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시현은 제 앞에서 쉬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하정을 보고 잠시 입을 닫았다.
레이첼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다. 그만큼 하정과 대화를 마무리한 지도 제법 지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하정을 살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에는 무엇보다 량차오샤에 대한 내용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면이 있던 만큼 하정은 알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알았겠지.”
그래, 한마디로 시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저 표정 말이다. 시현은 잠시 혹시나 하긴 했지만 제 눈앞에서, 특히 좀처럼 사람을 믿는 법이 없는 하정이 저러는 것을 보자 급격하게 위기감이 느껴졌다.
“미치겠네….”
시현은 잠시 멈칫하고는 골치 아프단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런 작은 태도 변화에도 마치 크게 공격이라도 당한 듯 하정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가? 야, 적당히 해. 네가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 봤자 고작 몇 개월이잖아. 나는 몇 년을 봤어.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헌신적으로 남들 돕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는데.”
하정은 마치 저 이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자들의 만행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하정 또한 그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에 무조건 찬성이었고. 그런데 그자의 이름을 붙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이렇게 반응이 격렬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시현이었기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하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기론 고작 몇 번을 본 게 다라고 했다. 몇 날 며칠을 같이 논 것도 아니라 오로지 일로 만난 사이였기에 딱히 사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영향을 받았다는 게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대체 밖에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깔려 있다는 뜻이지?’
그가 얼마나 하정에게 공을 들였는지, 그래서 그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까지 된 건진 모르겠지만 시현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미리 이런 비슷한 상황에 대해 태운과 이야기를 하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이 될 순 없겠지만 당장 저 상태를 풀어내야만 했다.
순간 저를 바라보고 있던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현은 잠시 숨을 몰아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태운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현마저도 제대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움직인 손은 하정의 목덜미와 이마에 닿아서야 멈췄다.
“무슨!”
그리고 하정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은 안개 같은 게 손에서부터 흘러나와 손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응집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정의 움직임이 멈추고 눈이 순식간에 충혈됐다.
보통 사람을 휘어잡는 것은 몸과 뇌에 작용한다. 공포로 만들어진 것이든 스킬로 이루어진 것이든. 그러나 성안을 써도 보이지 않고 의지가 작용했다는 건 심령 자체에 영향이 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태운은 그걸 아주 잘 다룰 줄 알았다. 게다가 뭐 세네아즈들의 무언가를 알게 됐다고 하니 그 실력에 날개가 달렸으면 달렸지, 퇴화하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몇 번 시도할 수 없다고 하긴 했지만 단 한 번이면 족했다.
“정신 차려, 이하정. 내 목소리 들리지?”
하정이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시현은 하정의 눈을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목소리에 반응하듯 얌전히 앉아 있던 하정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초점이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마냥 멍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시현은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초조해지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시발… 이거 뭐야.”
그러나 시현의 목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하정의 입에서 먼저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험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시현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는 하정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는 태운의 어깨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천천히 떠올려 봐. 대충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알잖아.”
“…진짜 좆같네. 이게 대체 뭐야? 나 이 와중에도 아직 그 사람한테 호의적인 마음이 남아 있어. 말도 안 돼.”
하정은 꽤 많은 충격을 받은 듯해 보였다. 잠시간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그동안 이상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이상한 일일이 상기하는 동시에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아직 희미한 호감이 남아 있었기에 다시금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몇 번이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 개자식이 제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계속 상기해야 했다.
“계속 생각해. 되짚고 되짚다 보면 점점 흐려질 거야.”
“소름 돋아.”
“이해해.”
혹시나 ‘나도?’ 하는 생각이 찰나 든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는데 하정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시현은 어쨌든 해결된 상황을 보며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완전히 백 퍼센트의 확률을 가지고 행한 게 아녔다 보니 끝까지 긴장이 되긴 했던 모양이었다.
[수고했어, 태운아.]
시현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태운에게 전음으로 칭찬을 날리며 작게 웃었다. 그러자 태운도 그제야 맑게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순간적으로 아무 미세하게 식은땀이 맺힌 이마가 보였지만 시현은 다시금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야, 아까 하다 만 얘기 계속해 봐.”
그때 하정이 나름 머릿속이 정리됐는지 소파에 몸을 푹 묻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고 퀭한 게 쉬어야 할 것 같았지만 시현도 지금 한 번에 얘기하는 게 더 나았기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끊어졌던 설명을 다시 이어 갔다.
“그러니까, 대략 일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전에 그 새끼들 전력을 좀 파악하고 혼란을 줄 예정이다. 이거지?”
“음… 맞아.”
설명은 길게 이어졌었지만, 하정이 일목요연하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중요한 건 적들의 전력을 줄이고 우리 쪽 전력을 높이는 건데…. 흠, 너 어차피 일주일간 밖에 나가서 깽판 칠 거랬지?”
“아니, 깽판이 아니라 전력 파악,”
“오케이. 그럼 나랑 같이 갈 데가 있다.”
하정이 짙게 미소를 지으며 시현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턱 하니 제안을 해 왔다.
제안의 요지는 게이트가 아니라 강원도에 있는 신의 광산 근처, 다른 곳을 가자는 것.
사실 가장 급한 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게이트가 아니었다. 빡빡하긴 해도 아직은 충분히 나라에서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분명 헌터 협회 안에도 량차오샤의 마수가 펼쳐져 있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계속 보고받아 보니 그들은 아주 소수로 보였다. 그러니까 당장 시현이나 태운이 도와줘야 할 정도로 급하진 않다는 뜻.
하정은 이 둘을 데리고 위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너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냐? 우리 위에는 어떻게 됐는지?”
“위에?”
“북한 말이야.”
순간 시현은 아주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러자 하정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위쪽은 사실 진작부터 게이트를 클리어할 역량을 잃었어. 개벽이 일어나고 꽤 초반쯤에 폭발 게이트에 평양이 휩쓸렸거든.”
그래, 그랬다. 1인 집권 국가는 머리가 사라지자 뿔뿔이 흩어졌다. 동시에 자꾸만 나타나는 게이트는 계속 방치됐고 결국엔 터져 나와 위, 아래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장 제 나라도 챙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유롭게 받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게이트에서 값비싸고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지만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곳은 여러 나라에서 조금씩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고 상황이 나아지면서 갈가리 찢겨 돌아가면서 게이트를 관리하고 아이템을 쓸어 가는 시스템이 정착됐던 것이다.
“근데 지금 상황은 어때. 각 나라에서 그곳에 클리어하러 올 수 있겠어?”
“그렇다는 건….”
“그래, 지금 절반이나 되는 인력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 있다더라고. 근데 이상해. 위에, 그러니까 중국 쪽이 아니라 터져 나온 몬스터들이 자꾸 우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정확히는 강원도 쪽으로. 천리안을 가진 능력자가 확인한 거니 그건 분명해.”
“너는 그곳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거고?”
“맞아. 방금 네가 한 말들을 대입하면 분명 거기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
무척이나 타당한 추론이었다. 시현 또한 강원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만약 여기서 저들이 벌이는 무언가에 대해 알 수 있다면 상황은 또다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 제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았고.
시현은 망설일 필요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출발하자.”
하정의 말에 의하면 브레이크되어 터져 나온 몬스터들의 무리가 움직이곤 있지만 아직은 강원도에 다다르기 전, 평야에 있는 방어선에 막혀 있다고 했다.
필드전이야 태운과 제게 가장 걸맞은 장소였다. 게다가 태운이 몸에 이상을 느낄 때 피하기에도 좋았다.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정이 잠시 황당하단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금세 세모꼴로 눈을 찌푸리는 바람에 시현은 잠시 움찔하곤 다시 앉았다.
생각해 보니 방금까지 심령을 헤집어 놔 무척 피곤할 텐데 사건을 급변시킬 만한 단서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잠시 배려심이 흐려졌다.
“미안.”
“어휴, 일단 몇 시간만 좀 쉬었다 가자. 도저히 전투에 당장 뛰어들 만한 컨디션은 아니야.”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거 자는 게 가장 좋아. 좀 자 둬.”
시현은 열심히 하정에게 손짓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곤 동시에 태운에게도 전음을 날렸다. 비록 저 혼자 마음이 급해졌던 걸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말을 해 두어야 했다.
[몸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피해. 죽지만 마. 어떻게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가 살릴 테니. 당연히 나도 조심할게.]
태운은 시현의 전음에 잠시 움찔하더니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덥석 시현을 껴안았다.
“좋아요.”
그러니까 하정에게는 태운의 급발진처럼 보인다는 말이었다. 하정은 순간 ‘으….’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몸을 휘돌리고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민망함은 오로지 시현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