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시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분위기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남은 전투의 소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살벌했다. 시현은 태운의 앞으로 기파를 쏘아내 앞길을 막은 다음 곧바로 땅을 박차고 그보다 더 앞으로 이동했다.
“뭐 하는 거냐고.”
재차 질문을 던져도 레이첼에게서도 태운에게서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시현은 그제야 레이첼과 태운이 제가 모르게 무언가 다른 계획을 세웠구나 깨달았다.
“연태운, 대답 안 해?”
그래, 레이첼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태운마저 저를 속이고 뒤에서 다른 짓을 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 의도야 당연히 자신을 위한 거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문이 막혀서 도저히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축 처진 목소리를 듣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조금 식고 현실감이 물밀듯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연태운은 저렇게 현실에 쉽게 타협하고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웬만한 제안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닐 테다.
대체 뭐가? 뭐 때문에?
“설명해 봐.”
“태운 씨가 꼭 해야만 할 일입니다. 시현 씨도 좋은 결과가 남길 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을 안 하고 결정하냐고!”
그러다가 무덤덤한, 혹은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현은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일의 경중에 따라, 계획에 따라 갈라져서 각자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합류하는 것은 수도 없이 해 본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불길함이 느껴졌다.
오한이 들고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태운을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시현은 레이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흐릿하지 않았다. 다시 태운의 눈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미 제 의견이 들어갈 구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허탈했다.
처음부터 은밀하게 가려 놓은 진실이 있었다. 자신은 또 이득을 취한다고 해 놓고선 순진하게 당한 거다. 힘이 있는 게 다가 아닌데.
태운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신도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 뒤엎고 알 바냐며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태운은 저 원망 어린 눈빛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비록 마음은 매우 아팠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곱씹었다. 자신이 해야 할 진정한 역할, 그것은 에너지원으로서의 희생이었다.
“당신은 시현 씨와 같이 이 차원의 사이클 안에서 속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이 되겠죠.”
“참,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그냥 이 세상에 속하기만 하면 된다 이거냐? 어쩐지 시간대며 뭐며 자세한 조건은 없었던 게 이상했지.”
보통 사람이라면 말의 앞뒤를 파악해 이 문장이 뭘 뜻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시현이 말한 것 또한 보통의 인간이라면 지금처럼 태운과 자신이 함께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것쯤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레이첼에겐, 아니 저 존재에겐 통하지 않았단 말이었다. 평생을, 그리고 죽고 다시 살아나도 항상 이 세계에서 함께할 건데 뭔가 불만이냐는 말에 태운은 이제 어이없음 절반 허탈함 절반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이란 그런 겁니다.”
“어이가 없네. 이 와중에 우리가 등을 돌리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교차점은 지나왔고 선택을 되돌릴 순 없어요. 세상의 흐름은 원래 그렇게 도도하게 흘러간답니다. 그걸 바꿀 수 있는 수단은 없어요. 그건 량차오샤도 마찬가집니다. 특히 당신들이 머물고 싶은 세상이 이쪽이라면 더더욱이요. 저는 진심으로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함께하길 바랐고 방법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세상에 속하려면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박동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멍할 뿐이었다. 그동안 온갖 서책을 봐 오면 배웠던 것. 무공을 위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며 깨달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집착하죠? 어차피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어떨 땐 다시 만나고 또 어떨 땐 새로운 관계를 쌓아 갈 수도 있을 겁니다. 둘의 운명은 질겨요. 그러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설득할 마음도 없었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불쑥 욱하는 심정이 치솟았다. 시현이 자주 욱하기에 티 나지 않았지만, 태운도 한번 욱해 핀트가 나가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시현 씨가 당신의 역할을 해야 하겠군요.”
“…지랄하지 마.”
절로 거친 말이 튀어 나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현은 분명 저를 포기하지 않겠다 약속했지만 제가 저를 위해 에너지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그 약속을 지킬 리 없었다. 그때처럼 또 그렇게 제가 희생하겠다 나설 테지. 천성이란 건 그리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더럽게 꼬였다. 더럽게 걸려들었어. 태운은 태어나서 이렇게 진한 좌절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처음 자신이 태어나서 학대받고 버려졌을 때도, 제 주변을 주무르는 듯한 무언가가 저를 옭아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을 때도, 시현이 그렇게 저를 등지고 사라졌을 때도 분노하고 슬펐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자신은 어떻게든 할 수가 있었을 테니.
하지만 지금은 그냥 허망했다. 대체 여태까지 미친 듯이 달려왔던 건 뭘 위함이었던 것인가.
기다란 침묵이 이어졌다. 레이첼도 그런 태운을 닦달하지 않았다.
“제기랄….”
사실 레이첼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시현이 어느 정도의 수명을 반납하게 될 거고 태운이 힘을 모조리 잃겠지만 희생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보단 세상을 다시 잠가야 한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레이첼은 이 알파 공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질감을 느끼고 생각을 바꿨다. 뭐 때문인지 정확히 할 순 없었지만, 자꾸만 힘이 이 안에 고이는 게 아니라 새어 나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상했다. 이 안으로 신의 광산을 모조리 불러들여 융합하고 통로가 될 공간을 만들려면 내부에는 힘이 가득해야 했는데 말이다. 분명히 이 알파 공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힘 따위는커녕 먼지만큼의 이상함도 내뿜지 못하는 완벽한 보호막이었다. 그렇다는 건 절대 외부 유출 때문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이 중요한 공간을 저렇게 갈기갈기 찢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량차오샤의 태도로 보아 이 안에서의 흐름을 파악하는 수단이 있어 보였고 그렇다는 건 그 유출도 파괴도 다 의도된 것이라는 것.
그것은 시현의 신의 광산에 들어가고 나서 확신이 되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제 의식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의지가 레이첼을 움직였다.
지금 제가 하는 말들은 사실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머리가 멍하고 입을 멈추지 않았다. 괴로움에 치를 떨고 있는 연태운의 얼굴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그러자 쭉 힘이 빠졌다. 마치 잔뜩 긴장하던 몸이 축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레이첼은 띵하게 아파 오는 머리를 잠시 부여잡았다가 고개를 몇 번 털어 내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걸 쓰세요.”
레이첼이 건넨 건 카드 모양의 무언가였다. 앞뒤로 아무 무늬도 없이 하얗기만 한 것을 건네받은 태운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레이첼과 눈을 맞췄다.
“어쩌다 그 아이템이 당신에게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운명인 건지. 이거는 당신이 걸치고 있는 그 방어구를 열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입니다. 당신을 한 번쯤은 지켜 줄 겁니다. 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요.”
방어구라는 말에 순간 의아해졌던 태운은 이제는 꽤 지난, 처음 아이템 거래소에 갔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저절로 제 목을 감고 있는 작은 띠를 매만졌다. 전혀 불편하지도 않고 매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 몇 번 몸이 이상함을 호소할 때마다 꿈틀대긴 했지만 결국 얌전히 장식의 역할만 해 왔던 것. 그리고 시현이 무리를 해서 처음으로 사 주었던 것.
어이없음에 한숨이 푹 튀어나왔다가 이어 커다란 웃음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하아… 진짜로 부처님 손바닥 위에 손오공이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정말 좆같네.”
사면초가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운명이라고 하는 좆같은 무언가가 자꾸 한곳으로 둘을 몰아붙였다. 시현도 그렇겠지만 태운도 시현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러려고 그를 찾아 따라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태운은 짧은 회상을 다시 접어 의식 아래고 밀어 두고선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는 시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더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 봤자 응집석은 다 나한테 있어. 그러니,”
“아뇨, 저한테 있어요.”
“뭐, 아니 언제….”
“스승님이 업히셨을 때였습니다.”
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그나마 처음으로 마음으로 놓고 기대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응집석 주머니를 들어 보이는 태운에 기분은 저 땅끝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너….”
그러나 시현의 말을 끝을 맺지 못했다. 마치 다른 신의 광산이라도 옮겨올 듯 우르릉대며 떨리는 하늘과 이리저리 튀는 번개들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본 현상이기에 헷갈릴 수 없었다. 이건 신의 광산을 옮겨올 때 일어났던 반응과 백 퍼센트 똑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실랑이해 대던 주제였던 숨겨진 공간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의 광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말이다.
“… 6개였던 거야.”
이제 막 몬스터들이 거의 다 스러져 가던 시점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무기를 든 헌터들이 멈춰서서 근처에 있는 봉우리의 끝을 바라봤다.
둥근 면이라곤 없는 오로지 선과 면으로만 만들어진 직육면체의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레이첼과 태운의 시선이 마주치고 뒤이어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안 돼! 태운아!”
비명 같은 외침이 거대한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