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미세하게 기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피가 낭자하게 튀었던 흔적으로 봐 흐르는 액체를 모아 어딘가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런 방식은 게이트에서 본 것 이후 두 번째였다.
시현은 잠시 그것을 쳐다보다가 골프채를 몇 번 내리쳐 바닥을 깨부쉈다. 비록 늦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스승님. 이것을….”
게다가 태운이 무언가를 찾은 건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건넸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손바닥만 한 카드는 일반 주민 등록증이었다.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큰 한숨을 거칠게 내뱉은 시현은 바닥을 빤히 노려봤다.
그제야 이 장소에 느낀 위화감에 대해 깨달았다. 이곳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음에도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오로지 칼질에 썰린 주검들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을 끌고 와서 마치 제물인 양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거지?’
그때 주연이 사정 설명을 하며 언급했던 ‘세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던 시현은 갑자기 그 안에 유일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낮은 선반을 깨부숴 삼매 진화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불씨가 다 옮겨붙자 불붙은 조각들이 하나둘씩 허공을 날라 시체들 사이사이로 꽂혀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전투를 대비해 내공을 허투루 낭비할 순 없었지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아니, 해 줘야만 했다.
아무리 자신이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지만 이런 현장을 그대로 두고 간다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못 해 먹을 짓이었으니까.
“이 새끼들 진짜 돌아도 한참 돌았네.”
시현은 이제 뜨겁게 끓어오르다 못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얼굴 위에 표정이 점점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놈들이 생각보다 더 미친놈들이라는 것에 이제는 뭘 알아보고 할 가치조차 점점 사라져 갔다.
그 순간 시현이 들고 있던 골프채 위로 검붉을 기운이 확 타오르더니 이내 잔잔한 흐름을 유지한 채 단단히 모양을 잡아 갔다.
이제 들고 있는 게 뭐가 되었든 자신이 주입하는 내력만 버텨 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사악-
분명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허공이 종잇장 잘려 나가듯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만들어 낸 골프채는 한 자나 되는 강기를 걸치고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은 느릿하면서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쿠구궁.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네 개의 벽이 마치 블록 무너지듯 와르르 박살이 나 굴러떨어졌다.
원래였으면 감옥들도 하나씩 확인을 해 봐야 했겠지만 대충 결론이 났다. 이 ‘층’에는 이규민이 없었다.
시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자.”
“예.”
시현은 사방이 다 부서져 내리며 드러난 계단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
“하아.”
시현은 정말 한숨 내뱉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지만 결국 앞으로도 이건 고치긴 좀 힘들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짜 어디서 이렇게 계속 튀어나오는 거야?”
절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맞닥뜨린 무리는 거의 열 명에 달했는데 그들이 자리한 공간은 넓지 않아 조금 벅찰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죄다 부숴 엎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내며 어깨에 멘 가방에서 새 골프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방금까지는 그래도 잠잠하던 분위기가 마치 스위치라도 켠 듯 날카롭게 벼려졌다.
저벅.
그때 무리 중 한 명이 잔뜩 경계하며 천천히 한 발 물러섰다.
점점 고조되어 가는 긴장감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시현은 곧바로 태운의 위치를 확인하며 무릎을 조금 굽히고 발끝에 체중을 실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차림새는 위에서 처리했던 이들과 비슷했지만, 그들이 가진 기세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자들은 또 그 이상한 사술들을 사용할지도 몰랐기에 단번에 처리해야만 했다.
콰앙!
그 순간 시현과 태운이 주변을 채우고 있던 호흡을 반 박자 빠르게 가르고 무리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이것은 전투의 기선을 잡기 위해 일부러 흐름을 깨는 방법이었다.
“잠깐! 태운아, 그냥 제압해!”
그러나 가차 없이 공격하려던 것도 잠시, 시현은 날카로운 기파에 찢어진 복면 사이를 보며 급히 소리쳤다.
촤악
“크하악!”
터져 나온 시현의 목소리와 동시에 그 위로 이미 한쪽 팔이 날아간 자의 괴로움에 찬 비명이 겹쳐졌다.
아무래도 제 지시가 늦은 것 같았다.
시현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을 여유롭게 회피하며 작게 혀를 차곤 살벌하게 키워 왔던 강기를 흩어 냈다.
후웅.
골프채는 다시 기존의 탄성과 강도를 유지한 채 몸을 굳게 만드는 혈점으로 정확히 박혀 들었다. 그러자 연신 비명과 퍽퍽대는 타격 소리가 연달아 내부를 채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제 뒤에 서 움직이고 있던 태운에게서도 비슷하게 터져 나왔다.
“끄악! 죽, 죽여!”
시현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제게 덤벼들고 있는 이의 목줄기를 턱 쥐어 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커다란 몸이 축 늘어졌다. 물론 죽은 건 아니었다. 시현은 내기를 섬세하게 조절하며 무방비가 된 이들의 혈점을 누르고 제압해 옆으로 내던졌다.
장내가 소강 상태가 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 있던 복면인이 태운의 손에 잡혀 내부가 진탕 되도록 타격당한 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태운은 그 후에도 시현의 판단에 별다른 의문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이라면 죽이는 거였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으면 됐다. 그러니 딱히 반발할 것도 없었다.
“이런 씨. 하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거친 말이 좁은 내부에 메아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시현은 잠시 얼기설기 뒤섞여 어지러운 내부를 정리한 뒤 나자빠진 인간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거침없이 잘라 냈다.
저번처럼 얼굴이 녹아내린다거나 하는 일이 생길까 망설이는 손짓도 아니었다. 시현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찰싹찰싹.
“김정현 씨, 일어나세요.”
두터운 손이 김정현의 뺨을 몇 번 치다가 끙끙 앓는 소리가 나자 멈추어 섰다.
그는 시현이 등 뒤에서 내지른 장을 맞고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치료 스킬로 자신을 살려 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제압당해 있는 이들이 그 사라졌다는 글로리 길드원이라는 뜻이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상황들이 천천히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으음.”
그때 김정현이 잠시 침음성을 흘리는 듯하더니 눈을 번적 뜨고 제압되어 있지 않은 한 부분, 머리를 냅다 찍어 공격하려 들었다.
턱.
그러나 김정현의 머리는 시현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듯 잡혀서 물러서지도 못하고 나아갈 수도 없이 단단히 고정됐다.
당연하게도 그의 움직임은 시현의 눈에 굼벵이처럼 느껴질 만큼 느렸다.
가뜩이나 무인도 아니고 힐러의 공격인데 빨라 봤자 얼마나 빠르겠나. 그러나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는 마치 뭐에라도 쫓기듯 강박적으로 몸을 뒤흔들어 대고 계속해서 공격하려 들었다.
“주, 죽어.”
“흐음….”
왜 이러는지 대충 예상은 갔지만 시현은 다시 한번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김정현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어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려 눈동자를 살폈다.
자아는 있어 보이는데.
시현은 확신은 할 수 없는 상황에 마지막으로 [성안]을 사용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김정현 [□□□(B)]
칭호 [나누어 주는 자]
체력-□□
근력-□□
민첩-□□
지력-□□
마력-□□
운-□□
상태 이상-□□(□□□)
“…세뇌, 혹은 최면인가.”
여전히 네모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그 아래의 글자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두 개를 주로 사용하던 이가 마교에도 있었고 시현도 그것에 꽤 많이 당했었기에 좋은 기억이라곤 단 한 톨도 없었다.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스승님. 필요하시면 제가 손을 좀 보겠습니다.”
그때 시현이 가지런하게 눕혀 놓은 이들을 발끝으로 툭툭 쳐 가며 은근히 엉망으로 만들고 있던 태운이 냉큼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그럴래?”
수단이 내공이든 마력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뇌와 최면 둘 다 뇌를 건드리는 것이었기에 그 부분은 특히나 세밀하게 조작해야 했고 그건 태운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태운의 손이 김정현의 머리 위로 닿았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 안으로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다.
“이거 고독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운이 뇌에 엉겨 붙어 있어요. 게다가 시전자가 손대지 않으면 뇌가 녹아내리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뭐?”
금세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고독이라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으면서 가장 소름을 느꼈던 수단이었다. 벌레를 먹이면 그것이 뇌 쪽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엔 그것을 필요할 때마다 발광시켜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개였다. 먹인 벌레의 모체가 되는 벌레를 잡아 죽이든가, 세밀하게 내기를 조절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고독을 태우든가.
물론 지금 길드원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게 고독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떻게 움직일지 단서가 잡혔다.
“일단 기절시켜 두고 움직여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마지못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제 목숨을 구해 준 자가 저렇게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으니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퍽.
그러나 시현이 조금 미안한 눈으로 망설이고 있자 하얗고 모난 데 없는 손이 단숨에 김정현의 뒷목을 퍽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그는 그대로 기절한 채 다른 이들과 같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 그 너무 센 거 아니냐.”
“별로요.”
“음….”
그래 뭐 한 번에 기절시키는 게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