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64화 (164/172)

#164.

흐름 1

화자가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결론적으로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그들이 믿는 유일신을 부정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해 결국 까 보면 너희가 믿는 신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한다. 너희 신은 유일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신은 얼마든지 더 생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바티칸에 방문하기 전, 사실 한국에서도 이미 같은 내용으로 다른 종교 고위 관계자와 대화가 진행되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처참하게 가라앉았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린 한지수는 조슈아를 비롯해 다른 프리스트들의 눈치를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이들 얼굴엔 그들처럼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다소 난감해하는 얼굴이긴 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군요.”

조슈아가 침착하게 대꾸했고, 정하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후원자들이 있다는 건 이미 세상 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또 어떤 종교는 후원자의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후원자들의 존재 자체는 받아들이되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진 않으셨지요.”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사항이었다. 기존의 어떤 종교는 후원자들의 존재를 처음부터 받아들였고, 그들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종교는 초반부터 후원자의 존재 자체를 이단으로 치부하고 언급을 금기시했다. 지금도 각성자들이 후원자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묵인할 뿐이라 그들 앞에서 후원자의 이름을 언급하기란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해당 종교의 독실한 신자였다가 각성자가 된 이들은 자신의 신앙이 신실함을 증명하느라 땀을 뺐고, 언론이나 그 어떤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SNS에서조차 후원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바티칸 측에선 저 둘과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후원자들이 가진 능력이 인류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을 절대 신이라 부르진 않았다. 그저 인간보다 뛰어난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거룩하여 신성시할 존재는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다.

‘사실 내 생각에도 그렇긴 한데…….’

후원자가 거룩한 존재냐 묻는다면, 한지수가 볼 땐 전혀 아니었다. 물론 순수하게 능력만 두고 본다면 어느 정도 위대한 존재인 건 맞았다.

게다가 그들은 다분히 기분파라 가끔은 인류에게 생각도 못 한 방식으로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도와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고.

그 어떤 순간에도 인류의 안위를 살피는 후원자는 사실 드물어서 푸른 달의 신, 붉은 달의 신, 은하수의 신 저 셋과 더불어 안식의 신이 조금 많이 특이한 경우였다.

말을 꺼냈던 정하진은 이번엔 추기경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뒷말을 덧붙였다.

“제가 종교에 무지하여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말을 포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안식의 신에게 들은 대로 전달드리자면, 우주에는 각각의 생명들이 그저 믿고 기도하는 마음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스트들은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심지어 무슨 뜻인지 모두 대번에 이해한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제 후원자 안식의 신이 알려 준 바로는. 그것이 ‘믿고 바라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신념을 지니고, 믿고,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면……, 그 먼지 같은 작은 믿음의 근원을 지지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아 기꺼이 움직여 주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라고요.”

* * *

“뭐야. 너희 둘 다 눈을 왜 그렇게 떠?”

“…….”

“…….”

“어허? 이 녀석들이 쌍으로 불순하게 눈을 땡그랗게 뜨고. 야, 한지율! 넌 지금 속으로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뜨지, 세모나게 뜨나요, 라고 생각했지?”

“……!!”

화들짝 놀란 한지율이 제 형의 품에 쏙 파고들며 고개를 묻었다. 지수는 제 앞에서 근원에 대해 설명하는 안식의 신의 인형 중 하나, 그러니까 케이 후작을 다소 불순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면 우주가 움직인다……. 뭐 이런…… 말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지금?”

“네가 굳이 그렇게 짚어 주니, 내가 지금 겁나 수상한 종교 지도자 행세를 하는 기분이거든? 결론적으로 비슷한데, 이건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고. 그러니 그렇게 불경하게 보지 말아 줄래?”

“형아……, 케이 아저씨 이상해…….”

“아냐. 케이 아저씨 안 이상해. 여기 보세요, 한지율 어린이.”

케이 후작은 평소 ‘쪼꼬미’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한지율을 어르고 달래며 손바닥 위에서 불꽃 마법을 터뜨렸다. 펑펑 터지는 작은 소리 덕분인지, 형 품에 안겨 괜한 엄살떨던 한지율의 귀가 쫑긋거리며 고개가 슬그머니 돌아갔다.

“손바닥에서 터지는 불꽃 갖고 싶으면 아저씨 이야기 잘 들어.”

“……네!”

한지율은 씩씩하게 대답하곤 형 한지수의 무릎에 다시 착 앉았다. 지수는 작디작은 동생을 다리에 앉힌 채 배를 도닥여 주며 물었다.

“그러니까 케이 후작님의 말씀은……. 제가 여기서 지구가 평화롭길 간절히 바라고. 또 재윤이 형이 빨리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냥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그게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몇 번을 이야기하냐…….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우리는 다 우주 먼지 같은 존재야. 이것도 은유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거든.”

우주 이야기만 나오면 지수와 지율 형제는 조용해졌다. 덕분에 케이 후작은 편히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우주 먼지긴 해도, 그 우주 먼지가 많이 모여서 같은 것을 바라는 이가 많아지면 언젠가는 그 결실이 보일 수 있다는 거야.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단순 예시로, 무조건 다 이루어지는 거면 세상 사람이 다 모여서 특정 인물을 죽여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 대상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

이곳 필리스라는 별에 온 이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지수는 강재윤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강재윤이 언제 돌아오는 건지 조금이라도 알려 달라고, 힌트라도 달라고 케이 후작을 마주칠 때마다 조르고 졸랐는데, 그 결과가 지금. 이해하기 어려운 강의를 듣게 된 거였다. 형 껌딱지인 한지율 역시 얼떨결에 같이 듣게 되었는데,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지율이 갑자기 톡 튀어나온 햄스터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럼 있잖아요, 아저씨. 제가여. 오늘 마카롱 먹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면, 마카롱을 먹게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지수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이따 마카롱이라도 준비해 달라고 주방에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케이 후작이 뜻밖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비슷해. 오늘 쪼꼬미 네가 마카롱이 너무 먹고 싶다고 치자. 그래서 마카롱을 먹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어.”

한지율이 집중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케이 후작이 설명을 이었다.

“네가 그걸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가 마카롱을 먹고 싶어 한다는 걸 몰라. 그렇지?”

“네!”

“그런데 네가 지금 그걸 말해서 내가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쪼꼬미 네가 마카롱을 먹게 될 수도 있게 된 거지.”

“헛?”

지율이 휘둥그레진 채 작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아이의 격한 리액션에 만족한 건지, 단순히 애가 귀여워서 그런 건지 몰라도 픽 웃은 케이 후작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한지율 앞에 놓인 찻잔 접시에 작은 마카롱 두 개가 생겨났다.

“……!”

지율이 마카롱에 집중한 사이, 케이 후작은 지수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쪼꼬미가 말해서 만들어 준 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지만, 이건 바라는 것 중 말을 사용한 힘이야. 저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마카롱을 주든 말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의 영역이지. 그런데 나는 주는 걸 선택했어.”

“……”

“어허. 표정 관리 해라. 너 지금 되게 불경하다.”

“큼. 크흠. 아니. 너무……. 그럼 세상 모든 게 다 그런 식 아닌가요? 내가 뭐 하고 싶다고 말하면, 누군가 그걸 그 바람을 듣고 같이 할지 말지 선택하고, 그러다 결국 같이하는 것을 선택하는 건……. 그냥 들어준 사람이 선택한 거지, 힘이 작용했다고 보기는 조금…….”

“음. 그래. 딱 이런 반응 때문에 이 내용을 가르치는 게 어려운 거야. 대부분 인간, 그러니까 인류의 99%는 너처럼 생각해. 말에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온전히 누군가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결정이라고 여기지. 하지만 말에는 분명 힘이 있어. 그 힘이 판단을 부추기는 거야.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받아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그 기운이 도움을 주는 거고.”

“…….”

“그럼, 아까 설명한 부분은 굳이 이런 힘을 말하지 않고 종교적 기도로 퉁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물으려 했지?”

“네…….”

“종교적 기도가 오히려 이럴 때 도움 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100%의 마음으로 신을 믿는 그런 독실한 인간들이야 상관없어. 그들은 자신이 하는 기도가 믿는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 믿거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항상 의심하는 생물이야. 그래서 자신이 어떤 신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100% 믿지 못하는 자들이 훨씬 많아.”

“…….”

“그런 자들은 순수하게 바랄 수 없게 돼. 기도하면서도. 자기가 뭘 바라는지 간절히 희망하면서도, 그 바람이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에 확신을 두진 않아. 그저 마음의 위로만 얻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

“하지만 자기가 이 바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간절히 바라면 누군가가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인간이 비는 소망은 전혀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종교와 관계없이 어떤 신을 믿고 바라든, 자신의 신념을 믿고 바라든 간에 확신이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명확히 다른 결과를 가져와. 인간은 그걸 기적이나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우린 흐름이라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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