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진법에서 나타난 세 명의 안내를 빙자한 강요에 터덜터덜 걸어 나가던 일행은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멈춰 서자 우르르 다 같이 걸음을 멈췄다.
“잘 따라와라. 헛짓거리하다 죽어도 안 구해 주니까.”
“예에….”
즈즈즈즈-
시현은 진법을 바로 앞에 두고서야 미세한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제가 아는 보통의 진법 위에 또 다른 하나의 막이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성안이 조금의 딜레이를 가지고 펼쳐졌다. 그러자 시현의 눈앞으로 작은 반투명 창이 떠올랐다.
[생명의 진(B)-합성.]
‘합성?’
의미 모를 설명이었지만 그 사이비들이 쓰는 스킬들에 성안을 썼을 때와는 다르게 설명이 적혀 있는 걸 보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다시 한번 그자들과 관련이 없는 곳이라는 걸로 결론이 기울었다.
“앞사람을 잡아라.”
그때 남자들의 명령과 함께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누가 봐도 벽으로만 보이는 곳으로 차례차례 일행들이 걸어 들어갔다. 제일 처음은 일행의 맨 앞에서 안내하는 남자였고 그다음은 하정, 사마윤, 미첼의 순서였다. 마지막에 서 있던 시현은 제 앞에다가 세워 둔 태운의 손을 당겨 잡고 슬쩍 뒤로 시선을 줬다가 천천히 진법을 통과했다.
그 순간 축축한 안개 같은 것이 훅 끼쳐 들어오는 것 같더니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별다른 방해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두세 걸음을 나아가자마자 다시 마력 전구의 빛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오늘의 손님인가?”
“맞아.”
“호오, 헌터? 운이 좋았군.”
곧바로 보초라도 서고 있는 듯 바로 앞에서 경계하던 남자가 조금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하루 이틀 정도의 친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좀 더 다른 정보를 파악하기도 전에 시현은 남자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급히 제 옆에 있는 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운이….}
{음. 맞습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는 마치 꿈이었다는 듯 아무런 징조도 없이 흐려지듯 굳었던 내공이 느껴졌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때까지도 신경 쓰지 못했던 등 근육의 저릿함에 허탈한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다행이다.}
{제가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운은 시현에게 다시 한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약해진 저를 보호하겠다 꼭 잡은 손은 은근슬쩍 모른 척하며 다시 고쳐잡았고, 말이다.
시현은 그것도 모르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물론 태운의 말을 믿었지만 이상 현상이 지속되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었기에 조금은 불안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니었던가.
정말로 다행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주변을 탐색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기감이 주변을 훑었다.
‘많아.’
대략 이백여 명은 넘어 보이는 인물들의 기운이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게 느껴졌다. 시현은 멀뚱하게 서 있는 일행들 사이에서 함께 잔뜩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내면서도 머릿속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를 감당할 만한 여유가 있다고?’
보통 무리의 인원이 많다면 파밍이나 자기 보호에 큰 힘이 되겠지만 필연적으로 저들에게 들어가는 식량과 물, 잡다한 물품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안면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합이 유지되고 노동력을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가뜩이나 게이트에는 일반 식량들을 아무런 준비 없이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휘말려 버린 상황에 게이트에 가져갈 수 있도록 잘 챙겨 놓은 식량이 백인분 이상 있다고?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아까 저 정찰병들이 투덜거렸듯 저들의 식량들을 다 빼앗았다고 해도 똑같았다.
‘아직 일주일은 지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는 절대 이 많은 인물을 다 감당할 순 없을 텐데. 그렇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그때 시현이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대화가 마무리됐다.
“일단 안쪽으로 가서 데리고 온 인원 신고해. 곧 있으면 식량 배급을 한댔어.”
“아, 고맙다. 수고.”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일행은 앞으로 뚫려 있는 골목을 따라 걸으면서 마력 전구의 인위적인 빛이 아닌 붉은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건물 몇 개는 부숴서 만든 듯한 작은 공터였다. 그 가장자리 한쪽에는 잡다한 짐들이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나무를 태워서 만든 작은 모닥불이 있었다. 빛은 그곳에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사마윤이 아주 조심스럽게 시현의 손끝을 툭 쳤다.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저쪽입니다.’ 그 간절한 눈빛이 그의 아지트 위치가 느껴지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킬의 영향인가?’
짐들이 높이 쌓여 있는 곳 바로 옆에 있는 가장 멀쩡한 상태의 네모난 건물이었다. 그곳은 정말 스킬 때문인 건지 뭔지 다른 건물들보다 무척 견고하고 단단해 보였다.
시현이 그 주변의 경로를 파악하려 하는 순간 공교롭게도 그 안에서 5명의 인원이 튀어나왔다. 너무나 의심이 가는 대화를 작게 나누면서 말이다.
“분명 저 앞에 뭔가 있는데 안 깨진단 말이지. 스킬인 건 분명하고. 대체 뭐지?”
“속 터지는군. 오늘이 지나면 우리도 힘들어.”
저 짧은 대화에도 대충 어디까지 일이 진행됐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무언가 있다는 건 들켰다. 사마윤이 장담한 대로 아직은 유지되고는 있는 것 같았지만 존재를 들킨 이상 언제 그것이 깨질지 몰랐다.
‘어쩐지 저기에만 유난히 강한 놈들이 모여 있다고 했더니.’
시현은 눈을 슬쩍 가늘게 뜨면서 저들에게 차례차례 성안을 걸어서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A급 둘에 B급 네 명. 대장 노릇을 할 만하네….’
생각보다 꽤 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입고 있는 옷들도 꽤 화려한 게 아이템들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곳에 있는 100명이 다 같이 덤벼도 쉽게 넘기지 못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시현의 손끝으로 작은 감각이 느껴졌다.
사마윤의 부름에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린 시현은 그새 바뀐 그의 불안한 듯한 표정에 잠시 의아함이 들었다. 저건 제 아지트가 털릴까 우려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시현은 계속해서 제 옷자락을 툭툭 치며 간절한 눈빛을 쏘아 대는 사마윤의 얼굴을 보곤 작게 혀를 찼다.
‘아는 이들인가. 쯧. 명색이 신교에 있던 자가 전음도 쓰지 못하나. 답답한데.’
불안한 건 알겠고 대충 상황도 알겠는데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자는 그 유명한 흑접의 수장이었다. 한마디로 저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네 정체를 아는 자들이 없지 않나? 적당히 해라. 더 수상하니까.}
비록 들을 순 없지만 전음을 보낼 순 있기에 시현은 가차 없이 사마윤의 불안감 어린 칭얼거림을 차단했다.
“레오 님! 저희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헤매던 일반인들을 구해 왔습니다!”
“아! 스펜서. 수고했습니다.”
그때 아는 얼굴을 선두로 낯선 무리가 이 공간 가운데에 서 있는 걸 발견한 건지 5명의 헌터들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 조금 웃기지만 반갑습니다. 그냥 레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시현은 그자가 차례대로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새 초조한 듯한 얼굴을 꾸며 내고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은 외부의 구출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는 쉘터죠. 편히 계셨으면 좋겠군요.”
잡힌 손이 작게 흔들리고 떨어져 나갔다. 시현은 자꾸 피어오르는 의아함을 숨기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들은 거랑은 조금 다른데.’
시현은 잠시간의 인사를 나누고 여전히 좋은 사람인 척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에게서 멀어지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못돼먹은 인물들이 안을 쥐어 잡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물론 말 몇 마디 나눴다고 파악을 다 끝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저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시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주변의 대화 소리가 자잘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자들에 대한 칭찬과 추앙이었다.
“일단 아무도 없는 곳에 대충 자리 잡고 지내면 된다. 그리고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저 가운데로 모이면 돼.”
그때 시현의 상념을 끊고 스펜서라 불린, 저희를 이 안으로 데리고 왔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자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까와 같은 경계나 관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그게 다인가요?”
“그럼? 내가 너네를 다 먹이고 챙겨 줘야 하나? 설명은 여기까지다. 이따가 식량 배급 때나 잘 모이면 돼.”
시현은 당장이라도 성가신 것들을 털어 내고 싶다는 듯한 태도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동시에 일행의 시선이 마주쳤다.
몇 번의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시현이 앞장을 선 상태로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 들어갔다.
“의외로 잘 유지되고 있네? 헌터래도 딱히 관심도 없어 보이고….”
문이 닫히자마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하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시현은 저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하정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단호하게 원래의 목표를 꺼내 들었다.
“뭐,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물론 생각보다 일반인들도 많으니 조심스럽게 안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물건만 챙겨서 바로 여길 떠날 거야.”
“쉽진 않을 겁니다….”
그때 사마윤이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천천히 제 옆에 서 있던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담긴 눈빛에 사마윤은 침을 잠시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자들은 이쪽 지역에서 꽤 유명한 공격대입니다. 프리랜서 헌터들로만 이루어져 있고 실력도 아주 좋죠.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온통 화려해 보이는 이 라스베이거스는 빛이 화려한 만큼 그림자도 무척 크고 진했다. 그곳엔 전 세계에서 모이는 범죄 집단들이 상주해 있었고 저들도 그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흑접의 수장이라는 사마윤이 확언하듯 말하는 걸 보면 거짓은 아닐 테다.
‘한마디로 범죄자들이란 거네. 무슨 이유로 여기에선 저렇게 착한 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은 해야겠고….’
시현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사마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반문했다.
“그게 다가 아닐 텐데. 네 반응은 겨우 그거 때문은 아니었잖아?”
순간 사마윤의 동공이 확 커졌다 좁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