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하정아! 크게 태우지 말고 불 작게 조절해!”
거침없는 시현의 전투 방향 지시에 하정은 토 달지 않고 바로 화력을 조절했다. 이런 공대의 지시 체계를 하나로 만드는 건 중요했고 그걸 인정했으면 군말 없이 따라야 옳았다. 하정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순간 빛이 확 줄어들며 일정량의 화염이 하정에게로 흡수되고 타오르는 불길의 반대쪽으로 진하게 졌던 그림자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끼릭끼릭-
그림자가 흐려지자 죄다 뭉개진 몸뚱이 중 유일하게 멀쩡한 형태를 하고 있는 입을 미친 듯이 움직이던 것들이 급히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치 퇴각 명령이라도 받은 듯 쥐들도 신속하게 뒤로 물러서고 틈으로 숨었다.
시현은 입을 굳게 내리눌러 문 뒤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 쥐 새끼들을 최대한 처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철검을 휘둘렀다. 앞과 옆에는 이제 거의 가슴팍까지 사체들이 쌓여 있었다.
“이거 설마 내 스킬 때문에 그림자 진해져서 튀어나온 거야?”
상황이 소강상태가 되자 주변으로 계속 튀던 불씨를 거둔 하정이 심각한 얼굴을 하며 모두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당연히 일행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이 상황에 아연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행을 보호하겠다고 열심히 싸운 이에게 누가 당신 때문이 맞다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시현은 아까 쌓여 있는 사체들 옆으로 진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아귀가 벽을 한 손으로 뜯어낸 흔적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아.”
“하… 좆같네 진짜.”
하정은 시현의 말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쓰는 스킬 대부분은 강렬한 빛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을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진 않아. 큰 그림자를 만들지 않으면 돼. 네가 화력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일단 주변에 무언가 쌓이지 않게 해야겠지.”
“그렇지만 자기 그림자는….”
“그건 어쩔 수 없잖아. 그림자가 한곳에 고이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지.”
아귀는 그림자가 변화하자 급히 그 안으로 다시 파고들어 갔다. 그렇다는 것은 일정한 크기나 진하기가 필요하다는 것일 텐데 확신할 순 없었지만, 다음에는 어떻게든 공략 방법을 찾아봐야만 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야. 조금 특이할 뿐 강하지는 않으니까.”
시현은 침통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애써 흐트러트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하든 강하지 않든 절대적인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변수 또한 많아질 거다. 게다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나타난다면 일행을 하나하나 챙겨 줄 겨를이 없을 테고.
그러나 이런 얘길 꺼내 봤자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목표는 빠르게 움직여 아이템을 손에 넣고 규민과 유준을 찾아 합류하는 것이었다. 시현은 다시 빠릿빠릿하게 발을 옮겼다. 시간이 촉박했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생명력을 채워 주세요! (3102/100000)]
잠시 후. 역겨운 냄새와 핏물로 엉망이 된 전투 현장을 겨우 벗어난 일행은 눈앞에 뜬 안내를 보고 분노에 찰 수밖에 없었다.
“아, 존나 재수 없네 이거.”
“대체… 이거 어떻게 나갈 순 있는 걸까요….”
하정은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알림창을 보며 거친 말을 연신 내뱉었다. 안 그런 척하고 있었지만, 사마윤은 조금 절망적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시현은 얼마 변하지 않은 수치에 집중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경고’라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나타난 건 아닐 거다. 그런데 고작 저것밖에 안 올라갔다고?
저 숫자들이 단순히 머릿수를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전투들로 올라간 수치라기엔 너무 적었다.
물론 그것들을 처리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건 저와 태운, 하정이 한꺼번에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심히 피해 오긴 했지만 분명 일반인들끼리 뭉쳐 있는 그룹도 있었고, 헌터라고 해도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죽은 사람이 없다니 수상했다.
‘…아니야, 죽은 사람은 많았어….’
시현은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쥐새끼들을 썰어 대면서도 저 멀리서 순식간에 휩쓸려 사라지던 생명 반응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번뜩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을 작게 읊조렸다.
“이거 우리가 서로 죽여야지 저 수치가 올라가는 건가?”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던 일행들이 충분히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시현에게로 모여들었다.
“뭐?”
“…이거 수치 봐. 이 전투에 사람이 이렇게밖에 안 죽었다고? 뭐 운 좋게 전투가 가능한 헌터들이 각 그룹마다 있었을 수 있겠지만 보통은 아닐 거 아냐.”
시현의 목소리는 처음엔 확신이 가지 않는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이렇게 많은 물량의 몬스터가 이곳에 있는데 왜 처음부터 쓸어 버리지 않고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서로 죽이라고 한 거였어.”
벽에 잠시 기대어 있던 시현이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겨우 이 정도의 러시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진 않을 테니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이곳이 또 어떤 짓을 벌이려 할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또 언제 어떤 심각한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것은 역시 제게 좋지 않은 상황을 줄 게 뻔했다. 시현은 답답해지는 마음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고는 왼쪽으로 보이는 갈림길을 바라봤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도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 그곳엔 마치 구역이 끝이 나고 다른 구역이 다시 시작된다고 알리듯 조금 달라 보이는 벽과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이제부터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 미안하지만 이제 쉬는 시간은 없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일행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시현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 저벅.
시현은 앞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태운의 인도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확인했다. 아까와는 달리 튼튼해 보이는 벽과 철문들, 조금 널찍해진 공간 등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 중앙으로 갈수록 건물이 계속해서 견고해진다면 속도는 자꾸만 느려질 게 분명했다. 시현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빨리 움직이기로 하고 난 뒤 퀘스트로 떠밀리듯 해치운 커다란 전투는 두 번, 물론 자잘한 전투는 수없이 있었다. 그로 인해 걸음에 브레이크가 걸려 생각보다 속도가 나질 않았다. 처음부터 이러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더뎌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미첼, 아직 괜찮아?”
“…괜, 찮아요.”
그때 하정이 작은 소리로 미첼의 상태를 물어보는 게 들려왔다. 미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힘들 것이었다. 체력이 10 정도면 일반인보다는 높은 편이긴 해도 지금의 강행군을 버틸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시현은 그것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일정 수치를 채운 분들께는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까 눈앞에 떠올랐던 알림창의 내용이 떠올랐다. 시현은 너무나 치졸한 행태에 이를 작게 아득 깨물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제 몸 상태로 미루어 보면 최소한 밤은 되었을 거다. 꽤 배고픈 사람들이 생길 시간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 일행들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얼마나 남았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현은 아까 전과 별다를 바 없는 대답에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앞장서서 묵묵하게 길을 뚫는 태운은 거침이 없었다. 한 번쯤은 하기 싫다고 떼를 쓸 만한데도 그랬다.
그게 오히려 시현의 죄책감을 키우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제대로 잘해 준 것도 없었고, 게다가 최근에는 계속 피해 다니지 않았던가. 그러나 시현은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 애와 함께 지냈던 기간은 대략 십 년이었고 조금 틀어지기 시작한 건 고작 요 몇 달이었다. 절대적으로 숫자만 따진다면 비할 바가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이 짧은 시간이 제게 너무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대체 자신은 태운이에게 뭘 해 주고 싶은 건지, 이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 태운은 시현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제 내부의 변화에 집중한 상태였다.
‘쯧, 하필.’
저번처럼 아예 스위치가 꺼진 듯 내공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공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꽤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고장 난 주파수처럼 내공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가진 내공이 사라졌다 들어왔다 한다기보단 제 의식과 내공이 담긴 몸이 어긋나서 잠긴 듯한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태운은 제 변화를 알려야 하는지 계속 숨기고 버텨야 하는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싫었고 피해를 주는 것도 싫었기에 옅게 초조한 감정이 들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요동치던 내공을 가늠하다 타이밍을 맞춰 앞길을 막고 있는 벽을 잘라 낸 태운은 그 앞으로 뻥 뚫린 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제 문제가 처음 시작된 것은 연합과의 만남이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그 후에 이규환이 펼친 게이트 연결에서는 의외의 흔적을 찾아냈고.
‘그렇다면 이것도?’
꽤나 합리적인 추측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오히려 이 상황이 조금 아쉬웠다. 머릿속 목소리가 멀쩡했다면 그 가설에 더 살을 붙여 줬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지직거리기나 하는 고장 난 물건일 뿐이었다.
“이제 이 근처입니다!”
그때 제 뒤에서 사마윤의 기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그와 동시에 훅 꺼져 버린 제 내공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