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저벅, 저벅.
“근데 이 애는 누구야?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봤네?”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 도중 하정이 제 허리쯤 오는 키를 한 아이를 보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시현은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멈칫하곤 제가 봤던 그대로 상황을 늘어놨다.
“아, 그 안에서 약 만들고 있더라. 사지 결박당하고 저주 걸린 채로.”
“뭐?? 이런 미친, 개새끼들 아니야? 빌런 연합 맞지? 이 빌어 먹을 쌍놈의 새끼들 진짜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네?”
그러나 시현의 말이 너무 적나라했던 건지 하정이 참지 못하고 곧바로 분노를 표출했다.
“야, 야야.”
본인도 말을 이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정은 정말 애가 있든 없든 변함없이 욕설을 줄줄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하정이 벌써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열을 쉬쉿 뿜자 시현은 급히 말을 잘라 냈다.
“아, 미안. 너무 빡쳐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어린애를. 너 괜찮니?”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중에 걔네들 보면 언니한테 말해. 내가 다 처리해 줄게.”
“하아. 이 미친아….”
“왜 인마.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냐?”
그래, 못 할 말은 아니지. 근데 처리해 주네 뭐네. 말 좀 봐 가면서….
“…됐다.”
“싱겁기는.”
시현은 진심으로 화난 얼굴을 한 채 씩씩대고 있는 하정에 손을 내젓고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스승님. 이 앞은 크게 비어 있습니다.”
그때 분위기를 바꾸듯 태운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시현은 바로 경계를 올리고서 얇은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스각-
검기가 벽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자 작게 쪼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뚫린 벽의 밖은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그러나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일행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미친, 이게 뭐야…?”
게이트화가 되자마자 바뀐 허름한 내부와 얼기설기 엮인 판자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슬럼화된 구역일 것이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무법지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슬아슬 높게 얹어져 있는 건물들은 하나하나 다른 건축 양식을 하고 있었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겉으로는 온갖 하수관과 전기선, 계단들이 둘려 있었고 삭은 철근들과 나무줄기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어 더욱 어지러워 보였다.
게다가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는 마석 전구들까지.
“게이트를 많이 들어가 봤지만 이런 데는 처음이야….”
시현은 속삭이듯 읊조리는 하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제가 뚫고 나온 곳은 이 거대한 건물 덩어리의 가장자리 옥상, 그나마 얹혀 있는 건물이 적고 층수가 낮아 아직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현은 끝없이 이어진 건물들을 유심히 보며 찾아야 하는 일행들의 위치를 가늠했다.
사마윤의 말이 맞다면 유준과 규민은 저 건물의 중앙쯤에 있을 것이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호텔은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중앙쯤에 있었으니까.
그것은 계속해서 일직선으로 뚫고 간다고 하더라도 꽤 시간이 걸릴 거란 뜻이었다. 물론 시현도 가는 길에 어떠한 방해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 미친,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
시현뿐만 아니라 일행들도 이 기괴한 모습에 조금 이상함을 느꼈는지 조금 주춤하고 있었다.
“하아… 일단 움직이자. 맨 앞은 태운이, 맨 뒤는 내가 설 거야 그리고 하정이 너는 내 앞쪽에, 사마윤은 태운이 뒤에 서서 다시 눈과 귀를 뿌려.”
그럼에도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물론 제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잔뜩 불만 어린 얼굴을 한 태운이 시야 가득 들어왔지만, 그 또한 이 구성이 최선이라는 건 찬성하는지 딱히 떼를 쓰진 않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 무기 들고 온 거 하나도 없는데 하필….”
그때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낸 건지 하정도 재빠르게 본인의 전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팀에서 서로의 전력 파악은 필수였다. 비록 급조된 일행이었지만 하정은 본능처럼 시현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런 하정에 잠시 멈칫했다. 본인과 태운은 딱히 무기에 구애받지 않는 전투를 하기에 크게 생각을 해 보진 않았던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로 해.”
물론 고민한다고 해서 대단한 답을 내려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정 또한 그걸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시현은 익숙지 않은 일행의 전력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사방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적당한 철근을 하나 잘라 내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철근이 얼추 검의 형태가 되자 머리 위에 정신없이 걸려 있는 빨래 끈을 뜯어내 검에 감아 어깨에 걸었다.
대충 검 대신 쓸 걸 습득하고 근처에 보이는 허름한 천을 뜯어내 작은 철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비록 제대로 된 무기만큼은 안 되겠지만 언제 나갈지도 모르고 어떤 적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가자.”
자연스럽게 제가 말한 순서대로 움직이는 일행들을 바라보던 시현은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 다시 한번 저 거대한 구조물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
“지금 길드 안에 남아 있는 이동문이 몇 개지?”
“총 두 개입니다. 그러니까 쓸 생각 하지 마십쇼.”
“허어… 비서가 이렇게 거침없이 말을 해도 되는 건가….”
햇살이 쨍쨍하게 들어오는 사무실 안. 신류하는 푹신해 보이는 가죽 의자에 앉아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가며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말이 우리 길드지, 국내에 있는 거 두 개가 답니다. 비상용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근데 지금이 그 비상사태지 않나. S급 게이트야. 데리고 오라고 했었는데 이대로 죽게 둘 수야 없지.”
“하아….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꽤 피곤했는지 조금 핼쑥한 얼굴을 하고 안경을 쓰고 있던 남자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손에 들린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바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최소 이틀은 필요할 것 같아요.”
“장난해? 그냥 전용기를 타고 가는 게 빠르겠군.”
그러나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은 건지 비서처럼 보이던 남자는 곧 좋지 않은 결과를 보고해 왔고 신류하는 제 턱을 톡톡 치면서 불만을 내뱉었다.
“지금 게이트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허락도 없이 한번 가 보십쇼. 아마 미국에서 쏘는 눈먼 공격에 격추당해 뒤질 수도 있을 겁니다.”
“거참. 말본새가 너무하군.”
“예. 제가 좀 그렇죠.”
쯧.
신류하는 작게 혀를 차고는 서랍에서 작은 유리 조각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소식을 들어 알고는 계시겠지만 어쨌든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는 해야만 했다.
삐익-
그때 사이렌이라고 들릴 정도로 급박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부산스럽던 신류하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알림의 진원지는 앞에 있던 비서의 핸드폰이었는지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긴급입니다! 지금 수원에 A급 폭발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도 뭔가 가볍게 흐르던 분위기가 쨍하고 얼어붙었다. 그리고 나선 작은 한숨 소리가 내부를 채우고는 사라졌다.
“인력이 늘 모자라…. 어디 일 잘하는 사람 없나.”
“없습니다. 가십쇼.”
물론 피곤해 보이는 비서는 전화를 끊고선 가차 없이 그 투정을 잘라 냈지만 말이다.
그때 재촉하듯 다시 한번 알림음이 울려 댔다.
신류하는 늘 그랬다는 듯 비서의 전화 응대를 듣다가 곧 별다른 반응 없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선 느릿하게 일어서서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선 출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창문을 열어젖히며 발을 허공을 내디뎠다.
“…미친.”
“뭔데?”
순간 허공을 밟으려는 발걸음이 멈췄다.
“폭발 게이트가… 두 개 더 생겼답니다….”
“뭐?”
그때만큼은 늘 여유로운 표정의 신류하도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
또옥, 또옥.
바닥에 아주 얕게 고여 있는 물웅덩이 위로 천장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며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물웅덩이를 거침없이 밟고 나아가는 발걸음에 의해 금방 흐트러졌다.
이제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건물 덩어리 안에 꽤 깊게 들어온 상태였다. 시현은 몇 번째로 마주한 줄 모를 더러운 회색빛 벽과 작게 허물어진 잔해들, 깜빡이는 마석 전구를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 같은데….’
계속 같은 곳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길을 헤매게 하는 진법이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분 탓일 테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길이 이어지니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걸 밖으로 티 낼 시현은 아니었다. 어떠한 단서도 없는 한 일단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기에 괜히 불안감을 조성해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사실 일행들도 내심 알고는 있을 것이다. 태운이야 워낙 제 속내를 잘 파악하는 애였고 하정 또한 몇 번이고 게이트를 오가던 팀장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둘 다 평소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시현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긋 웃는 태운의 얼굴에 괜히 고개를 앞으로 홱 돌리고 턱을 긁적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사마윤은 겉으로나마 여유로워 보이는 일행들과는 달리 불안에 떨며 손톱을 물어뜯는 중이었다.
‘무기, 무기가 필요한데….’
저를 빼고는 모두 무력이 출중했고 저 어린애는 세 명 중 한 명이 맡아 줄 테니 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제 상황은 달랐다.
라스베이거스는 돈이 굴러다니는 곳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만큼 능력 좋고 악독한 범죄자들도 많았다. 이 일행만 보더라도 자신과 저 꼬마애까지 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놈들까지 들어와 있을 확률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S급이라고 추정되는 게이트에서 저들이 구해 주기만을 바라며 마냥 따를 수는 없었다.
“저, 저기….”
“왜 뭐 수상한 정보라도 들어오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자신은 정말로 무기와 아이템이 절실했다. 사마윤은 일행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일행분들을 구하러 가는 길에 제 아지트에 들를 수 있을까요?”
“뭐?”
슬쩍 고개를 돌려 시현에게 말을 걸었던 사마윤은 점점 찡그려지는 시현의 미간에 찔끔했다. 그렇지만 이왕 말을 꺼낸 거 사정해 봐야 했다.
“그! 제 아지트에 아이템이 있을 겁니다! 스킬로 만든 공간이라 분명 남아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별다른 징조도 없고… 하여튼, 한 번만 확인하러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가, 가는 길의 딱 중간쯤입니다! 행로에 방해가 되지도 않을 겁니다!”
간절한 사마윤의 바람에도 실현은 가차 없었다. 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신뢰도 없는 이에게 무기를 쥐여 준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알고 있었기에 허락할 마음은 없었다.
“안에 저주를 해주하는 약도, 하정 님이 쓸 만한 마도구도 있을 겁니다. 물론 검도요.”
그러나 그 안에 있을 거라는 물건들의 리스트를 듣자 조금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면서도 하정이나 미첼과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더니 다 정보를 수집하느라 그런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비상시… 식량도.”
사마윤은 시현의 대답이 늦어지자 다시 한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시현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식량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언제까지 이곳에 잡혀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일찍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제 감이 경각심을 상기시켰다. 이놈의 감은 안 좋은 일에 대해선 어지간해선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랑 태운이를 빼곤 굶주림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시현은 아주 잠시 의외라는 눈으로 사마윤을 훑어보다가 속으로만 씩 웃으며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으로 느릿하게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