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한 시간 전.
일행은 곧 도시 입장을 앞두고 입구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주변은 정말 제가 소설을 읽으며 떠올렸던 중세였으나 마법적인 것들이 작용하는 듯한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성벽은 단순히 돌을 쌓아서 만든 것 같았지만 끝에는 마력으로 구동되는 듯한 포가 달려 있었고 외벽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어이 거기! 줄에서 나갔으면 다시 맨 뒤로 가!”
“웃기지 마, 내가 언제 나갔다고!”
“이 새끼가….”
물론 사소한 다툼들도 함께였지만 말이다.
시현은 그렇게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가 게이트의 최소한의 양심인지 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패를 보이며 쉽게 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도시가 있으니 주민들이야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생각보다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치는 주변에 조금 놀라야만 했다.
“아니…. 너무, 활기차고 밝잖아…?”
“그럴 만합니다. 인스턴트 게이트에서 몬스터만 처리하다가 이 안에 처음 들어온 헌터들은 늘 놀라요. 저도 볼 때마다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많이 없네요.”
“으음…. 뭐 이곳에도 필수 교육 같은 게 있는 걸지도요. 저희도 낮에는 다 학교에 가 있으니까.”
규민과 시현이 작게 말을 나누며 조금 더 도시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시스템이 일행의 복장 또한 제대로 바꿔 주긴 한 건지 이곳에 지나다니는 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자꾸 쳐다보는 거지?’
그러나 자꾸 흘끔대며 모이는 시선에 시현은 조금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거리에서 마주치는 인물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처음엔 일반인들처럼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딱 봐도 힘깨나 쓸 것같이 생긴 우락부락한 이들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페리오딘 용병 길드 사무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현 일행은 조금 낡았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는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문 앞에 달린 명패는 비록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지만 겉모습부터 나 용병 사무소다, 하는 형태를 보이며 제대로 된 도착을 알려 왔다.
‘제발 문제없이 지나갔으면.’
시현은 작게 흔들리는 명패를 보고 이번에는 제 거지 같은 운 수치가 반영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며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끼익-
기름칠조차 제대로 해 놓지 않은 건지 나무 문을 밀자 녹슨 금속성이 작게 들려왔다.
동시에 왁자지껄 시끄럽던 내부가 잠시간 침묵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고 실내는 금세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럼에도 시현은 그게 분위가 풀어진 게 아니란 걸 단번에 파악했다.
저들 딴에는 조심스럽게 살피려는 듯했지만 제가 마음먹고 펼친 기감 안에서는 작게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커다란 행동처럼 감지되었기에 그들의 노력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시현은 필요한 게 있었고 문제 일으킬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과하게 경계하는 듯한 행동들을 모른 척하며 접수처라고 쓰여 있는 곳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다른 도시에서 왔나 보군?”
그때 태운이보다 더 거대한 몸집의 우락부락한 남자가 누가 봐도 시비를 걸 듯한 모양새로 술 냄새를 풍기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순간 주변의 소음이 조금 더 커졌다.
-쯧, 플로이드 녀석 또 시작이군.
-저 외지인들 왜 하필 여자를 끼워 왔는지 시끄러워지겠구먼.
-어때. 나랑 내기나 한판 할 텐가? 외지인들과 플로이드.
-당연히 플로이드 아닌가. 저놈이 망나니래도 실력은 확실하지.
주변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현의 귓가로 정확하게 박혀 들었다.
그런데 여자…? 무슨 소리지?
“아가씨. 보니까 마법사 같은데 이런 비리비리한 놈들 버리고 우리 파티로 오는 거 어때? 응?”
하아아아….
그제야 시현은 손으로 제 얼굴을 텁 덮으면서 사방에 다 들리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경이 판타지 같다고 이딴 클리셰까지 그대로 이뤄질 필요가 있나?’
그러나 곧 남자의 더러운 눈길이 제 뒤에 있는 태운에게로 향하고 훑어 대는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자 순간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이 좆같은 새끼가 어딜 감히.’
상황에 과몰입하지 말자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자꾸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현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남자를 쫓아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푸부부북.
아니, 열려고 했으나 암기 같은 것이 물렁물렁한 것을 파고드는 소리에 멍하니 멈춰 서야 했다.
제 앞에서 온갖 여유를 부리던 남자의 어깨와 팔 부위가 벌집이라도 된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변은 뭐가 어떻게된건지 알아차리지 못한 분위기였다.
푸확-
그때 그의 신체가 뒤늦게 눈치를 챈 듯 잠시간의 시차를 두고 묽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으, 어. 크아악!!!”
그리고 남자가 걸레짝이 된 팔을 부여잡고 엎어져 비명을 지르더니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로 자지러졌다.
시현은 이미 살을 뚫고 지나가서야 공격을 깨달았다는 것에 잠시 서늘함을 느꼈지만, 곧 태운의 소행이란 걸 깨닫자 소란스럽게 뛰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때 내 소행이 맞는다는 양 태운이 한 발짝 걸어 나와 다시 한번 내부에 있는 온갖 뾰족한 것들을 내기로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옆에 무림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상승의 경지에 뒤로 넘어갈 정도였지만 태운의 표정은 무심하게 평온했다.
“죽어.”
슈아아아악-
“으악! 안 돼! 태운아!!!”
멈칫.
수십 개의 뾰족한 것들이 피범벅을 한 남자에게서 한 치를 남기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곧 힘을 잃은 듯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잠시간 그 넓은 공간이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철컥.
그리고 내부를 채우고 있던 장정들이 무기를 손에 꼬나 쥐며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좆 됐다.’
“연태운. 규민 씨랑 정훈 씨 들어.”
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입을 떡 벌린 채 얼어 있는 유준을 단번에 둘러메고 몸을 돌렸다.
“튀어!”
“어어!! 야 저 새끼들 잡아!!!”
씨발. 진짜 나가면 무조건 운 올리는 아이템부터 산다. 그런데 운 올려 주는 게 있긴 할까?
시현은 괜히 눈가가 화끈해져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현재.
일행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시현 앞에 벌서듯 서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중 가장 심각한 상태는 연태운이었고 무엇보다 시현이 성까지 붙여 부른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사실 시현도 연태운이 손속에 여유를 둔 건 알았다. 솔직히 죽이려고 했으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이 아니라 기를 두른 손날로 대충 내리치기만 했어도 머리가 굴러떨어졌을 테니까.
시현은 잔뜩 움츠러든 태운을 보다가 다시 한번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고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니야. 나도 화났었으니까. 그래도 다음엔 말부터 하고 움직여 줬으면 좋겠다.”
“화나셨었어요? 저 때문에요? 제가 걱정돼서요? 저 너무 무서웠어요.”
그제야 태운은 커다란 몸을 구겨서 시현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는 이마를 어깨에 기대고 부빗거렸다. 그러자 조금 엄하게 말을 꺼냈던 시현의 목소리가 점점 흐물흐물하게 풀려 갔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세 사람은 절대, 절대 연태운 앞에서 거슬릴 만한 짓을 하지 않기로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무슨 귀족 나리라도 나타나서 깽판 놓는 건 아니겠지.’
시현은 벌써 착잡해지는 상황에 실없는 말을 중얼대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나침반으로 방향이야 잡았다지만 가는 길에 넓은 계곡이나 건너기 힘든 지형이 있을 수도 있었고 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와 태운이 둘이서면 몰라도 모든 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려면 당연히 지도가 필요했다.
‘왜 하필 용병 길드에서만 파는 건데 그걸…. 하아.’
그러나 그 루트는 이제 박살이 났고 다른 계획이 필요했다. 자세한 지도가 아니어도 좋았다.
지형만 기재가 되어 있는 거라면 분명 용병 길드가 아니더라도 방법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도 안 되면…. 어떻게든 그냥 돌파하는 수밖에.
“그, 일단 어디 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벌서듯 꼿꼿하게 서 있던 규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시현은 퍼뜩 고개를 들어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각자 후드 있는 분들은 씁시다.”
“어, 왜요?”
“…일단 쓰시죠. 그리고 태운이는 특히.”
태운이를 뺀 나머지 세 명이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걸치고 있던 로브를 태운에게 넘긴 시현과 원래 없던 규민 빼고는 모두 주섬주섬 후드를 끌어 올려 쓰기 시작했다.
처음 말했던 대로 이곳에 있는 것들에게 외부인이란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만 했다.
시현은 대로변이 아닌, 적당히 외진 곳에 숨어 있는 주점을 찾았다.
그리고 마치 원래 이 지역 사람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안쪽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주인은 일행을 붙잡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푸근하게 웃으며 환영했다.
‘후우, 다행이다.’
사실 시현도 또 아까와 같은 일이 생길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장소를 잘 찾은 건지 무인들보단 노인들과 일반인들이 들어차 있는 내부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뭘 드릴까요?”
그때 점소이로 보이는 부스스한 머리의 소년이 다가와 활달하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어린애였다.
시현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뭘 시킬…. 아 맞다.’
그리고 그 미소는 알아보기 힘든 메뉴판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간 아까도 글씨들은 읽기가 힘들었던 게 떠올랐다.
‘아씨, 다 나만 보고 있는데 쪽팔리게 굴 수도 없고….’
시현은 슬쩍 눈을 굴리다가 조금 당황했던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히며 메뉴판을 닫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잘나가는 음식으로 인원에 맞게 내어 주십시오.”
“예 모험가님! 우리 집에서 부어 스튜가 가장 인기가 많답니다! 그걸로 드릴게요! 저희 주방장님께서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유명하시니까 기대해도 좋으실 거예요! 총 다섯 분이시니까 10루벤입니다!”
‘부어? 루벤…?’
순간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까 주머니에는 용병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잠시간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