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현은 작게 큭큭대며 눈앞에 떠 있는 스킬창을 훑었다. 단 하나의 기술도 쉽게 얻은 게 없었다.
그만큼 하나하나 담긴 기억이 많았고 천둔형에 시선이 도달했을 땐 다른 추억 하나가 또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태운이가 13살쯤 됐을까.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비급 하나를 도둑질해야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태운이를 떨어트려 놓고 혼자 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자길 버리고 가는 거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따라붙는 바람에 곤란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어린애한테 절도 공범죄를 만들어 주고 말았지만, 눈은 퉁퉁 부어서 그저 좋다고 빙긋 웃는 아이 덕에 기억 자체는 좋게 남아 있던 일이었다.
“쫓기며 살던 게 뭐가 그리 좋다고. 하아.”
시현은 결국 웃음을 실실 내뱉다가 또 잔잔하게 차오르려 하는 외로움에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리고는 아직도 한참 쌓여 있는 알림창을 계속 밀어 올렸다.
그러나 잠시 후.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바로 제 시야에 들어오는 아주아주 이상한 알림이 시현의 주의를 빼앗았다.
[칭호 ‘은둔하는 정의’가 추가됩니다.]
“은둔하는 정의…?”
이건 또 무슨. 분명 칭호는 각각 하나씩만 생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시현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알림창을 유심히 보다가 꺼 버리고는 다시 상태창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저 새로 생긴 중2병다운 여섯 글자는 시현이 아무리 상태창을 껐다 켰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글거림에는 뒤지지 않을 원래의 칭호 옆에 못 박힌 듯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체 왜 제게만 평범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는지 조금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만 같았다. 시현은 그새 조금 달라진 상태 창을 천천히 둘러보다 결국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시현[세상을 가르는 자(S)]
칭호 [멸망의 시작, 은둔하는 정의]
체력-25
근력-20
민첩-26
지력-19
내공-29
운-5
“미친…. 운 이건 대체 뭔데 이래.”
다른 게 다 20 가까이 올라갈 때까지 혼자 요지부동인 운 수치가 유난히 눈에 틀어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싸늘하게 감겨 오는 불길함에 아주 잠깐 부르르 떨며 팔뚝을 탁탁 쳐 낸 시현은 여전히 많이 쌓여 있는 알림창을 그냥 내려 버렸다.
어차피 지금 제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계속 저 ‘5’만 보고 있어 봤자 숫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테니.
시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가 가물가물 감기는 눈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흐트러졌던 이불을 가지런하게 모양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딱 잠이 들 때쯤. 마치 시현이 지쳐 쓰러져 잠들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투명한 상태창이 반짝하며 떠올랐다.
[혼돈의 힘과 이어집니다.]
‘뭐가. 이어진다는….’
그러나 시현은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무겁게 내리누르는 잠에 깊게 빠져들었다.
***
<어라?>
분명 방금까지도 푹신한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멀쩡하게 서 있는 제 몸에 시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그리고 단번에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여긴. 신교 안….>
비록 아주 짧은 기간 머물렀던 곳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시현은 그제야 이게 자각몽 같은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참 반갑지 않은 꿈이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또 순간순간 튀어 오르는 그리움에 당분간 힘겨워질 게 뻔했다.
시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곤란하단 얼굴로 이마를 작게 긁적였다.
내일도 일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당연하게도 이 장소와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자꾸만 발을 움직이게 했다. 결국 시현은 조금만 둘러보자,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뚜벅. 뚜벅.
지금 시현이 걷고 있는 쭉 뻗은 통로는 대전 안에서도 꽤 안쪽인 듯 양옆으로 보이는 나무들의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비록 신선한 바람과 공기, 풀 냄새 같은 감각은 꿈이라 그런지 무척 희미했지만, 안정감이 느껴져 발걸음이 느긋해졌다.
그리고 고작 몇 주 머물렀던 공간에 이런 애착을 느낀다는 것에 실소가 튀어나왔다.
<왜 이래 진짜. 나이 먹어서 그런가.>
시현은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사람이 있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걸어가지 않아 보이는 모퉁이 뒤로 작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현은 과연 제 꿈에 제일 처음 나올 인간이 누굴까 조금 기대감을 가지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지금 흑풍대는 다 대기하고 있나?>
<예…. 봉마연천광절진을 시전할 준비도 완료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주 조금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혀 처음 보는 인물 두 명이 시현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며 모퉁이를 꺾어 걸어 나왔다.
꿈이라면 제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나오는 게 보통이 아니던가. 시현은 의외의 상황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저 둘의 심상치 않은 대화에 빠르게 발을 놀려 따라붙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들이 말하는 봉마연천광절진은 상대방을 처리할 수 없을 때, 그에 상응하는 온갖 생기를 끌어모아 최후의 수단으로나 사용하는 봉인술이었다. 대체 왜 이딴 내용의 꿈을 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괜히 흥미가 생겨났다.
그러나 시현은 조용히 그들 뒤에 붙어 걸어가며 점점 많아지는 인파들과 멀쩡하지 못한 건물들, 이상하게 익숙한 길에 조금 표정이 굳어 갔다.
이 길의 끝에는 천마대전이 위치해 있지 않았던가?
<뭐야? 건물은 대체 왜 저런 거야?>
시현이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며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상한 예감에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얼마 걷지 않아 수십의 장로와 호법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환영적자부터 대호법과 좌우호법들, 각 파의 책임자들까지.
그들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은 채 결의에 찬 얼굴로 대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순간 계속 불던 바람이 멈췄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음울한 기운을 뿌리는 대전을 중심으로 검붉은 내기가 안개처럼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현에겐 너무나 익숙한 색의 내기였다. 순간 꿈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불안감에 찬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쿵대기 시작했다.
<시작하지.>
그러나 그 현상에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짧게 눈을 마주치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대호법이 양손을 엮어 내기를 모으는 것에서부터였다. 그리고 마치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듯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현은 뭐 이딴 꿈이 있냐며 조금 당황해하는 순간, 마치 억눌려 있던 공기가 터져 나가듯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지며 땅거죽을 뒤집어엎고 자욱하게 먼지를 만들어 냈다.
쿠웅.
동시에 방심하고 있던 시현은 종잇장처럼 충격파에 튕겨 나가 어벙벙한 얼굴을 한 채 지저분한 땅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으윽, 이게 무슨.>
시현은 둔중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명치를 문지르며 급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뿌연 먼지 사이로 그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했던, 그러나 그만큼 그리웠던 이의 붉은 눈과 하얀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주 먼 거리였음에도 어제 본 사람처럼 그 얼굴이 무척이나 생생했다.
<잠깐. 뭐라고 말하는 거야?>
그때 태운이 제 시선을 발견한 건지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가를 달싹였다.
<찾았…다?>
“헉!!!”
시현이 눈을 번쩍 뜨고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창밖으로는 언제 해가 떴는지 화창한 햇빛이 하늘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게…. 무슨 개꿈이야.”
멍한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를 쓱쓱 쓸어내리던 시현이 괜히 불안한 꿈 내용에 작게 혀를 차며 천천히 일어섰다. 몸도 찌뿌둥한 게 잠도 깊게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자각몽이라는 것도 생전 처음이었지만 겪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다. 마치 다른 이들이 태운이를 봉인하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대체 왜 이딴 말도 안 되는 장면이 꿈에 나왔는지 조금 황당했다.
시현은 꿈 때문인지 아직도 뻑뻑하게 건조한 눈을 연신 비비면서 핸드폰을 들어 올려 시간부터 확인했다.
“아….”
그러나 시간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전화에 시선이 갔다. 분명 모르는 번호인데도 왠지 누가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은 귀찮다는 얼굴로 부재중을 남긴 번호로 통화를 건 시현은 다시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워서 핸드폰을 볼 쪽에 걸치도록 올려놓고 늘어져 신호음이 흘러가는 걸 듣고 있었다.
“형님!!! 저 이규민입니다!”
“…예에. 부재중이 있길래요.”
시현이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목청에 저도 모르게 몸을 튕기며 고개를 비틀었다.
동시에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재빠르게 잡아챈 시현이 작게 심호흡하며 다시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와, 미친. 음공으로 공격받는 줄 알았네.’
“아! 오늘 헌터 협회 가신다고 하셔서 혹시 필요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아. 맞다.”
12시…. 늦었다.
시현은 그제야 오늘의 스케줄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리곤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욕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몇 가지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잠시, 잠시만요! 제가 좀 늦어서 그런데 이따가 연락드려도 될까요?”
시현은 부랴부랴 칫솔에 치약을 짜며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봐도 절대 먼저 전화를 끊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도 이규민은 조금 머뭇거리긴 했으나 알겠다며 통화를 끊었고 시현은 미친 듯한 속도로 씻은 다음 옷장을 가득 채운 후드 티를 하나 주워 입었다.
“아니, 무슨 검사 하나 하는 게 대체 왜 시간이랑 요일이 정해져 있는 거야?!”
분명히 일하기 싫어서 한꺼번에 오라고 한 걸 거야.
시현은 융통성 없는 헌터 협회의 테스트 일정에 조금 투덜대면서 아래가 아니라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차피 택시나 버스 같은 교통수단을 쓰는 것보다 제가 경공을 써서 달려가는 게 훨씬 더 빨랐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앞뒤로 교차하며 이동하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훙 하는 소리와 함께 시현의 몸이 튕겨 나가며 순식간에 건물 몇 개를 뛰어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