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67. 메콩강에 핀 무궁화
3차장과 만났던 다음 날, 김세민은 양 형사가 만들어 준 봉투를 품에 넣고 치안 본부로 들어갔다.
외사국장실은 본부 건물 2층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처음 와 보는군.’
사무실 문 위에 붙은 명패를 보니 본부장실을 비롯해서 푸른색 바탕에 왕별(무궁화 다섯 개가 합친 모양)이 두 개 이상인 사무실만 2층에 배치되어 있었다.
외사국장실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부속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사복을 입은 직원이 4명이나 있었다.
‘가운데 앉은 사람이 부속 주임일 테고, 사무실 비서, 나머지 둘은 수행 비서하고 운전하는 직원이겠지.’
“100호실 근무하는 김세민 경사입니다. 외사국장님 면담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일정에는 없는 것 같던데?”
“서울 시경 제1부국장님께서 한번 찾아뵈라고 하셔서 들렀습니다.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를 하고 다시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면담 시간은 10분입니다.”
“5분도 안 걸릴 겁니다. 차는 준비 안 하셔도 됩니다.”
김세민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배에다 힘을 준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충성! 100호실 근무하는 김세민 경사입니다. 국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경례부터 하고 국장을 보니 창가에 서서 난을 손질하고 있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러더니 고개만 약간 뒤로 돌려 순식간에 김세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자네, 태국에 가려는 이유가 뭐야?”
“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들어온 질문에 김세민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제 안기부 3차장한테 전화를 받기는 받았는데, 이상하잖아. 편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굳이 사고 나서 누워 있는 직원 대타랍시고, 그것도 2개월만 근무 지시를 해 달라니, 자네가 볼 때는 이게 상식적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사고가 난 직원이 현지에서 안기부 직원들과 합동으로 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에 차질을 빚게 될까 봐 급히 인원을 보충한다고 들었습니다.”
“자네도 내막은 잘 모른다? 그래, 굳이 내가 알려고 할 필요도 없겠지. 3차장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인가?”
“네. 안면이 좀 있습니다.”
“알았어. 오늘 중으로 발령 낼 테니 준비해서 내일 출발하게. 가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특이사항 있으면 내게도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명심해, 자넨 안기부 직원이 아니라 경찰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봐.”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경례를 하고 지난번처럼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놓인 신문 밑에다가 밀어 넣는데 접힌 쪽이 아니라 벌어진 쪽으로 넣는 바람에 그만 [샤샥] 하는 소리가 났다.
‘젠장!’
김세민은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느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등 뒤에서 차분한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 길 가려면 고생이 많겠구먼,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게.”
처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 * *
김세민은 부속실을 나오면서 아가씨한테도 봉투 하나를 전달했다.
“이거 약소하지만 부속실 직원들 식사라도 하시죠.”
어제 양 형사가 봉투를 주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부속실에도 반드시 주고 와야 돼요, 그냥 나오면 뒤통수에다 대고 욕을 X나게 합니다. 잊지 마세요!”
과연 양 형사의 말대로였다.
“어머! 김 부장님 감사해요.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김 경사님, 멀리 가시는데 고생하시겠어요.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한테 연락 주세요.”
부속실 아가씨와 부속실장의 진심 어린 인사 외에도 아까 들어올 때 본체만체하던 수행 직원은 일어나서 90도로 인사까지 하였다.
“부디 잘 다녀오십시오.”
“…….”
형사국장이나 수사국장, 정보국장은 워낙 찾아오는 손님이 많으니까 부속실에도 봉투가 생길 일이 많지만, 외사국은 그다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으니 직원들도 배가 고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본부에서 나와 공항에 도착하니 11시였다.
“어이, 김 경사!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은, 태국 주재관으로 발령이 났어! 혹시 알고 있었어?”
‘실장이 저렇게 말이 빠른 줄 처음 알았군.’
다른 직원들도 와서는 김세민에게 이것저것 물어댔다.
“태국에 주재관으로 간다고?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되었잖아!”
“저번에 내가 부탁한 모찌는? 여기는 이제 안 오는 거야?”
대부분 앞으로 모찌는 어떻게 되는지 그게 제일 궁금한 모양이었다.
“저도 갑작스럽게 발령이 난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 보니까 태국 주재관 한 사람이 사고로 입원을 했다네요? 여기는 원체 인원이 남아도니까 외사과에서 땜빵 인원을 무작위로 한 명 뽑았나 봅니다.”
그러자 100호실 최고참인 최문식 경사가 투덜댔다.
“무슨 인사가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태국에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멀쩡히 일 잘하는 사람을 갖다 박아?”
“그러게요, 까라면 까야 되는 게 우리 일 아니겠습니까?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짐 싸서 내일 떠나겠습니다.”
“허, 그것참…….”
다들 김세민을 걱정했다기보다는 앞으로 김세민이 없으면 또 세관 직원들 눈치 보면서 모찌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보스! 잠깐만.”
양 형사가 옆으로 지나가면서 입에다 담배 표시를 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왜? 무슨 일 있어?”
“연락이 왔어요. 저녁 8시 시저스, 다들 모이래요. 올 때는 그라시아 지하를 통해서.”
“알았어.”
“그리고 이거 갖고 가세요.”
“이게 뭔데?”
“출국하시면 작전까지 한 달은 좀 여유가 있잖아요? 들어올 때 갖고 들어오실 것 미리 좀 적어 봤어요. 외교 행낭으로 중간에 한두 번 보내시고 나머지는 들어오실 때 직접 수화물로 갖고 들어오시고.”
“직접 갖고 오라고?”
“왜요? 부장님은 그냥 프리패스잖아요?”
쪽지를 펼쳐 보니 가공 보석에다 진주, 타이산 실크에다 벤츠까지 적혀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난 거기 갔다가 일이 잘못돼서 죽으면 어쩌지 하고 밤새 잠도 못 잤는데, 부사수라는 놈은 그저 따와이 할 궁리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답답해!”
실장이 발령 어쩌고 하면서 요란하게 떠든 덕분에 오후 시간은 꽤나 바쁘게 보냈다.
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하자며 직원들이 모찌를 부탁하는 통에 팔이 다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에이, 씨, 나는 골프 칠 줄도 모르는데 빌어먹을. 남 골프 백 들어주다가 어깨 신경통 생기겠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세요. 봉사하는 거다, 생각하면 얼마나 좋아요? 착한 일 하는 느낌도 나고?”
“얼씨구.”
“그리고 불쌍한 사람 빼먹는 것도 아니고 많이 가진 놈한테 조금 얻어먹는 건데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고요.”
양 형사는 쉴 새 없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하여튼…… 조 양하고 넌 말이 너무 많아.”
* * *
양 형사와 같이 퇴근해서 그라시아 지하를 통해 시저스로 들어갔다.
여느 때처럼 그라시아에는 직원들이 미리 배치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쪽으로!”
연희가 미리 나와 있다가 손님들을 VIP룸으로 안내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이문호 부장 검사가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모였으니 본론만 말하지. 국군 포로 이인수 씨가 탈북을 했어. 어떻게 북한에서 빠져나왔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지금 박 수사관이 하얼빈에서 만나가지고 태국으로 데리고 오는 모양이야. 우리 중에선 김 경사가 내일 태국으로 가서 박 수사관을 돕기로 했고. 오늘 여기 모인 건 바로 그 때문인데, 지난번처럼 힘을 합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김 경사가 혹시 위험에 노출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야. 여기서 우리가 도울 방안을 찾자 이 말이야.”
먼저 박흥식 사장이 말을 꺼냈다.
“저도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제가 직접 다부진 애들을 몇 명 데리고 가서 지원을 할까 생각도 했는데 태국은 너무 정보가 없어요, 길도 모르고. 그래서 일본의 야마구치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야쿠자 말인가?”
“예. 일본 애들은 이미 동남아에 거점을 다 만들었거든요? 일본식 룸살롱이나 매춘, 도박장, 뿐만 아니라 여행사처럼 합법적인 일도 합니다. 또 그런 장소를 관리하기 위해 조직원들이 많이 나가 있고요. 그쪽 루트를 통하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 부장님, 지난번에 일본에서 인사했던 마코토 대표 기억나시지요?”
“예, 기억납니다. 명함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야마구치조의 고문입니다, 상당한 실력자죠. 제가 낮에 통화를 했더니 김 부장님을 도와줄 전문 살수를 한 사람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재일 교포 출신으로 한국말도 능숙하다고 하니 김 부장님한테는 손발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지원이 필요하면 태국 현지의 조직원들을 이용하시면 되고, 안가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다섯 가족이 오면 우선 지낼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구먼, 역시 우리 박 사장이야. 또 다른 얘기 없어? 뭐든지 얘기해 보라고. 지금 박 수사관 혼자서 저렇게 고생하는데 우린 아무 힘이 되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어쩌겠어? 우리는 여기서라도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해야지, 안 그래?”
“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태국의 경찰 영사가 박일도 경감인데, 김 경사 자네 형기대 있을 때 같이 근무하지 않았어?”
정우진 대장이 물어왔다.
“박일도 경감요?”
“그래, 박일도, 자네를 잘 알던데?”
“우리 중대장님이었습니다. 진짜 멋진 분이셨어요.”
“나하고는 대학 동기에 R.T 동기생이지. 간부 후보생은 나보다 1년 늦었어. 내가 단단히 얘기를 했네. 나하고는 누구보다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니까 자네한테도 분명 힘이 될 거야, 뭐든지 부탁하라고. 본인도 3공수여단에서 근무했으니까 자기 몫은 충분히 해낼 거야.”
신 수사관도 말을 보탰다.
“김 부장님이 태국에 도착하시면 일전에 말씀드린, 제가 믿을 수 있는 그 요원이 접촉을 해 올 겁니다. 또 만약에 북한 특무대 애들이 태국까지 넘어오면 여기서도 해외 요원들이 가서 힘을 합칠 것이구요.”
“네, 든든하네요.”
“그리고 김 경사님이 그리 가시는 것은 자리가 임시로 하나 비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빽을 동원해서 따와이를 하기 위해 가는 것처럼 소문을 내었습니다. 가자마자 벤츠를 신형으로 한 대 구입하십시오. 해외 공작금에서 지불될 겁니다. 그 차는 나중에 국내로 들여와서 처분하면 꽤 돈이 되거든요. 진주나 보석 같은 부피가 안 나가는 것도 외교 행낭으로 해서 양 형사한테 보내고 여기서 처분하는 식으로 손발을 맞추면 위장이 될 것입니다.”
김세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거기까지 가서도 따와이 하라고요?”
“어디까지나 위장 근무입니다. 따와이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저녁에는 유흥가에도 자주 출입을 하세요. 그래야 의심의 눈초리가 없어집니다.”
김세민은 한숨을 쉬자 그걸 본 양 형사가 신이 나서 깐족거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이건 위장 공작 업무라고요.”
“……조용히 해.”
신 수사관이 아직 설명할 게 남았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되더라도 절대 중국이나 라오스, 베트남이나 미얀마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거기는 아직 다 공산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 경찰 영사가 허락도 없이 자기네들 국경을 넘었다는 걸 알면 국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럴 일이 있을까요?”
김세민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지도를 보셨겠지만, 지금 박 수사관이 만나자고 연락한 장소는 메콩강 상류입니다. 라오스나 베트남, 태국과 중국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겹치는 장소죠. 현지인들은 여권이나 입 출국 수속 없이 그냥 버스 타고 통과하기도 합니다. 박 수사관도 그런 이점을 노려서 그 장소로 들어오려고 계획을 세웠겠지만 이미 중국 공안이나 북한의 호위 총국에서 나선 상황에 국경에 대한 감시는 예전 같지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장소를 바꿔야 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지금은 우기가 지난 철이라 강물의 유속이 그다지 빠르지 않으니 소형 고무보트를 하나 정도 준비해서 강을 건너면 될 겁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겠군요.”
“아, 김 부장님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작전에 필요한 것은 우리 현지 요원이 다 준비해 줄 겁니다. 다만 원래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데 대놓고 나서질 못하고 김 부장님한테 다 떠맡기는 형국이 되어 그 점이 참으로 면목이 없을 뿐이죠.”
이문호 부장 검사가 신 수사관에게 물었다.
“비상 연락망은 구축을 했나?”
“현지에 있는 우리 직원을 통해서 연락을 하기로 했습니다. 전화는 미국 CIA나 중국이 도청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평문이 아닌 난수표로 암호문을 보낼 테니 김 부장님도 어제 제가 드린 난수표를 보고 되도록이면 암호문을 조합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 더 짚어야 할 건 없지?”
김세민이 손을 들었다.
“이번 작전명은 [메콩강에 핀 무궁화]로 할까 싶은데 다들 의견이 궁금합니다.”
“메콩강에 핀 무궁화라, 그거 괜찮네. 난 찬성이야. 다들 어때?”
“좋습니다.”
“대찬성입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메콩강에 핀 무궁화]의 작전을 개시한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모든 연락은 신 수사관 통해서 하는 걸로 해.”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고. 김 경사도 짐은 꾸려야 할 테니 말이야.”
이문호 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김세민이 차에 타려고 하자 연희가 쫓아왔다.
“내일 가는 거야? 오늘 같이 있으면 안 돼?”
“내일 떠나야 하니까…… 오늘은 가족들한테 얘기도 하고 같이 있어야지. 금세 다녀올 거야. 잘 있어.”
연희의 아쉬운 눈빛을 뒤로하고 다음 날 김세민은 방콕으로 떠나는 타이 항공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