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시위 현장이었다. 물론 그들 말고도 또 다른 시위자들, 잔뜩 꾸민 채 사진을 찍어 주는 이들, 적선을 받으려 구걸하는 이들까지 뒤섞여 길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저들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아주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하정도 들었는지 반쯤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여기도 있네.”
“저 사람들이 누군데?”
“아… 게이트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 희생자의 가족들이야. 협회 앞에서도 주기적으로 집회가 일어나거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참 곤란해.”
시현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저들이 희생자들의 가족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저 사람 능력을 쓰는군.’
무리의 가장 중앙에서 확성기를 든 채 열심히 호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아주 미묘해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성안을 써서 보자 능력자인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유난히 귓가에 틀어박힌 게 그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계속해서 나아가자 그것도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시현은 곧바로 신경을 돌려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호텔에 시선을 고정했다.
원래도 라스베이거스는 화려한 향락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게이트 물건들과 온갖 마법들이 어우러지자 이제는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의 눈부심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 호텔은 세상의 모든 화려함을 다 모아다가 집약해 놓은 것만 같은 휘황찬란함과 고고함을 보이고 있었다. 예전에 넥서스에 갔을 때도 감탄했었지만 그곳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와… 미쳤다….”
“눈부셔요… 아까도 대박이었지만 여긴 정말 다른 세상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유준과 규민도 창가에 바짝 달라붙어 주변을 구경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시현은 거대한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컬러풀한 위용을 흘낏 보다가 차체가 슬슬 멈추어 서려고 하자 하정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 순간 뒷좌석을 감싸고 있던 소리 차단 마법이 사라졌다.
“손님들 도착했습니다!”
타이밍 맞게 운전기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도착을 알려 왔다. 목적지가 목적지인 만큼 팁을 기대하는 것일 테다. 하정은 그에 부응하듯 두둑하게 팁을 얹어서 택시비를 지불했다. 시현은 그 모습을 눈에 담고서 천천히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하정 헌터?”
“맞아요.”
“아, 반갑습니다! 섀넌이라고 해요.”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형적인 백인의 모습을 한 푸른 눈의 남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현은 하정의 뒤에 서서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을 수없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정을 바로 알아본 걸 보면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걸 테다. 그럴 만한 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다.
“량께서 조금 늦을 테니 미리 자리를 안내하라고 말씀을 남기셨어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괜찮습니다!”
“따라오시죠.”
시현은 제 예상과 다르지 않은 상황에 덤덤한 얼굴을 하고 하정과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오가는 수백의 사람과 신경을 콕콕 찌르는 온갖 기척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인도자의 뒤를 따라 얼마간 걷자, 카드를 찍고 들어가야 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운이 삭 가라앉았다. 순간 시현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금세 사라졌다.
‘이건, 스킬인가….’
보호와 급을 나누기 위한 의미인 것 같았지만 그 스킬이 작용하는 거대한 범위에 조금 놀란 시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와중에도 주변을 긴밀하게 살폈다.
띵-
라운지 층입니다.
꽤 높은 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도착했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거슬리는 기척들이 사라지더니 목표 층에 완전히 도착하자 완전히 평온해진 장소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경우는 있는 사람인가.’
이곳에 올라올 정도라면 그래도 만만찮은 사람일 테니 어설프게 심어 둔 감시자나 스킬들은 쉽게 들킬 게 분명했다. 이것도 그렇기에 취한 조치였겠지만 그래도 아주 거만한 놈은 아닌 것 같아 시현의 안에서 이미지가 조금 격상했다.
“이쪽 라운지에 편히 계십시오.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앞으로 펼쳐진 광경에 그 감정은 더욱 진해졌다. 내부는 평범한 건물의 이 층 정도 되는 층고를 합쳐 놓은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얼마나 높은 건지 주변을 가로지르는 건물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아 탁 트인 하늘이 드넓게 펼쳐졌다.
“우, 우아아….”
“대박이다… 나도 이런 데는 처음인데….”
일행은 하정이 섀넌과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씩 발을 옮겨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조금만 스크래치가 나도 수백 억은 물어 줘야만 할 것 같은 번쩍번쩍한 가구들과 기둥처럼 박혀 있는 의미 모를 현대예술품들이 이 웅장한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와 씨,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시현은 아이처럼 볼이 상기되어 주변을 훑고 있는 규민과 유준의 뒤를 따르며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목적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도주로와 물건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부가 워낙 화려해 자꾸만 시선이 빼앗겼다.
“스승님.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집이 좋아요?”
그때 시현의 귓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태운의 질문이 들어왔다. 시현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어… 아니.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태운은 앞에 있는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시현을 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현은 이 장소가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곳의 주인이 아까 말한 그 량 어쩌고인 것 같았는데 그자를 처리하면 되는 건가.’
태운은 이곳을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며 생각에 빠졌다. 최근에 제게 주는 관심이 줄어든 것 같아 굉장히 불안한 한편 불만도 쌓여 갔다.
그러니 이런 거라도 안겨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도 툭하면 제게 뭘 주고 싶어 했으니 분명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았다.
“자! 다들 주목.”
그때 대화를 다 마친 건지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하정의 목소리가 쨍하고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이리저리 퍼져 있던 일행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하정이 하는 얘기에 집중했다.
“곧 도착한다니까 다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좀 앉아 있어야 한다.”
“…그게 끝이냐?”
“그럼?”
무슨 의미심장한 얘기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고작 튀어나온 말이 정신 사납게 굴지 말라는 내용이니 허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시현은 조금 시무룩해진 규민과 유준을 흘끗 바라봤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둘 다 지금만 그러는 거지 다른 사람이 오면 나름 분위기 맞출 줄 아는 애들이니까 좀 놔둬.”
“아, 뭐 지금 구경하는 걸로 뭐라고 한 건 아니었어.”
하정은 은근히 둘을 두둔하는 듯한 시현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현은 뭔가 찝찝해지는 맘에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
“형….”
특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저를 바라보는 둘의 반짝이는 눈에 더욱 입이 껄끄러워졌다.
덥석.
“스승님.”
그때 텅 비어 있던 손안으로 매끈한 질감의 손이 가득 들어찼다. 시현은 작게 움찔댔다가 빠릿하게 태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엉?”
“….”
태운은 처음 저를 부르고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눈에서 느껴지는 불만 가득한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현은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얘가 왜 이래 또.
시현은 앞뒤 없이 변하는 태운의 감정이 익숙하지 않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한 톨도 없었지만 말이다.
띵-
-라운지 층입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알림음이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안에서 그 남자가 나올 거라는 건 알았지만 시현에게는 이유도 알 수 없이 추궁당하는 것 같은 이 분위기가 더 힘들었다.
지잉 하는 낮은 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올리고 편안한 캐주얼 복장을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는 덩치가 무척이나 커다랬다. 태운이도 한 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량차오샤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됐군요, 하정.”
“오랜만이에요. 량차오샤 님.”
“하하. 편하게 량이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량차오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해 왔다. 저 정도 위치에 있는 자라면 일반 헌터들을 얕잡아 보며 거만하게 굴 수 있었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한 치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음… 노력해 볼게요.”
“부탁해요. 참, 그리고, 혹시 제가 당신의 친구들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이쪽은 제 친구와 친구 동생들이에요.”
“정시현입니다.”
시현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하며 그 인사에 맞춰 손을 맞잡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량차오샤는 그를 이채 어린 눈으로 마주 바라보다가 싱긋 미소를 짓고 하정에게 말을 붙였다.
“친구분이 무척 잘생기셨군요.”
순간 시현은 등 뒤로 돋는 소름에 잡혀 있는 손을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급히 빼내고 꽉 주먹을 쥐었다. 이자에게서는 신류하와는 또 다른 느끼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 시현이 버티기 힘들어하는 인간 유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하정은 그런 느끼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원하게 받아쳤다.
“에이, 량이 훨씬 낫죠.”
그래, 시현은 차라리 저게 더 나았다. 그러나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이어진 허스키한 목소리에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태운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건 전혀 아닌 것 같은, 읍”
온 주변이 지뢰투성이였다.
“제가 워낙 동생들과 우애가 두터워서… 마저 말씀 나누세요.”
시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동생들이 워낙 극성이라는 말을 돌려 전하고 태운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려 등짝을 꽉 꼬집었다. 그러자 태운의 눈썹 끝이 움찔 떨렸다.
“하하. 아닙니다. 무척 보기 좋은 동생과 형 사이군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태운은 티 나지 않게 이를 꽉 깨물었다.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치 약점이라도 파헤쳐지는 기분이었다.
{연, 아니, 태운아. 그만.}
그때 머릿속으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저를 꾸짖는 듯한 말들이 계속 이어졌다.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저자가 딱 봐도 스승님께 흑심을 가지고 있지 않냐 다그치고 싶었다.
최근 들어 제 스승이 뭔가 모르게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아 태운은 초조하게 손톱을 짓뜯었다. 작게 피가 맺혔지만, 태운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런, 손님께 음료도 한잔 내드리지 않고 있었군요. 섀넌, 부탁해.”
“예, 량 님.”
그러나 저를 빼고 이어지는 대화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저자의 혀 놀림이 어찌나 기름 바른 듯 유려한지 경계하던 시현마저도 조금씩 끼어들더니 이제는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생오라비 같은 저 면상도 갈아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 가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태운은 힘겹게 노력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