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렇게 한참 앞으로의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도중 불투명한 문을 열고 흰머리의 자그마한 소년이 쭈뼛대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요즘 각성자들 덕에 다양한 머리카락 색이 길거리에 많아졌다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새하얗게 새어 버린 건 눈에 띄는지 여러 시선이 유준에게로 꽂혀 들고 있었다.
시현은 벌써 쩔쩔매는 듯한 유준을 보고는 눈치챌 수 있을 정도만 작게 기운을 쏘아 냈다.
그러자 그걸 느낀 건지 유준이 고개를 돌려 일행이 위치한 곳에 시선을 딱 고정했다.
“아, 안녕하세요!”
유준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드는 시현의 모습에 누가 봐도 살았다는 표정으로 달려와 시현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래. 안녕.”
“근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그리고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득달같이 궁금함을 내비쳤다.
“우리 조만간 게이트에 들어갈 거야.”
“아, 진짜요? 잘됐네요…. 자, 잘 다녀오세요…. 다치지 마시구요….”
유준은 제가 같이 간다는 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듯 처음 보는 인물들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현은 빙긋 웃으며 유준을 앞에 비어 있는 자리에 손짓해 앉히고는 아직도 자기를 왜 불렀나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갈 거야.”
“…예?”
시현은 바보같이 멍하니 반문하는 유준에, 잠시 픽 웃고 자세한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얘기를 모두 들은 유준은 설명이 끝나 갈 때쯤엔 눈망울이 촉촉해진 채 양손을 벌게지도록 부여잡고 있었다.
“그럼…. 저 때문에 억지로 팀을 만드신 거네요…. 맘 같아선 괜찮다고 해야 할 것 같지만, 저도 가고 싶어요…. 고마워요. 형.”
“나 말고 옆에 의뢰인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이름은 이규민. 이쪽은 서유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저 비록 스킬은 하나뿐이지만…! 그 분석하는 눈이라는 스킬이 길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정말 저도 데려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규민은 무척이나 간절해 보이는 유준에 조금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곧바로 넉살 좋게 말을 줄줄 붙이며 온갖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시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제 후드 끝을 계속 잡고 있는 태운의 손을 가져와 맞잡았다.
‘아무래도 슬슬 불안해지나 보네.’
시현이 망설임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태운도 방긋 웃더니 벌떡 일어나 그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럼 일정 잡히면 연락해 줘요.”
“아, 잠시만요! 혹시 라이프 워치 있으세요?”
그때 랩이라도 하듯 조금 굳어 있는 유준을 잡고 수다를 떨고 있던 규민이 시현을 불러 잡았다.
“음, 그게 뭔가요?”
그리고는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오자 조금 밝은 얼굴을 하며 신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몬스터 웨이브형 광산과는 다르게 스토리형 광산의 경우는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꼭 본인을 식별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다.
그 아이템이 라이프 워치였고, 원래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저렴하기도 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으음…. 난 성안 때문에 구별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필요하겠어.’
시현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상황에 빠르게 아이템에 투자할 금액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규민의 말에 시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눈썹을 축 늘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 그룹 산하에 아이템 거래소가 있어요! 그 정도는 지원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시현은 다짐했다. 지금은 제가 너무 급해 돈을 다 받았지만, 다음에는 꼭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주겠다고.
“지금 당장 가시죠.”
“앗! 지금요? 자, 잠시만요!”
그러나 방금까지 자신감에 가득 차서 당당히 말을 하던 규민이 순간 멈칫하더니 느릿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한참을 화면을 보다가 겨우겨우 귓가에 가져다 댔다.
“어어. 지금 가도 될까…? 으응…. 맞아. 미안.”
그리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로 누군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규민을 자주 본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쭈글쭈글해져서 할 말만 딱 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시 높아지는 데시벨에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먼저 일어서서 밖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잠시 후.
LK 아이템 거래소 nexus. 지금은 운행하지 않지만, 아직도 서울의 상징 중 하나인 서울역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시현은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 대단하긴 하네….”
“하하. 아무래도 아시아 쪽 광산이 우리나라에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좀 커졌죠.”
옆에서 규민이 제 머리를 슥슥 쓸어내리며 활달하게 말을 붙여 왔지만, 시현은 건물뿐 아니라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는 주변을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한 여자가 빠르게 발을 놀려 시현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민하게 기척을 알아챈 시현이 눈을 좁히며 바라보는데 순간 옆에서 규민의 큰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주연아!!”
아으…. 귀 아파.
시현은 누가 봐도 규민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인물에 긴장을 풀고 징징 아려 오는 귓가를 작게 문질렀다.
“스승님. 귀가 아프세요?”
“으!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태운아.”
그때 또 반대쪽에 바짝 붙어 있던 태운이 귀를 문지르는 제가 걱정됐는지 가깝게 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물론 제게는 그것도 딱히 편안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현은 양손으로 귓가를 벅벅 문지르다가 환영하며 다가서는 규민을 휙 피해 제 앞에 선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nexus의 관리자. 이주연이라고 합니다. 정시현 님 맞으시죠. 그때 구해 주신 거 잊지 않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아! 그때 그!”
“예 맞아요. 그때 오빠 구해 달라고 했던 사람.”
시현은 너무 놀라서 예의 없이 뻗었던 손가락을 급히 갈무리했다. 그러자 주연은 작게 미소 짓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다시 한번 인사를 해 왔다.
시현은 조금 얼떨떨하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잔뜩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규민을 봤다가 입을 열었다.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습니다. 고개 드세요. 제가 다 민망하네요.”
그러자 주연이 고개를 다시 한번 작게 끄덕이며 인사를 하더니 고개를 돌려 규민을 흘끗댔다.
“저희 오빠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라이프 워치가 필요하시다고요. 미리 준비해 놨으니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시현은 뒤돌아 발을 옮기는 주연의 뒤를 따라 내부로 향했다. 일은 무척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세상은 대체로 자신에게 무척 비정했기에, 무엇 하나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제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그 뒤를 따라오는 작은 불안함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시현이 더 깊은 감상에 빠지기 전에 손안으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태운아.”
태운이 멍하니 걷고 있던 시현의 손을 잡고 예쁘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빼앗았다.
‘그래, 나한텐 이 애가, 태운이가 있으니까.’
얼굴 위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가족처럼 아끼게 된 아이였다. 시현은 태운이를 마주 보고 웃으며 조금 들뜬 기분으로 눈앞으로 다가온 커다란 문을 통과했다.
거래소의 내부는 들어서자마자 입구부터 번쩍거릴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그것은 천마의 스승으로서 나름 호화스럽게 사치를 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조차도 조금 빛이 바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역시 현대적인 돈지랄은 이길 수가 없어.’
시현은 사방에서 번쩍이는 조명과 몇몇 오색으로 빛나는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주연이 인도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물의 화려함에 은근히 기가 눌렸던지 조금 긴장했던 시현은 어떠한 제재나 절차 없이 바로 손 위에 올려진 작은 카드 모양을 보며 허무하게 웃음을 흘렸다.
“근데 하나 궁금한데. 이게 대체 왜 워치입니까?”
“앗…. 그건 저도 몰라요. 사실 감정해서 나온 이름은 그게 아니지만, 그냥 처음에 발견한 사람이 워치라고 부르고 싶었나 봐요. 그게 진짜 이름처럼 붙어 버렸어요.”
그렇게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점점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러자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는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시현 일행은 순식간에 끝난 일정에 어정쩡하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하. 너무 간단했죠? 그래도 직접 수령이 원칙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네요. 음…. 아니면 혹시 오신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가실래요?”
그때 시현의 주의를 확 빼앗는 제안이 규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전히 성안도 써 보고 숨겨진 게 없나 이리저리 카드를 뜯어보던 시현은 고개를 휙 들어 올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오면서 눈에 들어온 검 하나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아…. 돈 좀 생겼다고 벌써 쓸 생각이냐, 정시현.’
시현은 아까 이미 제 계좌로 3억을 이체했다던 규민의 말을 떠올리며 욕심과 현실 감각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고 결국 현실 감각의 승리였다.
사실 신검의 반열에 들 정도로 대단한 검이 아니고서야 제게는 어느 정도 비슷했기 때문에 그런 것보단 태운이를 잘 먹이고 이제 이곳에서 살 기반을 챙겨 주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럼 다들 절 따라오세요! 아 참, 유리막 말고 각 모서리에 보랏빛 감도는 돌이 박혀 있는 막은 손대시면 안 돼요. 조금 중요하거나 위험한 것들이라 바로 시큐가 달려오거든요.”
시현은 규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태운의 손을 덥석 잡고 머릿속으로 쇼핑리스트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태운이 옷, 그리고 쓸 만한 보호구랑….
멈칫.
그때, 거침없이 걷는 규민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은 갑자기 제게로 쏘아지듯 느껴지는 싸한 기운에 저 멀리 보이는 구역을 지긋이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태운아, 너도 느꼈어?}
{… 예.}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시현의 시선이 박힌 곳은 앞에 보이는 화려하고 밝은 장소 뒤쪽, 나무로 된 진열장이 가지런히 채워진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