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노크와 동시에 퍽 소리가 나도록 가슴팍을 맞은 태운은 그 힘에 세게 떠밀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멍하고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뭐지, 분명 저는 저 위에 있었고 스승님과 입술을 대고 있었는데.
“누, 누구세요?!”
시현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상황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고작 소파에서 떨어진 거라 아프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태운은 고개를 휙 돌려 소리가 난 문을 붉은 눈 안에 불꽃이 튈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곳은 이상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이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기운을 쉽게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 분노를 받아 내야 할 저 불행한 인간의 정체를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뜻이었다. 사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죽일까.’
하지만 시현은 태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재빨리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리하고 입술을 벅벅 닦은 뒤 허겁지겁 문을 향해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아, 이 비서님….”
갑작스러운 방문자의 정체는 이곳에 온 뒤로 자잘하게 생활을 챙겨 주던 이 비서였다. 시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뒤로 돌려 휘휘 내저었다.
빨리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나 하라는 뜻의 수신호였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손짓을 보며 미간을 작게 좁혔다 풀곤 느릿하게 문 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살가운 인사 따윈 없었다. 그러나 나름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해 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시현은 그제야 작게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튀어서 그랬지 아직 시현은 태운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다른 의미긴 했지만 어쨌든 시현에게도 이 갑작스러운 방문은 썩 달갑진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온 것 같군요. 그렇지만 한시가 급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분명 도움이 필요해 보이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니 제게도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한 것일 테다. 그러나 이렇게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태도를 바꿨다는 건 정말 무슨 일이라도 터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시현은 여태 풀어져 있던 긴장감이 확 조여드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당장 레이첼 님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도 5분 정도도 주지 못할 정돈 아니겠죠?”
“…예. 그래도 조금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비서의 얼굴은 하루 만에 꽤나 초췌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잠도 자지 못하고 일한 게 분명했다. 시현은 그런 자를 딱히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리고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태운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덩치는 산만 한 게 진짜.’
물론 그 모습조차 미워 보이지 않는 제가 웃겨서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현은 태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풀어지려는 마음을 급히 다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남은 얘기는 일단 거기에 갔다가 와서 마무리하는 거로 하자.”
“…남은 얘기요? 밤새 말씀드린 게 다입니다.”
“연태운, 그거 다 아니잖아.”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한번 보기도 하지 않았나. 신신당부해 두긴 했지만 태운은 분명 제가 없어진 동안 얌전히 굴었을 리가 없었다.
평소라면 대충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수 있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더 자세히 알아야 했고 나중에 혹시 모를 더 큰 문제로 번질 만한 게 있다면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시현은 오랜만에 엄한 얼굴을 하곤 태운을 꼿꼿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미묘하게 억울하단 듯 불쌍한 척하던 표정이 풀리곤 삐죽이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곤 태운은 마지못하단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그거 말고요.”
습관처럼 머리로 올라간 손이 새카만 머리카락에 닿기도 전에 잡혀 내려왔다. 그러자 시현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반쯤 접으며 픽 하고 웃음 소릴 냈다.
역시 빡빡하게 몰아붙이는 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귀여우니까 필요한 것만 물어보고 자잘한 건 봐주기로 한 시현이었다.
***
잠시 후, 레이첼이 머무는 공간은 아주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안에 자리한 인원은 4명이나 됐지만, 그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척 시간을 드린다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두 분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척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 거래의 주도권은 시현과 태운이 쥐고 있는 만큼 처음부터 한껏 납작 엎드린 듯한 문장이 레이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이어서 나올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 이 사이에 엮인 일이야 하나뿐이니 대충 예상은 가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한 상황 파악이 필요했다.
“자세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우리 쪽의 동향이 바뀐 걸 그쪽에서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은밀하던 그들의 움직임에 박차가 가해졌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게이트가 마구잡이로 터지는 게 아니란 뜻입니다.”
시현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말은 한 번에 움직이자던 어제의 계획이 새어 나갔단 말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이곳과 손을 잡는 게 맞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이첼도 참담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안면을 트고 이곳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신류하였다.
“변명으로 들릴 걸 알지만 잠시 설명한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해 보세요.”
“일단 자세한 계획이 흘러 나간 건 아닙니다. 어차피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저와 이 비서, 그리고 같이 얘기하셨던 레이첼 님뿐이니까요.”
신류하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걸 보니 이쪽이 원래 모습에 더 가깝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나 물어보신 것처럼 잠시 인원을 움직일 수 있나 알아보긴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계획이 흘러 나간 것 같더군요.”
그들은 굉장히 철저했다. 그리고 맹목적이었다. 왜 움직이는지 왜 알아보는지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사실이래도 그저 그대로 보고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체계의 중심에는 량차오샤의 능력이 있었다.
“능력이요?”
량차오샤의 수상함은 시현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 그래서’ 하는 작은 깨달음만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태운이 그자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 하는 부분이 더 궁금할 뿐이었다.
애초에 시현은 그자와의 첫 대면 때부터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가진 제약 재단과 그 단체가 굴린다던 약품의 관계로도 충분히 수상하게 볼 만한 정황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나중에 떠오른 거였다. 그 이전부터 시현에게는 타인의 특성을 알 수 있는 성안이라는 유용한 스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자에겐 내 성안이 먹히지 않았어.’
몇 번을 성안을 써도 고작 무언가에 가려져 있다는 건조한 말투의 안내문이 여러 번 반복 될 뿐이었다.
그 당시엔 흑접과의 만남이 더 중요했던지라 나중에 저자의 뒤를 알아봐야겠다 하고 넘어갔었다. 게다가 이렇게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하는 자가 그 은밀하다는 단체의 머리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다.
분명 사방에서 목숨을 위협을 받는 자리일 테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보를 숨기고 은둔하기 마련이었건만 그는 그러지 않았던 거다. 제 스킬 특성상 그러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꽤나 까다로운 상대라는 생각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자는 제 말에 작은 매혹과 의지를 담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냐는 생각이 드시죠. 그래서 저희도 잠시 방심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신류하의 목소리엔 이제 조금의 자책감이 실려 있었다.
량차오샤의 말에는 의지가 실렸다.
아주 미약했기에 초기에 별다른 조처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이렇게까지 지지부진하게 끌고 온 원인이 되었다.
애초에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량차오샤의 설득을 들은 자들은 마치 자신이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자주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스킬 같은 것에 휘말려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지 않는단 뜻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들은 간단히 스킬을 써서 이용했기에 오히려 상황을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누가, 어디까지 량차오샤에게 감화돼 물밑으로 협력을 하는 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증상은 상태 이상이 아니기에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 스킬이나 물약도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저도 그자를 만났었습니다만 별다른 증세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시현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다행히도 시현 님은 아닙니다. 이제 저희도 마구잡이로 쓸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간파해 낼 만한 기술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자에 대해 크기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면 한두 번 정도 말을 섞는다고 걸려드는 게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그자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자가 흔치 않지만요.”
그제야 왜 량차오샤 같은 거물이 어울리지 않게 직접 봉사를 다니며 여기저기 선량하고 소탈한 모습을 어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친근하게 말을 걸면 한 번이면 몰라도 그 이후론 강하게 경계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시현은 심각한 얼굴로 표정을 굳히고선 왜 이렇게 량차오샤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한 건지 눈치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내부의 미묘한 분위기가 유출됐고 게이트에 큰 이상이 생겼다는 말씀이시겠군요.”
“…맞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이 생긴 건 신의 광산이라고 말씀드려야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