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9
‘뭐, 그래도 덕분에 버틴 거나 마찬가지지.’
한지수가 가장 최근에 닥친 위기를 정하진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면, 그전에 닥쳤던 위기들은 강재윤과 토토 덕분에 버틴 거나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닥친 대격변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어느 날 찾아온 작고 소중한 털 뭉치는 지수에게 있어 축복이었으니까.
토토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지수의 곁을 지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함께였다. 추울 땐 저 작은 몸으로 체온을 나눠 주었고, 지수가 슬픔에 젖어 있거나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땐 늘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지수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렇게 똑똑하고 총명한 토토가 지금은 오만 근심 다 담은 얼굴로 끙끙대며 지수의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지수 역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토토, 어디 아파?”
“쮜엥.”
그건 아니라는 듯이 작게 고개 저은 토토가 지수의 손가락을 더 꽉 안았다. 집사가 다치지 않게 힘 조절을 했을 텐데도 S급 햄스터의 놓기 싫은 마음이 반영된 덕분에 손가락이 조금 얼얼했다.
“으음, 걱정돼서 그래? 토토야, 아빠랑 멀리 가면, 거기선 토토랑 아빠랑 대화도 할 수 있대.”
“쮜, 쮜이.”
제 말을 알아듣고 기뻐할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토토의 얼굴은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지수는 작은 햄스터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심란해질 수 있는 걸까 싶어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고 달랬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빠는 토토랑 같이 살고, 대화도 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아. 거기에 가면 같이 이야기도 많이 하자. 알았지?”
“쮜, 쮜이잉…….”
여전히 고민 많아 보이는 대답이었다. 토토가 이리 소극적으로 구는 게 그저 집사가 자기만 두고 어디 갈까 싶어 이러는 거라 여긴 지수가 이번엔 제법 밝아진 목소리로 토토의 정수리를 살살 간질여 주었다.
“자장~ 자장~ 우리 토토~ 코~ 자자.”
“……쮜.”
토토는 햄스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수의 손가락은 여전히 끌어안은 채여서, 지수는 토토의 숨이 느려질 때까지 곁을 지켰다.
토토를 재우고 방을 나선 지수는 식탁에 차를 끓여 두고 기다리는 정하진에게 다가갔다. 맞은편에 앉으니 뭔가 골똘히 생각하듯 고개 숙이고 있던 그가 지수를 바라본다. 지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려다보다 곧 양손으로 머그 겉면을 조심스레 감쌌다.
“디카페인으로 숙면에 도움 되는 성분이 있는 차입니다.”
“고마워요.”
애초에 핫초코를 제외하면 뜨거운 음료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지만, 숙면에 도움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수가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내려 둘 때까지 정하진은 오직 지수만 응시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쪽도 퍽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아까는 미인계였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고민이 많아 나오는 얼굴이었다. 지수는 정하진과 잠시 눈을 맞추며 말을 골랐다. 마음 같아선 안식의 신과 대화한 내용을 전부 말하고 싶은데, 제약 때문에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 음……. 아, 음……. 어……. 아오, 진짜. 이거 쉽지 않네요……. 그냥 말 좀 하고 싶은 것뿐인데……. 아니, 다른 사람들은 이거 답답해서 다 어떻게 견디며 살지?”
그 말에 정하진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습니다.”
“으, 어……. 으음……. 아 이것도…….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는 데 실패하니 이젠 오기가 생겼다. 지수는 인벤토리에서 일기장을 꺼내 제일 뒤 페이지를 펴고 무언가 적으려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얄팍한 수 따위는 이미 간파했다는 듯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도 신기하네. 억지로 말하려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다 피를 토하며 실려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해석하겠습니다.”
피를 토한다는 말에 멈칫한 지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 토하긴 싫으니까……, 음, 그럼…… 정하진 에스퍼. 제가 할 수 있는 말만 할게요.”
“예.”
정하진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지수 역시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어깨와 등을 펴고 상체를 바르게 했다. 자세 교정을 마친 지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정하진 에스퍼에게 고맙다는 말은 몇 번을 해도 부족해요. 정말 고마워요. 제가 그동안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해서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 넘어간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
정하진은 그 부분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일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들었다. 한지수의 말을 끊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지수 역시 그 뜻을 이해하고 그에게 발언할 타이밍을 주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아주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매일매일 고마워할 거예요. 앞으로 제가 살아갈 남은 날 동안 평생. 하루도 잊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아, 이러니까 유언 같네. 유언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기억할 거라는 의미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뒷말을 급하게 덧붙인 지수가 알았죠? 물으며 씩 웃자 정하진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정하진이 묵직한 진심을 담아 화답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지수 가이드는 제게 늘 고맙다고 표현했습니다. 마음이 아파 힘든 시기에도 그러했고, 약에 취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혹시 신경 쓰고 계신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한지수는 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탓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우울하고 매일매일 사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꼬박꼬박 고맙다고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한지수 가이드는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받은 것을 전부 기억하고 보답하려고 노력하는 다정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전 그런 한지수 가이드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힘든 와중에도 주위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러면서도 타인을 신경 쓰는 사람. 그것이 한지수였다. 정하진은 자신이 이런 장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한지수 스스로가 꼭 알았으면 했다. 한지수는 다행히 정하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조금 발개진 볼을 긁적였다.
“아니, 뭐……. 도움받거나 호의를 받았을 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요.”
“예. 하지만 세상엔 그 기본조차 못 갖춘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갑작스러운 폭풍 칭찬에 한지수의 얼굴뿐만 아니라 귀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 차린 그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런 대화를 하려던 게 아니라며 주제를 돌렸다.
지수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어떻게든 정하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려고 노력했다. 단순히 잘 있으라는 인사는 아니었다. 고마운 마음과 앞으로 정하진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는 흔하지만 그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정하진은 조금은 쓸쓸한 눈빛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지수는 그가 눈치가 빠르니 어쩜 제게 생긴 좋은 일이 뭔지 이미 파악하고, 자신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꿰뚫었을 거라 여겼다. 그것도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그걸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많이 서운하겠지.’
언젠가 지수가 이 자리를 떠날 거라 여기고 있다면, 그로선 당연히 속상할 것이다. 그래서 지수는 그가 조금이라도 속상한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안식의 신이 일을 빨리 마무리했으면 했다.
“음, 그리고요. 제가…….”
이후 두 사람은 새벽 깊어질 때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최근 두 사람의 대화는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오늘은 과거의 이야기가 훨씬 많았다. 이야기 도중 졸음을 참지 못한 지수가 하품하자 정하진이 머그를 제 쪽으로 끌어갔다.
“늦었습니다. 이만 주무시죠.”
“시간이 벌써……. 그래요.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또 해요.”
안식의 신이 이쪽 시간으로 며칠 걸릴 거라고 했으니 적어도 하루 이틀 정도는 시간이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잘 자요. 정하진 에스퍼. 차 고마웠어요. 좋은 꿈 꿔요.”
“예. 한지수 가이드도 좋은 꿈 꾸기 바랍니다.”
그와 평범한 하루를 마무리하듯 인사를 나눈 지수는 내일 두 형제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
정하진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지수의 방문을 조용히 바라보다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침대에 누워 팔로 눈을 가린 채 심호흡해도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어지럽다 못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한지수는 명백하게 이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정하진이 알기로 조율자가 이 땅에 내려오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터였다. 물론 그 시간이 지난번보다 훨씬 빠를 거란 암시는 받았지만, 적어도 당장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기에 한지수가 저렇게 빠르게 이별을 결심한 부분이 못내 아쉽고, 섭섭하고, 또 가슴이 아팠다.
지금의 한지수를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율자가 강림하고, 한지수가 돌아갈 곳이 명확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제 곁에서 보호하고 싶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한지수 가이드 입장에선 징그러울 수도 있겠군…….’
제 생각이지만 참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누워 속상한 마음을 삭이고 있자니 한지수의 방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토토토톳 하고 작은 발소리가 정하진의 방으로 다가왔다. 몸을 일으켜 앉은 정하진은 제 방까지 행차한 토토를 발견하고 침대를 두드렸다.
와다닥 달려온 토토가 정하진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그리곤 볼 주머니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더니 (ㅇㅅㅠ) 모양의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이 그려진 팻말을 꺼냈다. 정하진은 토토가 손에 쥔 작은 팻말을 알아보았다. 정하율이 토토에게 만들어 준 ‘감정 표현’ 팻말 중 하나였다.
“……또 뭐가 문제지?”
“쮜잇.”
눈물 팻말을 내려 둔 토토가 또 볼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곤 다른 팻말을 꺼냈다. 이번엔 팻말에 이모티콘이 아닌, 정하율 필체로 쓰인 깨알 같은 문장이 보였다.
[토토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