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65화 (165/172)

#165.

흐름 2

“흐름…….”

“그래. 그렇지만 인간들이랑 대화할 때 이런 거 하나하나 따지고 짚고 넘어가다간 대화가 끝나지 않는단 말이지. 그래서 그냥 너희가 말하는 우연, 운명, 기적, 행운 같은 말에 동조하는 것뿐이야.”

우연. 운명. 기적. 행운. 모두 다른 뜻을 지닌 단어지만, 케이 후작이 조금 전 말했던 것과 저 단어들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아주 맞아떨어지진 않아도 어느 정도 한 분류로 엮을 수 있는 그런 단어들. 공통점을 깨달은 지수의 묘한 표정을 보고 그가 이해했다 느꼈는지 케이 후작이 덧붙였다.

“일어나지 않으면 원래 없던 일이지만, 바람대로 일어나면 좋은 일. 거기에 가장 근접한 단어가 저 정도거든. 바라는 마음이 모이면 커지고 눈에 띄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모든 바람이 다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그새 마카롱을 다 먹은 지율이 손가락을 쫍쫍 빤 후 케이 후작을 향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아저씨 믿어요!”

“오냐.”

“아저씨가 재윤이 형 데려와 줄 것도 믿어요!”

“그래그래.”

“그리고 지구에 있는 또 다른 지수 형아도 지켜 줄 거라고 믿어요!”

“어어…….”

“그리고, 또……. 어……. 또, 마카롱도 또 줄 거라고 믿어요! 엄청 많이!”

“…….”

“또……. 또 치카치카 안 해도 충치 생기지 않게 해 줄 거라고 믿어요!”

자그마한 입으로 열심히 조잘거리는 한지율의 말을 귀담아듣던 케이 후작이 슬그머니 지수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얘 지금 나한테 주문하는 거 맞지?”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 동생을 품에 안았다.

동생이 하는 말들이야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직전까지 케이 후작이 들려준 이야기는 알 듯 말 듯 한 데다 그 이야기의 핵심 자체도 믿기 어려웠다.

‘모든 일이 크고 작은 바람들이 모여 이루어진다니, 그건…….’

아직은 지수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하지만, 문득,

‘오히려 나한테 희망적인 거 아냐? 내가 믿기만 한다면……. 간절하게 믿고, 생각하고, 확신을 담아 바란다면 이루어질 확률이 올라간다는 이야기잖아? 평소 지율이를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한 것처럼.’

물론 형 한지원은 만나지 못하고 동생하고만 재회했다고 해서 그의 가르침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케이 후작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동생과 이렇게 함께 지내게 된 것조차 자신은 기적이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일이 어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평소 자신이 강하게 바라서 이루어지게 된 일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좋을 것 같았다.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내 바람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굳이 탓할 필요도 없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이 훨씬 더 많다고 했으니까.’

흔한 말로 우주의 한낱 먼지 같은 존재들.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 작은 먼지가 사소한 일이라도 무엇이든 이뤄 낸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바쁜 케이 후작을 붙들고 물어볼 만큼 초조했던 마음도 조금은 평온해지고, 불안했던 기분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옛말 중에 의외로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사는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긴다는 어르신들의 말 같은 것. 어쩌면 그들이 말했던 ‘긍정적인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지율이 다시 지수의 품에 포옥 파고들었다. 지수는 동생의 작은 몸을 도닥이며 이론적으론 쉽지만,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케이 후작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지수가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을 추스른 것을 확인한 케이 후작이 지율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은 후 일어났다.

“그럼 나는 다시 일해야 하니, 빨리 나가. 훠이.”

“히힛~!”

케이 후작이 영지 관련 일이 바쁘다며 나가라고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귀찮은 벌레 쫓듯 훠이 훠이 어르신 같은 추임새까지 넣는 통에 지율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지수는 그런 동생을 품에 안은 채 꾸벅 인사했다.

“방해해서 죄송했어요. 그럼……. 아. 맞다.”

“음?”

“아까 현서 형이 오늘은 케이 후작님이랑 후작 성 밖에서 같이 저녁 식사하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요.”

“뭐? 그렇게 중요한 용건을 이제야 말하다니!”

벌떡 일어나려는 케이 후작을 향해 한지수가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현서 형이 일 끝내기 전엔 절대 오지 말라고 꼭 덧붙여 달라 했어요. 저녁 식사 시간에 꼭꼭 맞추라고. 아직 한낮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하셔야 하는 일은 다 하고 오세요. 전 분명히 전했습니다.”

“…….”

자신도 동생을 품에 안은 채 땅에 내려놓지 않고 있지만, 눈앞의 남자는 훨씬 더 심각한 동생바라기였다. 지수는 만약 <동생밖에 모르는 멍텅구리 뽑기 대회>라도 열면 무조건 케이 후작이 우주 1등을 할 거라고 확신했다.

김현서의 부탁대로, 무리하게 일정 잡지 말라는 내용을 여기서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한 지수가 유유히 동생을 품에 끼고 나갔다.

* * *

‘오늘은 유독 하늘이 참 맑다.’

필리스의 하늘은 지구와 다를 게 거의 없었다.

가끔 지구보다 다양한 색채를 띠는 날이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거의 비슷했다. 바다 역시 그러했는데, 그러다 보니 남부 영지의 잔잔한 바다는 어느덧 지수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가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지수는 눈부신 은파에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 함께 오후 외출을 나온 후작 성 기사들과 물놀이하는 동생을 지켜봤다.

모래 위에 깨끗한 천을 깔고 앉아, 읽던 책, 아니, 엄밀히 말하면 글공부용 그림책을 내려 둔 지수는 새삼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즐겁게 노는 동생을 지켜보는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한지수의 외출 덕에 오후 훈련을 넘기게 된 기사들은 지율이와 열정적이다 못해 몹시 과격하게 놀아 주고 있었다. 다 같이 쫄딱 젖은 채 지율을 거의 공처럼 던지고 받으며 놀아 주는 모습이 그저 보기 훈훈했다.

후작 성 소속 기사들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다가, 지구의 에스퍼 등급으로 치면 A급 에스퍼 수준인 소드 익스퍼트부터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든든하게 저와 동생을 호위해 주고, 놀아 주기까지 하니 지수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영지 사람들 말로는 남부 지역의 자랑이 해군이라고 하던데……. 그건 사람들이 후작 성의 기사들을 볼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걸지도.’

지수가 그리 생각한 찰나.

해군을 떠올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 희미한 가락이 들려왔다. 마치 군가와 비슷한…….

‘아니. 군가 맞는 것 같은데?’

미묘하게 군가라는 확신이 드는 노래였다. 일단 남자들이 떼창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아주 먼 곳에서 열 맞춰 달리는 남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두 상의를 탈의한 채 짧은 반바지에 맨발로 물을 튀겨 대며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오?”

설마 이것도 해군이 궁금하다고, 보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바란 내 마음이 이뤄 낸 결과인가? 실없는 생각이라고 느끼면서도, 이렇게 해군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어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상황이 순수하게 재미있어 작게 웃음을 터뜨린 지수가 눈을 곱게 접은 채 그쪽으로 시선을 두자, 이번엔 반대로 내내 까르르 웃던 한지율이 웃음을 뚝 그치곤, 제 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쭉 돌렸다.

후작 성 소속 기사들 역시 저들이 호위 중인 형제가 바라보는 방향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러는 중에도 남부의 명물이라 불리는 해군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들이 뛸 때마다 멀리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탄탄한 가슴과 선명하게 굴곡진 복근이 해변에 놀러 나온 영지민들과 지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앞줄에 얼굴 잘생긴 해군들을 배치한 건지 몰라도 외모 또한 빼어난 것이 후작 성 기사들 눈에 아주 잘 보였다.

한지율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함께 놀던 한 기사가 갑자기 셔츠를 벗어 지수의 돗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로 휙 던졌다. 그가 던진 셔츠는 지수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 리버스의 발 근처에 떨어졌다.

“돌아갈 때도 입어야 하는데, 옷이 너무 젖었네.”

갑작스러운 탈의를 본 리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제게 셔츠를 던진 기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기사도 셔츠를 벗어젖히더니 리버스의 발치까지 철퍼덕 소리 나게 옷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게.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젖었군.”

마지막으로 지율을 어깨에 올리고 있던 기사가 잠시 다른 기사에게 아이를 맡기더니, 상의를 거칠게 벗어 던지며 대답했다.

“맞아. 이렇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갈 수는 없지.”

“으응! 마자! 삼촌들 옷 젖어써!”

리버스는 마지막 기사가 던진 셔츠가 기어이 제 부츠 위로 떨어진 걸 보고 질색하며 걷어차 멀찍이 날렸다.

세 기사가 상의 탈의를 마쳤을 때, 해군들이 이제는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지수는 그저 순수하게 처음 보는 해군이 신기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후작 성 소속 기사들은 좀 전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물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성날 정도로.

한지율 역시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누구보다 열심히 물놀이를 즐겼으나, 저음으로 군가를 부르며 지나가던 해군들은 그 모든 소란에도 그저 묵묵히 달릴 뿐이었다. 유독 지수 일행 근처를 천천히 지나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지수는 평온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요란한 광경 속에서 홀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머지 일행들과 전혀 다른 바람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재윤이 형. 난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형이랑 지율이랑 셋이 꼭 이 바다에 오고 싶어. 아, 그 전에. 형이 해야 하는, 지구에서 중요한 일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꼭. 형이 바라는 대로 해결하고 내게 돌아오길 바랄게. 나는 매일매일 형을 생각해.’

해군의 노랫소리는 더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후작 성 기사들은 지율과 열정적으로 놀아 주고, 지율이 초음파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와중에, 한지수의 소망은 잔잔한 바닷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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