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80화 (80/146)

#80

“태운아!”

시현은 급히 태운의 손을 잡았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진원지도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여태 이렇게 거대한 불길함은 처음이었다. 수없이 전투를 이어 갔던 무림에서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 순간 그 불길함이 형체를 띠고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CG 같았다. 홀로그램 같은 것이 지금 방의 형태에 겹치더니 점점 진해졌고, 순식간에 약을 만들어 내던 그 감옥 같던 방의 풍경이 바뀌었다.

씨발.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나.

완전히 똑같진 않았지만, 이 CG가 뒤덮이던 것 같은 변화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주 고요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 같군요.”

그때 시현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는 듯 태운의 입에서 정답이 흘러나왔다.

[게…. 그 ㅔ이트 가 화ㄹ 성…. 화 됩니다.]

그리고 태운은 제 머릿속에서 띄엄띄엄 울리는 소리에 작게 혀를 찼다. 이 음성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게이트이리란 뜻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스승님은 제 옆에 있었고 이따위 것 헤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도 않았으니까.

“제기랄… 일단 나가자. 하정이를 찾아야 해.”

태운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원래 들어왔던 문이 사라진 방 안을 바쁘게 살펴보면서도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시현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신의 기사인가요?”

“어, 뭐?”

그러나 곧이어 이어진 작은 소리에 얼굴 위에 내려앉은 미소는 싹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짜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또 방해꾼이었다.

“천사님이랑 같이 강림하신 거예요?”

“아, 아니… 천사?”

“이분이요.”

그때 작은 손이 태운에게로 기울어졌다. 시현은 그 손짓을 따라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가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저 애도 이 상황은 생각지 못했는지 눈이 조금 커진 채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린, 그런 거 아니야….”

“으음… 그렇군요. 그래도 저를 구하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현은 당장 하정과 합류하러 가려던 것도 잊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특이한 애네.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 멍한 표정은 감각이 봉인되고 저주받아서 그런 줄 알았더니 그냥 원래 이 아이의 표정인 것 같았다.

“내가 천사 같아? 스승님은 기사?”

“네, 아까 아저씨가 무기를 들고 천사님께 축복 같은 걸 받으시길래.”

그때 타인에게는 잘 말도 걸지 않던 태운이 작은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시현은 흔치 않은 상황에 쇠사슬을 자르다 말고 멍청히 그걸 바라봤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멈칫했다.

“축복?”

“뽀,”

“자, 그만 떠들고 움직이자.”

저 대화를 빨리 잘라야 했다. 시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끼어들었다.

“왜요?”

“왜냐니! 지금 이거 게이트잖아.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든 처리하든 해야지!”

그러나 태운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쉬이 협조하지 않고 있었다. 시현은 조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아, 맞다. 제가 봤어요. 그 새끼들이 이곳에 두고 다니던 짐을 싹 챙겨서 도망쳤어요.”

“그 새, 뭐?”

그러나 처음 만난 아이의 거친 말에 시현은 잔소리하려던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 몇 살이니…?”

“저 13살이에요.”

말문이 막혔다. 시현은 지금 제가 꼰대인 건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 통역 마크가 이상해진 건가?

“그 개새끼들이 저를 납치해 와서 약을 만들게 했어요.”

음, 아니었구나.

시현은 조금 허탈하게 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외국이었고 금방 헤어질 아이였으니 그냥 눈감고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일단 그건 밖에 협회에다가 말하고 우린 빠져나가는 게 먼저 같다. 잘 붙어서 와.”

“알겠어요….”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미첼은 고분고분 다가왔다. 시현은 조금 만족스러워 보이는 태운의 얼굴을 흘깃 봤다가 천천히 발을 옮겨 창문으로 보이는 것으로 다가갔다.

결국 문은 없었다.

분명 들어올 땐 쇠로 만들어진 문이 왼쪽 벽에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창문이 저 안쪽 선반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시현은 그것을 꺼림칙하게 바라보다가 다가가 선반을 치우고 열어젖혔다.

“미치겠네.”

빠져나오자마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슬럼화가 된 도시 일부와 골목길이 보였다. 자신이 빠져나온 곳은 집으로 보이는 1층 건물이었고 골목은 천장까지 판자들로 막혀 있어 답답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시현은 문 근처에 멈칫하고 서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엔 폭발 게이트 같은 것이 나타나 주변이 침식이 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침식 지역은 게이트의 영향을 받을 뿐 이렇게 단번에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건… 그냥 게이트에 들어온 것 같잖아.’

“사, 살려 줘!”

“이게 대체 뭐냐고! 우릴 좀 누가 꺼내 줘!”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 뒤엉켜 아우성치는 소리였다.

시현은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급히 아이를 둘러메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선 게이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하정이 필요했다.

“야, 정시현!!”

다행히 하정은 배경만 바뀌었을 뿐 헤어졌을 때와 별 달라진 바 없는 비슷한 거리, 비슷한 방향에 서 있었다.

“야,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아무래도 좆 된 것 같다.”

늘 장난기가 배어 있던 하정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시현은 이미 덜덜 떨고 있는 사마윤에게 잠시 시선을 줬다가 미간을 지긋이 문질렀다.

역시 침식 지형이 아니군.

침식 지형이었으면 이렇게 좆 됐다며 절망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일단 그 지형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게이트를 처리하는 건 이 나라에서 할 일이었지 시현이나 하정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 그리고 입구도 알 수 없다는 건 큰 문제였다.

“게이트냐?”

“어… 그리고, A급도 아니야 이거. 느낌이 달라.”

순간 헌터 자격증을 딴다고 교육받았던 내용이 떠올랐다.

‘원래 A급 게이트는 없었습니다만 나중에 나타났죠. 그렇다는 것은 그 이상의 급도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왜 하필 지금, 여기냐고. 하아….

저 멀리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패닉에 빠진 자잘한 목소리들이 시현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웠다. 이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게 만만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 아무래도 이 게이트의 범위가 이 도시 전체인 것 같습니다… 전역에 깔아 둔 제 귀와 눈이 게이트가 생기며 모두 터졌습니다. 딱 라스베이거스 안쪽에 있는 것들만요.”

그리고 그 예감을 뒷받침하듯 또 다른 안 좋은 소식이 이어졌다.

영향 범위가 라스베이거스 전체라면, 위험할까 봐 숙소에 두고 온 유준과 규민도 휘말렸을 거란 얘기가 아닌가. 시현은 순간 주먹을 꾹 쥐고는 머리를 팽팽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선택지는 두 개였다. 빨리 이 게이트를 해결해서 없애든가, 우선 규민과 유준을 찾아내고 나서 게이트를 처리하든가.

‘다행히 인스턴트 게이트라 퀘스트 같은 건 없어 보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게이트를 해결하는 걸로….’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제물을 바치세요!- 이 공간을 만족시키려면 생명력이 필요합니다. 근처의 인간들을 죽이고 생명력을 채우세요(0/100000).]

“이게 무슨 개 같은 말….”

시현은 마치 놀리듯 뒤늦게 튀어나온 창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비속어를 내뱉을 뻔한 입을 쥐어 잡았다.

[제물을 바치세요!- 이 공간을 만족시키려면 생명력이 필요합니다. 근처의 인간들을 죽이고 생명력을 채우세요(103/100000).]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새 바뀐 수치에 시현은 결국 거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뭘 믿고 이것들이 하라는 대로 따른단 말인가. 시현은 그 누구보다 이 퀘스트라는 것의 감언이설에 휘둘린 사람이었기에 더욱 이걸 믿을 수 없었다.

만족시키면? 만족한다고 남은 사람들을 살려 준다는 말이 있나. 아니면 게이트를 없애 준다는 말이 있나. 이것들은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사람을 이용해 먹으려 굴었다.

퀘스트는 대부분 잘 따라야 했지만, 편법을 사용해서 갈 방법도 있었다. 시현은 재수 없는 파란 창을 꺼 버리고 입을 열었다.

“우린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

“예? 그러면 어떻게 클리어하시려고….”

그러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사마윤이 반박을 해 왔다. 물론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냉큼 고개를 숙였지만 말이다.

“퀘스트는 갈 방법이 대부분 있어.”

몇 번이나 겪고서 알아낸 방법이었다. 퀘스트가 죽이라고 하는 인물을 회유해 그가 미래에 할 법한 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퀘스트의 큰 흐름을 이어 가는 것 말이다. 물론 이곳에서까지 그런 편법이 통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볼 수 있는 건 해 봐야 했다.

“끄응…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내 일행부터 찾아야 해.”

“아, 유준이랑 규민이. 하, 씨, 그러네. 거기도 난리 났겠어.”

잠시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정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국으로 함께 온 무리 중에 저와 태운을 빼면 하정이 가장 강했다. 그러나 그 세 명이 다 이곳에 있었기에 유준과 규민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제발 규민이 활약해서 잘 숨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오면서 체크해 봤는데 네가 있는 곳은 게이트화가 되어서도 좌 표적으로는 변하지 않았었어. 거리도 방향도 대충 비슷했단 이야기야. 그러니까 우리가 숙소 방향으로 움직이면 될 거야.”

시현은 노후된 건물과 판자, 깜빡이는 전구들과 박살 나기 직전인 간판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좁은 골목길을 훑어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미로처럼 되어 있긴 했지만, 그 길을 다 찾아서 갈 필요는 없었다. 일직선으로 벽을 뚫고 지나가면 최대한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거다. 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이렇게 가야지 저 일반인들 무리와 부딪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이 한 치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간다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보통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구해 주려고 하는 사람도 붙잡고 물에 밀어 처넣으니까.’

스각.

그때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벽에 크게 구멍이 뚫렸다. 시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태운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어, 고마워.”

“별말씀을. 뭐 그렇게 고마우시면 입,”

“나, 나중에. 그러니까 좀….”

고마움이 싹 날아갔다. 시현은 이를 악물고는 저 얄미운 태운의 하얀 얼굴을 흘겨봤다가 주변의 눈치를 한번 보고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 앞까지 줄줄이 구멍이 뚫려 있는 벽들을 보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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