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만약 제가 생각한 가설이 맞다면 이것은 사람을 구하고 자시고 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곳곳에 있다면 그 좆같은 생명 수치는 아까 봤던 것처럼 빠르게 차오를 거다. 한마디로 그 결과도 불확실한 퀘스트가 금세 달성될 거란 뜻이었다.
“그거 기억나냐? 사람 많이 죽일수록 보상해 주겠다고 했던 안내창?”
“뭐? 설마….”
“생각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미친, 이거 그냥 두고 볼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저절로 한숨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늘 그랬듯 처음에 세웠던 계획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규민과 유준은 어디 있는지 확실치 않았으며 예상치 못하게 태운의 상태도 불안정해졌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 안에서 지내게 될지도 몰랐고 몬스터가 고작 두 종류일 것 같지도 않았기에 함부로 힘을 남발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서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인간들이 알아서 퀘스트까지 열심히 채우고 있었다. 게이트가 덮쳐지고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다. 시현은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 30000이 넘게 채워진 수치를 떠올리며 아파져 오는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시간이 촉박해.’
순간적으로 바닥을 향하던 시선이 제 옆에 서 있던 태운에게로 옮겨 갔다. 당연히 저를 보고 있던 붉은 눈과 마주쳤지만, 시현은 다시 시선을 되돌려 바닥을 바라봤다.
‘당연히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놈들과 게이트를 처리하는 게 우선인 건 맞아. 그런데 또 그 이상 현상이 나타난다면?’
규민과 유준의 안위도 그렇지만 제겐 태운에게 이상 현상이 생기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건 필연적으로 튀어나올 작은 위협을 감당할 생각을 한단 뜻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런 위협들이 사실 위협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그렇게 움직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전투를 이어 가며 움직이는 도중 약해 빠진 몸이 된다면 그 작은 위협들이 큰 위협이 될 거다. 그리고 그건 태운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게 분명했다.
‘퀘스트를 다르게 비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또한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뿐이겠지.’
벌써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선택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지 말이다. 그러나 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고민해 봤자였다. 결국 저 애가 아까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내렸던 결정을 뒤엎고 온전히 태운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방어적인 결정을 내릴 테니까.
{뭘 걱정하시는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스승님의 결정에 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더 강합니다.}
그때, 마치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안다는 듯 태운의 전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마지막에 덧붙인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괜히 속이 울렁거리고 울적해지게 만들었다. 결국 이 고민은 자신이 이 애를 지켜 줄 자신이 없어서 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등신같이. 이게 뭐 하는 거냐.’
순간 행동은 하지 않고 머리만 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는 제게 약한 실망감이 들었다. 당장 태운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으니 지레 걱정하는 것은 일단 끊어 내야 했다. 시현은 밖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제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들을 일단 자르고 다시 한번 최우선을 뒀던 목표를 상기시켰다.
“일단 우리의 목적은 사마윤의 아지트야. 그것부터 해결한다.”
“…지금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식량을 얻는다는데 그냥 둔다고?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이건 아니지.”
당연하게도 불만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제가 아는 하정이라면 당연하게 반발할 거라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제 이기적인 생각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순 없었다. 언제 태운이에게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빨리 물건만 찾아서 나가잔 얘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시현은 양손을 꾹 그러쥐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치 너도 봤잖아. 일단 빨리 돌파해서 유준이랑 규민 씨를 찾고 이 게이트 자체를 빨리 해결하는 게 먼저야. 어차피 여기 하나 해결한다고 달라질 것 없어. 그 짓거리를 하는 곳은 이곳 한 곳뿐만이 아닐 테니까.”
“하아, 알아 그건 맞는데.”
“…뭐, 아지트를 찾아가면 전투하다가 문제가 자동으로 풀릴 수도 있겠지.”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하정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그런 시현의 태도에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도와주겠다는 말을 참 잘도 돌려 말한다.”
“그들을 따돌리는 게 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쓸 거야. 무조건 그들을 처리하겠다는 게 아니야.”
“그래, 그러시겠지.”
조금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이제 거리낄 건 없었다. 일단은 움직이기로 했으니 망설이지 않아야 했다. 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멎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정이 너는 일단 미첼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상황 봐서 들어왔던 쪽 근처로 가 있어. 그리고 사마윤은 나와 태운이 사이에. 움직이지.”
***
밖은 아까 전에 습격이 있었다는 걸 잊은 듯 여기저기 모여 있는 이들로 어수선했다. 익숙해서 그런 건지 진짜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현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보단 움직이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시현과 태운, 사마윤은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공터의 가장자리를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일단 뒤쪽으로 돌아가야겠어. 그것의 형태나 특이 사항에 대해 다시 말을 해 봐.”
“원래는 그냥 방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문은 제게만 보였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대화가 오갔지만 딱히 대단한 정보는 없었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사마윤의 대답은 시현을 답답하게 만들었지만, 은근히 쏟아지는 낯선 자를 향한 눈길에 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공간은 강기도 안 든다 이 말이지.”
“예… 한번 테스트를 해 본 적이 있었는데 모든 공격을 다 어딘가로 흘려보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과 닿아 있는 벽이라면 뚫리지 않을 거예요.”
제힘까지 막힐진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획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안에 그들이 있든 말든 뒤쪽 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리고 단번에 제압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었다. 방금 말했듯 검이 가로막히는 변수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그 아지트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 지을 수 있을 테니 아주 안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시현은 빠르게 주변을 훑고는 목표로 한 건물이 가까워지기 전에 옆으로 뻗은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그러자 상황을 한탄하는 소리와 이 와중에도 가십 같은 가벼운 얘길 하는 대화가 두서없이 들려왔다.
“대체 구조대는 언제 오는 걸까….”
“재수도 없지, 친구 중에 나만 이렇게 휘말렸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마찬가지야… 젠장, 이곳에 술 같은 건 없겠지.”
아무래도 헌터들인 그 5명의 주변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거로 생각했는지 일반인들이 그 주변 건물들에 꽤 몰려 있었다. 시현은 조금 더 조심하며 미로 같은 골목을 걸어 나갔다.
곧 목표로 한 건물의 반경 5미터 안으로 진입할 차례였다.
후웅.
그러나 일정 구간을 넘어가는 순간 시현과 태운의 발걸음이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멈추어 섰다. 둘의 생각을 달랐지만, 원인은 같은 그것 때문이었다.
[유ㄹ ㅣ, 과 ㄴ련…]
이곳에 휘말린 이후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던 소리였다. 버벅대긴 했지만 오랜만에 울리는 반가운 알림에 태운은 미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편처럼 흩어진 단어에서도 태운은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유리 조각과 관련된 기운이라.’
그것은 여태 계속 엮였던 그 단체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와도 같았다. 가뜩이나 미꾸라지가 도망가듯 계속해서 잡히지 않는 놈들 때문에 슬슬 열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상 현상이 있었던 이후 힘이 다시 돌아오며 약하게 소실된 기운까지. 이제는 여유를 부릴 만한 상태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반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대략 20명 정도. 전부 능력자군.’
지하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두어져 있었다. 어떠한 조치가 취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 한 명도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멈추어 있다는 건 사지가 결박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태운은 슬쩍 시선을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멈칫하긴 했지만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서 그의 생각이 보였다. 시현은 아래에 있는 이들보다 일단은 사마윤의 아지트라는 것부터 처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스승님. 아래에 그 유리 조각과 같은 기운을 가진 무언가가 있습니다.}
{뭐?}
그렇기에 그가 움직이기 전에 재빠르게 전음을 날렸다. 딱히 스승님의 결정에 지장을 주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번만큼은 조금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님이 의문을 품을 걸 알면서도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 현상의 빈도가 잦아지고 이제는 그 힘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원래 있던 힘의 일부마저 없애고 있었다. 이것까지 그가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니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답이 빨리 필요했다.
태운은 조금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기듯 저보다 앞에 서 있던 시현의 손을 슬쩍 쥐었다. 금방 떨어트려도 좋았다. 지금은 이 불안함을 덮어 줄 온기가 필요했다.
{어떻게… 후우 아니다. 그렇다면 일단 아래부터 확인해야겠어.}
그러나 시현은 태운이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한숨을 쉴지언정 뿌리치진 않은 채 전음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이거면 됐다. 태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작은 태도에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시현은 그런 태운을 흘끔 보고는 왠지 모르게 저려 오는 듯한 손바닥에 괜히 미간을 팍 찡그렸다.
저렇게 좋다는데 어떻게 손을 뿌리친단 말인가. 시현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얼이 빠진 것도 잠시 태운이 갑자기 치대 오자 얼떨떨하게 손을 꾹 잡고 있다가 제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이제는 그동안 모른 척해 왔던 것들까지 복잡하게 얽혀 간단히 풀어낼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일단 지금에 집중해야 해.’
그러니 더 지금 당장 닥친 상황에 집중하려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