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흐름 3
늦은 저녁.
함께 목욕을 마친 지수는 지율의 머리를 수건으로 북북 닦아 주고 있었다. 바다에서 실컷 놀고 돌아와 아기 배가 통통해질 때까지 저녁을 잔뜩 먹고, 따뜻한 물에 푹 들어갔다 나온 지율은 벌써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지수는 제 허벅지에 앉아 명치에 고개 박고 졸기 시작한 동생의 머리를 새 수건으로 한 번 더 잘 닦아 준 후 작은 몸을 침대에 눕혔다.
‘기절했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지율이 몇 초 만에 기절하다시피 곯아떨어졌다. 이불을 덮어 주고 침대맡에 앉아 푹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수는 지율이 아침까지 깨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조용히 퇴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제가 지내는 방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후작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케이 후작의 방이나 그의 동생 부부가 쓰는 방을 제외하면 이 방이 가장 넓고, 위치도 좋은 방이라고 입 모아 말할 정도였다.
지수 역시 그들의 말이 단순히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이 넓은 건 당연했고, 그 안을 채운 가구도 모두 잘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으니까. 심지어는 침실과 같은 공간에 있긴 하지만, 인테리어를 잘 활용해 분리된 공간으로 꾸며 둔 거실도 있었다.
그 외에 침실 한쪽 벽면이 전부 창문인 것도, 그 창문 밖으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정원이 보이는 것도, 동생이 좋아하는 알파카가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도, 또 밤이 되면 창밖으로 보이는 우주 같은 풍경 등 전부 다 만족스러웠다.
그중에서도 지수는 지금 올라앉은 퇴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이돌 활동 당시 가끔 화보를 찍거나,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만들어진 세트장에서나 앉아본 퇴창과는 차원이 다르게 아늑하고 좋았다.
올라앉을 수 있는 너른 부분은 모두 쿠션 처리되어 침대나 다름없었고, 퇴창의 위쪽도 반달형 돔 형태의 창문으로 처리되어 있어 누워 있으면 밤하늘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플라네타리움에 들어온 것 같아.’
지수는 이 별에서 살기 시작한 초창기엔 동생 지율을 품에 안고 여기서 재우곤 했다. 드디어 형이랑 대화할 수 있게 된 지율이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해서, 도통 자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어떻게든 형과 더 놀려는 동생과 나란히 누워 천장 유리로 보이는 별을 보다 보면 통통한 배를 조금 도닥여 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재울 수 있었다.
“후우…….”
마치 새카만 바다에서 파도치듯 빛나는 은하수를 응시하던 지수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무수히 많은 별을 보고 있자니 제 곁을 굳건하게 지켜 주던 정하진이 문득 떠올랐다.
그가 조금 그리웠다. 아니, 퍽 많이 그리웠다. 강재윤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의지 되는 친구로서였지만. 몇 달을 함께 매일 붙어 지냈는데 정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거짓일 터였다.
그가 잘 지낼 거라는 것은 안다. 불완전한 껍데기, 그러니까 같은 ‘한지수’이지만 그가 사랑했던 한지수가 아니었던 자신과 지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에 그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하고 떠난 게 아쉬웠다. 저도 그런 식으로 갑자기 떠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랬던 것이긴 했지만.
물론 떠나기 전에도 자리를 만들어 진심으로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했으니 그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겠으나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정하진을 생각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이 반, 고마운 마음이 반이었다.
최근 필리스에서 동생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이 더욱더 와닿아 더 그랬다. 정하진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며 한지수라는 사람을 살려 두기 위해 노력했는지. 후원자가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 속의 정하진이 홀로 걸어왔을 길이 얼마나 혹독한 길이었을지…….
‘케이……, 아니. 안식의 신 말대로 기도나 또 해야겠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홀로 있는 시간엔 기도에 집중하기 더 좋았다. 지수는 밤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살포시 감고 두 손을 배 위에 깍지 껴 가지런히 올린 채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가 남겨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소망과 그리고 강재윤이 아름다운 푸른 별을 구제하고 마침내 제 곁으로 돌아오기를 강하게 바랐다.
‘나는 의심하지 않아. 정하진 에스퍼는 지구에서 행복하게 잘 살 거야. 그리고 재윤이 형은 지구에서 할 일을 마치면 바로 내게 돌아올 거야.’
필리스에 오기 전처럼 확신 없는 허무함만 남는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지수는 온전히 믿고 있었다. 강재윤이 제게 돌아올 것을. 지금껏 오직 제게 돌아오기 위해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그가 너무도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그를 당장 품에 안고 보듬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커져 갔다.
지수는 낮에도 소원했던 같은 내용을 이번엔 조금 더 확신을 담아 바라기 시작했다. 긴 여정을 끝낸 당신이 하루빨리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마음으로.
‘……하여간에 빨리 처리하고 후딱 돌아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으니까.’
기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탓에 어쩐지 의식의 흐름처럼 흘러가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계속해서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정도로 강하게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바라면 어쩌면 우주에 만연하다는 그 보이지 않는 흐름이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수는 깊은 밤이 되도록 제 소망을 담아 구체적인 바람을 기도했다. 제 바람이 ‘흐름’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간 소망이 작은 바람이 되어 그에게 닿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 *
비공식 접견을 마친 조슈아는 정하진과 한지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원래 두 사람이 가려던 장소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조금 더 둘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다만 여독이 쌓인 건지 한지수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먼저 손님방 침실에서 잠들어 버렸기에 조슈아와 정하진 둘만이 남아 각성자도 조금 취기를 느낄 수 있다는 독한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
취하지도 못하는 술을 나눠 마시며 새로 채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진은 조슈아의 얼굴이 복잡해 보이는 것을 진즉 눈치챘지만 캐묻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신을 향한 기도만 올렸던 이들에게 다른 전능한 존재에 대한 진실된 믿음과 그를 지상에 강림시키기 위한 기도를 요청했으니까.
거기에 정하진은 바티칸 소속 프리스트들이 공식적으로 나서 주길 요청했다. 바티칸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추기경은 이에 대해 확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기 전, 그곳에 모인 프리스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나와 여러분은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에 복잡해 보였던 다른 프리스트들의 표정에 확신이 깃들었다. 정하진은 종교적 의미는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추기경이 암묵적으로 정하진의 요청을 받아들였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 조슈아가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만 들어도 확실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평생 신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고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종교가 없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 정하진은 공감하는 것처럼 끄덕였다. 사실 아직도 신 말고 다른 전능한 존재를 100% 믿고, 그의 강림을 기도하는 건 어렵다고, 지금부터라도 연습을 좀 해야겠다며 조슈아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시간째였다.
정하진은 조슈아를 포함하여 비슷비슷한 반응인 바티칸 사제들에게 시간을 주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바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으니까. 다만 정하진은 2차 대격변 대응팀과 자신이 계획한 일을 슬슬 세상에 알릴 때가 왔다고 느꼈다.
‘현아에게 시작하라고 해야겠군.’
대응팀에서 이 계획을 발표하면 아마 세상이 꽤 혼란해지겠지만. 그래도 분명한 건 2차 대격변이라는 재앙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확실한 희망을 싹틔울 이슈가 될 것이라는 거였다.
이미 재앙의 징조가 지난 삶보다 몇 년은 빠르게 곳곳에서 조금씩 나타나고 있으니, 그만큼 조율자의 등장도 빨라야 했다. 하지만 지난 삶과 같은 속도라면 이미 지구는 많은 것을 잃은 후일 터.
그렇기에 이번 삶에선 안식의 신이 말했던 흐름을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비록 저들이 우주 먼지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지구에 존재하는 인류가 모두 같은 것을 바라고, 간절히 믿고, 원한다면. 그 흐름 또한 반응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정하진은 지구의 운명이라는 도박판에서 조율자의 강림이라는 패를 잡았다.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라는 판돈을 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