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그래도 그동안 길드라는 커다란 단체를 운영하던 이들이었다. 분명 멍청한 놈들은 어디나 있으니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많은 이들이 다 그럴 거란 걸 믿을 수 없었다.
물론 과한 걱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최면을 당한 이들이 레이첼의 무명에서 소요를 벌이고 떠난 사람들처럼 다 떠났을까? 이것 역시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어느 단체든 병신들은 많아. 근데 내가 고작 그 몇 마디에 그렇게 화가 났다고?’
분명 자신은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접한 정신 공격이 먹힐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외의 무언가 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주 미묘하게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긴 했지만,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풀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약한 영향이지만 내가 순간 알지 못했다는 것부터 위험해, 그렇다는 건 결국 사람들의 스킬이 아니라 그 의지라는 것의 영향일 가능성이 커.’
이 근처에는 아직 지하에 뚫린 터널 같은 건 없었다. 만약 그 응집석 조각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이 맞다면 범위를 다시 산정해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태운아.”
그리고 그 전에 고맙다는 말부터였다. 늘 도움받는 처지였기에 입맛은 씁쓸했지만 잘한 것에 대해서는 꼭 감사와 칭찬을 해 주던 게 버릇이 된 시현이었다.
“별말씀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태운이 곧바로 빙긋 웃으며 슬쩍 손을 잡아 오자 시현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아까 하정이 얘기했던 구역을 바라봤다.
규민과 유준이 배정되어 있다는 곳, 그리고 신의 광산과 아주 가까운 전방. 시현은 조금 마른침을 삼키고선 기존 게이트들의 영향이 사라진 마른 땅을 박찼다.
***
가는 날이 장날인 걸까, 아니면 여태 늘 운이 없었던 것일까.
시현은 저 멀리서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는 알파 구역, 신의 광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공간의 경계를 바라보며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경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는 장벽에 시현은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급조된 헌터 부대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여기서 제 경공으로도 5분여는 달려가야 있는 곳에 주둔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거리는 어느 정도 유지한 채 경계를 끼고 달린다고 해도 더 가까이에 있을 부대까지 가기는 상황이 요원해 보였다.
“하, 미치겠네. 진짜 나한테 뭐가 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런 걸 보면 저들이 사용하는 능력과 상반되는 무언가가 자동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태운이 한 말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았다. 시현은 제 능력이 확실하다는 것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후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멀리서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이 정도 소리라면, 대략 5분여 거리쯤에서 들려오는 것일 테다. 시현은 지끈대는 머리를 잡고 이 일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마.’
제 눈앞에 보이는 알파 구역 안쪽으로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안에서 배회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모여서 입씨름하던 멍청이들의 말대로라면 약한, 그러나 거대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먼저 뛰쳐나올 확률도 있다고 했다.
시현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여태까지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리는 시간은 대략 5분.
맞붙은 이들의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 수백 수천이 손쉽게도 죽어 나갈 수 있는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시현은 점점 굳어지는 얼굴에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 순간 입술 끝에 조금 차가운 손끝이 콕 닿았다.
“깨물지 마요.”
“아.”
시현은 그제야 입술을 탁 놓고 슬쩍 태운에게 민망하게 웃어 보였다. 누군가 말려 주지 않으면 정말 피가 비칠 때까지 물어뜯던 시현이었다. 이 습관 또한 태운과 지내면서 많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다시금 정도를 넘어서고 있는 듯했다.
시현은 쓰라린 입술을 슥 닦아 내고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한번 깜빡였다가 다시 부릅떴다. 달리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공기의 압력과 바람에 영향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제 나름대로의 다짐이었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고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실루엣들이 선명해졌을 땐 누가 봐도 개미처럼 생긴 것과 간간이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 이들이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박혀 들어왔다.
‘성안.’
[체액 개미(E) - 생명체의 체액을 주 식량으로 삼는 육식 곤충. 하나의 개체는 약하지만 뭉쳤을 때 방어력이 크게 상승한다. 불에 약하다.]
마음이 급했다. 이 무리의 끝인 이곳에서도 이렇게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니 제일 앞의 상황이 어떨지는 불 보듯 훤한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총 45마리.’
시현은 빠르게 시선을 옮겨 제일 가까운 데에 있는 개미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대형견 크기만 한 개미는 여러 개의 다리에 번들거리는 톱니를 달고 집게 같은 주둥이를 쉼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체액이 흘러나왔는데 풀이나 땅에는 별 이상이 없이 사람의 피부에만 상처를 내는 걸 보면 단백질 같은 걸 분해하는 성분의 체액인 듯했다.
그런 개미들이 최소 4~5마리씩은 모여서 한두 명의 사람을 둘러싸고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외부에서 다른 헌터가 공격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에 찍은 사냥감만 죽어라 공격하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조금은 역겨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역시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검을 뽑아 들고는 가볍게 허공으로 던져올렸다.
‘가라.’
슈아아악-
온통 흰빛을 띠고 있던 검이 허공에 떴다가 내려앉으려는 순간, 중력을 거스르고 아래가 아니라 앞으로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시간이었다. 검은 뒤에 붉은색의 꼬리를 매달고 마치 바느질하듯 45마리의 개미들을 몇 번씩 관통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몇몇 개미들은 펑펑 터져 나갔고 검은색의 반질거리는 표피 조각들과 푸른빛의 체액으로 주변이 엉망이 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의 전투였다면 검로가 지나간 구명 몇 개 남기는 정도로 마무리됐겠지만 두르고 있는 내공의 파괴력을 고작 E급의 몬스터가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으악!”
물론 전투를 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이것이 축복이면서도 괴로운 것이었다. 체액들이 가까이에서 전투 중인 근거리 헌터들을 다 덮을 정도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전투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체액을 뒤덮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덩그러니 서 있던 헌터들, 당장 공격당해 상처를 입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난 헌터들 등등 모두가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모두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지금 자신들이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모두 소리는 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곳 후미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E급의 헌터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F급도 있었을지도 모르고.
시현에게는 손쉬운 일이었을 수도 있으나 저들에게는 정말 목숨을 건 전투였단 뜻이었다.
눈에 보여 급히 끼어든 거였지만 기뻐하는 저들을 보자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현은 이내 고개를 저어 감상을 털어 냈다. 그리고 신나게 개미들을 도륙하고 폭 젖은 채로 돌아온 검을 떨떠름 하게 바라보다가 내공을 발산해 액체들을 모조리 증발시켰다.
이 검을 받고 이렇게 제대로 써 본 건 처음이었는데 이 검은 생긴 것과 다른 게 조금 성격이 이상했다. 좋게 말하면 호방한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살육할 수 있어서 아주 기뻐하는 미친놈 같기도 했다.
명검의 반열쯤에 들면 검이 아무리 물건이래도 주인만 알 수 있는 기운을 내뿜기 마련이었다. 한마디로 나름 주인을 가린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검은 처음 받아 들 때도 거부감 없이 신나서 저를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아 신기했었건만 원래 성격이 좀 이상한 듯싶었다.
‘어쩐지 태운이가 이 검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니….’
시현은 여전히 고고한 척 부드럽게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검을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지금의 생존에 기뻐하는 무리 사이에 가 봤자 별다른 이득이 될 것도 없었다. 이런 간단한 일로 추앙 같은 걸 받을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후미였다. 제가 목표하는 곳은 가장 앞.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가자.”
“예.”
시현은 다시금 경공을 발휘하며 더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알파 구역의 경계가 조금 더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몬스터가 새어 나왔다는 사실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경계가 어찌 될까 봐 망설이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속전속결로 가자.’
시현은 곧이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무리에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달리는 발걸음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로 다시 한번 검이 리드미컬하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