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얼핏 들으면 그냥 늘 하던 거래가 미뤄졌다는, 길드의 운영자로서 하는 말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만약 이자가 빌런 연합과 관련이 있다면 그에 관련된 거래를 암시한 것일 수도 있었다.
‘헌터 협회와 신류하까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여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관된 단체들만 해도 라인업이 대단했다. 시현은 새삼 제가 파헤치려고 하는 게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 같아 조금 머리가 아파졌다. 그럼에도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벌써 하정과 규민까지 휘말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여기서 끝내자고 마음을 먹더라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을 거다. 시현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자신도 제 일을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최대한 찾아내서 주변까지 처리하려 했을 테니까.
“참, 제가 최근에 개인적인 일로 무언가를 알아보는데 말이에요. 궁금한 게 생기더라고요. 태운 씨는 개명을 하셨나 봐요?”
뒷조사했고 태운의 과거 행적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참 잘도 돌려서 말한다 싶었다.
시현은 빈정거리던 심정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굳으려고 하는 표정을 힘겹게 붙잡았다.
‘신류하의 실력은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원거리 딜러인 거로 알려져 있다. 내가 선제공격을 했을 때 승리 확률은….’
그리고 머릿속으로 저자가 더 깊이 이 주제를 파고들어 태운의 존재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을 걸 대비해 긴장감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똑똑.
그때 미묘한 분위기를 가르고 낭랑한 노크 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는 거야.’
시현은 속으로는 제 조용한 일상을 뭉개는 소리에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내뱉으며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꺼운 문 뒤로 느껴지는 낯익은 기척에 불평을 그만두고 슬쩍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들어와요.”
“형! 어?”
“엇, 어라. 제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요?”
규민과 유준이 문 앞에 서서 환하게 웃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시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신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걸 보고 목소리를 점점 낮췄다.
아무래도 진짜 잘못 잡은 것 같았다. 좋은 소식이 있어 서프라이즈 겸 연락 없이 찾아온 것이었는데 이대로 발을 돌려 돌아가고 싶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은 낌새의 연태운과 애써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딱 봐도 신류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시현까지. 규민은 결국 뒤통수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너무 반가워요.”
그러나 시현은 예상치 못한 이 방문에 무척 기분이 좋아지는 중이었다.
신류하만 만나면 정신 사나웠는데 오늘은 예상치 못한 기 싸움을 하느라 더 심력이 소모되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제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일에 내보이는 반갑지 않은 관심까지.
다른 건 몰라도 태운의 존재에 대한 불가사의함은 간단히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고 데리고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사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게도 제게는 태운이 필요했으니까.
시현은 순간적으로 가라앉아 어두워지는 눈빛을 빠르게 숨기고 규민과 유준을 객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근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절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현은 옆에서 들리는 ‘시현 씨 목소리가 이렇게 다정할 수도 있었구나.’ 하는 신류하의 말을 개무시하고 규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 사실… 길드 문제가 해결됐거든요!”
시현은 그 순간 저도 몰랐던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형! 그래서 저도 규민이 형 길드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형도 드, 들어올 거죠?”
그리고 유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사실을 신류하가 있는 앞에서 듣는다는 게 무척이나 통쾌하게 느껴졌다.
“저런, 저 고백도 전에 차인 건가요…?”
물론 뒤에서 들려오는 열받는 언사에 순간 눈썹이 꿈틀 움직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련한 주인공이라도 된 듯 상심한 척하는 놈을 태운이 몸으로 슥 가리자 요동치던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흠흠. 그 어쨌든 유준이도 빨리 케어가 들어가야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음, 신류하 님은 계속 여기에 있으실 건가요?”
그때 계속 말을 이어 가던 규민이 말꼬리를 흐리다가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외부인이 있는 곳에서 앞으로의 일을 쉽게 얘기하는 게 불편한 듯했다.
시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아서 느긋하게 딴청을 부리고 있는 신류하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길드장께서 당신이 좀 꺼졌으면 좋겠답니다. 가세요.”
빙긋 미소를 짓는 시현의 얼굴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수려했지만, 당장이라도 얼음 부스러기가 떨어질 것처럼 차가웠다.
절대 상대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이자 신류하는 그제야 조금은 씁쓸한 듯한 표정을 찰나간 지었다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시현은 그 이상한 변화에 순간 질색하며 의심하는 눈초리로 신류하를 뜯어보았지만, 평소처럼 돌아온 능글대는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진짜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
“이렇게 보니까… 뭔가 신의 광산에서랑 비슷해졌네요.”
예상외로 별 반박 없이 신류하가 떠나자 시현과 태운이 지내던 호텔의 객실은 아까랑은 다르게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네요. 그 일은 다 처리한 거예요?”
“아,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려고 했는데. 형님, 저 책임져 주십쇼!”
그러나 곧 이어진 규민의 외침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현의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지자 규민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길드요 길드! 그거, 생각하시는 그거 아니에요!”
규민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계속해서 변명을 내뱉었다. 그 변명은 시현이 아닌 태운에게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참나, 그런 거로 오해 안 했으니까 진정 좀 해 봐요.”
물론 시현은 갑자기 급발진하듯 안절부절못하는 규민을 보다가 왜 저러나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후우…. 그게 저 아버지랑 얘기했는데 이쪽 지사는 아버지 밑에 있던 다른 분께서 잠시 맡아 주시기로 하셨거든요.”
말하자면 대놓고 빌런 협회의 뒤를 쫓는 제 행보를 제대로 돕겠다는 말이었다.
시현은 예상치 못한 선언에 잠시 멈칫했다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쭈그러져 있는 유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규민의 선택은 본인이 내린 것이기에 시현이 왈가왈부할 만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유준이 걸렸다.
제 걱정 때문에 일부러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지만 결국 글로리 길드에 들어왔고 그 길드의 장인 규민까지 그들의 뒤를 쫓을 생각이었으니 이제는 계속 모르는 일로 둘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저와 규민 사이에서 가장 큰 관련성을 가지게 된 아이였다. 누구나 조금만 찾아봐도 무언가 관련이 있다고 느낄 테니 그들이 유준을 주목할 것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완전히 이쪽 울타리 안에 넣어 두는 게 좋겠지.’
시현은 천천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규민이 알고 있는 정도로 각색하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어린 너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네. 들어 보고 선택해.”
이야기가 시작되자 유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동안 시현과 규민이 저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유준은 사실 조금 들떠 있었다. 올라간 능력과 주변에서 쏟아지는 관심, 그 모든 게 낯설었지만, 이제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 뿌듯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 와중에도 계속 배려받고 도움을 받고 있었던 거였다. 아직 옛날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능력치만 달라지면 뭘 한단 말인가.
“저… 너무 바보 같아요.”
“뭐? 아, 아니, 왜 갑자기?”
물론 시현은 유준의 생각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갑자기 튀어나온 자괴감 어린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열심히 할 거예요.”
“어어, 그래라….”
갑작스러운 다짐이 이어지자 이 아이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쉬이 따라가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와! 그럼 이제 저희 한 가족이네요? 하하, 제가 옛날부터 진작 이럴 줄 알았죠.”
“가족이요?”
“예! 한솥밥 먹는다고들 하잖아요. 뭐 아직 형님은 계약서를 쓰진 않았지만 이제 가족이죠. 뭐.”
그때 규민이 활짝 웃으며 끼어들어 왔다.
“가족은 무슨….”
시현은 너무나 낯선 단어에 조금 회의적인 말투로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 좋아하신다.’
‘앗, 형 웃었다.’
그러나 말과 표정은 조금 달랐는지 규민과 유준은 서로 시선을 나누며 동그란 눈을 반쯤 접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태운은 그런 시현을 빤히 보다가 하얗고 고운 손을 꽉 쥐어 잡고 엉망진창 엉켜 버린 감정을 삼켰다. 눈앞이 홧홧하고 속이 뒤틀렸다.
나만으론 안 되는 건가.
그래, 이건 서운함이었다.
그가 사실은 정에 목말라하는 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그 빌어먹을 정을 쏟고 있는 게 자신이란 것도.
제 감정보다 한참이나 미지근한 그것들에 때때로 숨이 막혀 왔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저만 느낄 수 있는 유일함이었기에 만족하며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뒤늦게 찾아오고 나서야 안 거다. 제가 유일하지 않다는 걸. 그의 곁에는 자신 말고도 정을 나눌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하아, 시발.’
천천히 하자고 저 자신을 다잡아도 가끔 좆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태운은 제 욕심을 마음껏 내비칠 수 없었다. 그만큼 시현의 돌아섬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감정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제게 내비친 게 아님에도 식은땀이 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신이 그냥 혼자였으면 좋겠어.’
태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제 꼬인 속을 달래야만 했다.
“태운아. 혼자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러고 있어?”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제 머릿속을 파고들어 왔다.
자신은 결국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태운은 다 타 버리고 남은 인내심 쪼가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여느 때와 같이 빙긋 미소를 지어 보고 시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