏으려고 눈에 불 켜고 다니는 약탈러들 없나…….”
“……그 사람들 잡아다 또 뭘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버섯 좀 먹여 보려고요. 산에 널린 게 버섯인데, 뭐가 식용 가능한지 알 수가 있어야지. 영지버섯 비슷한 거 발견했거든요? 근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당신, 혹시 버섯도 잘 알아요?”
“원래 야생 버섯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약탈하는 새끼들 잡아다가 먹이면…….”
“그래도 먹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떠들면 낚이려던 물고기도 안 낚일 겁니다.”
정하진은 재윤과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정하진의 기분을 무시하고 종종 찾아와 멋대로 이것저것 묻고, 배웠다. 이날은 낚시하는 법을 알려 달라 하여 함께 낚시를 했는데, 그나마 살이 나올 법한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재윤은 낚시를 알려 준 보답으로 소를 닮은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지점까지 정하진을 데려가 주었다. 정하진은 재윤과 함께 소를 사냥하고, 그 자리에서 도축하고, 고기를 나눠 가지고 돌아갔다.
어찌 보면 평온한 나날이었다. 아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생겨서 이어 나갈 수 있는 평온한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정하진은 자신의 여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계속해서 사람을 모으고 싶었다.
노약자 가리지 않고 생존자를 모으고, 모두가 서로를 도우며 살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조성하고 싶었다. 강자들에게 약탈당할까 봐 불안해하지 않고,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재윤이라는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남자를 잘 설득해 고쳐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도하려던 때도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몇 명인데요?”
“……사람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