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107. 따와이보다 땅굴 찾기가 우선이다
봉투는 저번과 같이 을밀대가 인쇄되어 있었고, 열어 보니 편지 두 장이 앙증맞게 접혀져 있었다.
김세민은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청마 선생 -
남조선의 시인 청마 선생의 글은 언제 읽어 봐도 마음이 설렙니다.
이영도 여사와의 사랑 얘기는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던 나에게 언제나 위안이 되었더랬지요.
언젠가 조국이 통일되면 청마 선생이 계셨다는 통영여중에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그때 김세민 씨랑 같이 갈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도 합니다.
근데 김세민 씨 생각이 아주 기발 나네요?
창문에 ‘보고 싶다’는 글을 붙일 생각을 다 하다니 말이에요.
난 지난번에 난 화분을 보낸 것으로 인연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서울에 있는 우리 혁명 일꾼들이 보내온 사진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거는 맹탕 돌빡인 안기부 아새끼들 작품은 아닌 것 같고 김세민 씨의 순수한 마음인 것 같아 한 번 더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뒤에서 안기부 아들이 장난질은 치겠지만 이 려민주가 그런데 휩쓸릴 초짜도 아니고, 그러나 김세민 씨의 진정성은 조금 느껴집니다.
난 다음 주에 북경에 갑니다.
남조선도 다음 주부터 무역 대표부를 연다면서요?
뭐, 난 그쪽 형편을 잘 모르니 북경으로 올 수 있다면 절 만나실 수 있습니다.
북경에 도착하면 내가 연락드리지요.
평양에서 려민주가 씀.]
김세민은 깜짝 놀라서 두 번을 더 읽어 보고서야 려민주가 직접 손으로 쓴 편지임을 확신을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윤정학 수사관한테 전화를 돌렸다.
뚜르르륵! 뚜르르륵! 철컥!
“에이스 통신입니다.”
상냥한 여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청담경찰서 김세민 경위입니다. 윤정학 수사관님 부탁합니다.”
“기다리세요.”
“네. 윤정학입니다.”
“김세민입니다. 방금 편지를 받았습니다. 려민주가 직접 쓴 편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진짜로 북에서 편지가 왔습니까?”
“네. 근데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북에서 온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니요?”
“겉봉에 에이스 통신이 발신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에? 여기가 노출이 되었다고요?”
“그런 것 같네요.”
“일단 제가 지금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어디 안 나가실 거죠?”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안기부 3차장실.
대북관련 국장급들과 팀장들이 다 모였다.
편지를 다 읽고 난 3차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하이고, 진짜 쪽팔린다! 야, 이 X신 새끼들아! 뭐가 어쩌고 어째? 니들 말대로 거기에 안가 설치하는 데 돈이 10억이나 들어갔다고! 근데 이거 북한에 있는 려민주가 벌써 다 알고 있잖아? 그러니 우리 엿 먹어라 하고 너들 안가 주소로 발신인 적어서 보낸 거잖아? 뭐? 맹탕 돌빡! 야, 이거 사람 돌아 버리겠네! 돌빡은 너들이 돌빡이지. 왜 나까지 새파랗게 젊은 년한테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데? 응? 이 새끼들아! 가만있지만 말고 뭐라도 얘기를 좀 해! 부장님한테 이제 내가 뭐라고 보고를 해야 돼? 응? 이 미친 새끼들아! 수십억이나 들인 안가 시설이 교통 순사들이 따와이 한다고 들락거리지를 않나, 이제는 북한에서도 다 알고 우릴 조롱하고 있으니 싹 다 때려치워! 온 천지가 다 아는 곳이 무슨 안가야? 안가가!”
“차장님! 이제 그만 진정하시고, 그래도 성과는 있지 않았습니까? 려민주가 김세민을 만나겠다고 했으니 이제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대공1국장이 중재에 나섰다.
“근데 정말 제5땅굴이 존재하긴 하나 봅니다. 여기 평양 창광우체국 소인을 보면 그저께 날짜입니다. 강남에 있는 고첩이 김세민의 창문에 붙인 글을 사진을 찍어서 평양에 전송을 했고 려민주가 그저께 바로 편지를 썼으면 하루 만에 서울에 와서 강남 우체국에서 편지를 등기 속달로 보냈으니 기가 막힙니다. 땅굴이 완벽하게 작동하는가 봅니다.”
분석실장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꺼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 지랄을 하고 있나? 야! 이 X신들아! 이제 내가 어떻게 부장님께 이걸 보고하느냐고? 내가 쪽이 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야! 윤정학이!”
“네.”
“너 이 새끼! 강남에 설치고 다니는 고첩 말이야, 안 잡는 거야? 못 잡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부터는 김세민이한테 24시간 감시 조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대공3국에서 정예 요원들을 좀 차출해야겠습니다. 3중 미행 감시를 붙일 생각입니다.”
“뭐가 3중인데?”
대공 3국장이 자기네 요원을 차출한다는 말에 불만이 가득 담긴 소리를 뱉었다.
“먼저 김세민이 뒤를 1개 조가 미행을 합니다. 그다음 북한의 감시조가 당연히 따라붙을 것을 예상하고 그 뒤를 또 우리 그림자 요원들이 감시조로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감시조를 잡을 생각입니다.”
“김세민이를? 북경에는 어떻게 보낼 거야?”
3차장이 조금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지금 일단은 무역 대표부에 상공부 직원들하고 외교부 직원들이 나가 있는데 우리도 1처에서 요원들이 차출이 되었습니다. 경찰 주재관 요원을 먼저 선발을 하고 김세민이는 보좌하는 역으로 임시로 딸려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윤 수사관이 제법 이제는 진정을 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경찰에서 희망자가 있어?”
“이거는 희망자가 아니라 김세민이 하고 호흡이 맞는 사람을 선발해야 합니다. 저번에 울산 데모사태에서 공을 세워 진급한 현 공항경찰대장 정우진 경정이 계급도 적당하고 7공수 여단 출신이라 깡다구도 있고 적임인 것 같습니다. 김세민이하고는 공항에서도 잘 지냈기 때문에 같이 가라고 하면 별말 안 할 것입니다.”
“그럼 윤정학이 너도 다음 주에 북경으로 넘어가! 요원들 다 데리고 가! X발, 북경에서 남북이 다시 첩보전을 하든 총질을 하든 어떻게든 제5땅굴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고!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지금 대한민국이 북한한테 먹히느냐, 살아남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북경 가서 정 안 되면 려민주를 납치라도 해 와!”
3차장이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 * *
오늘은 원 경사 조가 근무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하니 벌써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원포의 목소리가 들렸다.
“캬! 생각을 해 보라고! 따와이 하러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총을 빼 드니까 나도 순식간에 놀라서 쌍권총을 빼 들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원포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순간 김세민이 나타났다.
“자, 거기까지만 하십시다. 보안 유지인 거 아시죠?”
“아이쿠! 계장님은 어디서 그렇게 뒤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그림자 무사처럼 나타나십니까? 놀라 죽을 뻔했습니다.”
“으하하하! 껄껄껄!”
다들 아침부터 즐거운 모양이다.
교통계는 언제나 분위기는 좋았다.
‘다른 부서에 비해서 용돈이 생겨서 그런가?’
김세민이 보기에도 직원들 간에 싸우고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오운장이! 어제 배 볼록하게 먹었으면 빨리 모닝커피 사고 얼른 얼른 사라져라. 우리도 오늘 한번 배 볼록하게 먹어 보자.”
원포의 너스레가 끝이 없다.
오 경사가 전화를 들었다.
“아, 거기 카사블랑카죠? 여기 교통 지도계 술탄 모닝커피로 30잔! 아, 우리 계장님하고 과장님은 샌드위치 추가!”
“야, 오운장이! 우리 입은 입도 아니냐? 우리도 샌드위치 한번 먹어 보자.”
원 경사가 계속 시비를 걸어 왔다.
“당신들은 집에 가서 먹으라고. 모닝커피에도 어제부터는 토스트가 서비스로 나오니까 그걸로 때워! 킥킥킥!”
그때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김세민을 보고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충성! 상황실 경사 조인철! 용무 있어 왔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지휘관도 아닌데 충성 구호를 붙입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김세민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경례를 붙이는 상황실의 조 경사의 의도가 궁금했다.
“야! 조S(경사 계급)! 너 아침마다 여기 나타나서 계장님한테 아부하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해? 빨리 이실직고 안 할래?”
원 경사가 농담같이 몰아세웠다.
“아닙니다. 저도 오늘 근무 들어가니까 여기 내려와서 계장님한테 근무 신고하고 그 술탄커피 그거 한잔 얻어먹으려고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요. 이리 앉아요. 커피 한잔 같이 마시고 우리 또 하루 잘 지내봅시다.”
김세민은 조 경사의 의도가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다른 뜻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계장님! 여기 조 경사는 전경대만 있었기 때문에 일선에 나와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계장님이 대단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계장님한테 줄 서려고 이리 아부하는 것입니다. 조S! 너 나중에 우리 밀어내고 외감 하려고 지금 계장님한테 아부하는 거지? 내 말 맞지? 서장님한테 줄 댈 형편은 안 되고 만만한 계장님한테 충성해서 외감 자리라도 꿰차려고, 네 속셈 다 안다. 그래, 조 경사 너 생각 잘했다. 우리 계장님 잘 모시고 평생 따라다니면 너 나중에 경찰서장은 한자리 할 거다. 그러니 그 마음 배신하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잘 모셔라.”
오 경사가 조 경사의 속마음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교통정리를 해 버렸다.
김세민이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하자, 조 경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 경사 말이 맞습니다. 전 고향도 서울이 아니고 제주도에서 전경대 기간요원으로만 3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계장님하고 무전으로만 알게 되었지만 제가 앞으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절 버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데 저런 말을 하기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터인데 다들 조직에서 살아남기가 치열한 것 같았다.
그때 밖이 시끌시끌해지더니 연우가 나타났다.
“짠! 다들 많이 기다리셨죠? 요거 모닝은 토스트를 맛있게 굽는다고 시간이 좀 걸렸어요. 우리 오라버니부터 한잔 드리고 히힛! 과장님실에 다녀올게요!”
경찰서 뒤에서 커피숍을 열고 나서는 연우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다 없어진 것 같아서 김세민은 마음이 너무 좋았다.
“아니, 근데 오 경사, 우리 사람도 몇 안 되는데 웬 커피를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에이, 그거는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교통계는 1층에 있지 않습니까? 바로 건너편에 민원실도 있고, 민원실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만 매일 커피 마시고 웃고 떠들면 저 사람들도 사람인데 배가 아프다고요. 그러니 오고 가는 사람 다 커피 한잔하라는 거죠. 상황실 조 경사 같은 사람은 매일 내려와서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게 좋은 겁니다. 뭐 시골에 잔칫집 이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 경사의 생각이 깊고 넓었다.
역시 민원 부서를 오래 다녀본 역전의 명장 같은 말투였다.
적을 만들지 않고 두루두루 모든 사람하고 잘 지내는 것, 그것이 민원 부서 장수 근무의 비결이었다.
저녁에 원 경사 조가 음주 단속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김세민은 일찍 퇴근하겠다고 말했다.
“캬! 오늘 금요일이라서 물때가 좋은데 그럼 먼저 들어가시고 좋은 거 하나 골라 놨다가 교육 잘 시켜서 내일 계장님 찾아오도록 작품 하나 만들어 놓겠습니다. 변 수경! 계장님 서까지 모셔다드리고 다시 와!”
“넵! 계장님 가시죠.”
“그래, 가자.”
오늘은 서초와의 경계지점에서 단속을 시작한 터라 신석동 유흥가를 지나서 가고 있는데 언뜻 김세민의 눈에 수상한 차량이 들어왔다.
“변 수경 차 돌려 봐! 아까 지나온 골목으로 다시 가 보자. 경광등은 끄고! 기분이 이상해.”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골목을 지나가니 막 승합차 한 대가 술에 취한 젊은 여인을 부축해서 차에 태우려고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술은 취했으나 약간의 의식은 있는 듯 차에 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다.
“저기다! 저기야! 저기 앞에다 차 세워라. 상황실에다 무전 날리고! 납치 의심 차량이니 차량 번호 수배하고 형사계와 전 파출소 순마들 출동시켜라. 빨리! 급하다!”
“네! 종실! 여기 181.”
“여기 종실!”
“납치 의심 거마(차량)발견, 날 때(시간)는 잠잠전(조금전)날 때 사팔(장소)은 신석타(신석동 사거리) 영진 약국 뒤 골목, 지금 미스물이 혼자서 추격 중, 파인집(파출소)순마 지원 바람. 형사 다이알(형사 기동대)도 지원 바람. 납치의심 거마번호 서울8나 가나다라할 때 나. 칠팔오하나.”
“아, 칠팔 칠팔!”
김세민은 차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승합차를 뒤쫓아 갔다.
큰길로 나가기 전에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빠져 나가서 큰길로 합류하려던 승합차가 큰길에서 다시 골목으로 들어오려는 승용차와 정면으로 다시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승합차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야! 빨리 차 빼! 차 안 빼? 죽고 싶어?”
그 순간 김세민은 승합차의 옆문을 열려고 힘을 주었으나 안에서 잠겨 있었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간 김세민은 길에 떨어진 벽돌을 들어 승합차 유리창을 깨었다.
‘와장창! 쨍그렁!’
“뭐야! 이거는? 이 X발 놈이! 어떤 새끼야?”
김세민은 다짜고짜 욕을 하는 놈의 면상을 벽돌로 찍어 버렸다.
“아이쿠야! 아욱~!”
“다 내려! 내려! 이 새끼들아! 나 경찰이야!”
소리침과 동시에 운전석에 깨진 창문을 넘어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풀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아가씨, 빨리 내려요! 이 새끼들 납치범들입니다!”
“에이, 이 미친놈이!”
승합차에서 야구 방망이를 든 사내 3명이 잇따라 내리더니 차를 돌아서 김세민에게 다가가서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 뒤에서 날아온 짱돌에 머리가 터졌다.
‘빡.’
“어이쿠! 아이 X발, 언놈이야?”
뒤로 돌아서는데 ‘휙! 휙! 휙!’ 하는 바람 소리가 서너 번 들리더니 ‘퍽! 파팍! 컥!’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순식간에 세 놈이 그만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강 동무! 빨리 갑시다!”
김세민은 ‘동무’라는 소리에 놀라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는 납치범 일행이 나뒹굴고 있고 벌써 저 멀리 골목 끝으로 두 사람의 사내가 뛰어가고 있었다.
김세민을 위기에서 구한 남자들은 려민주의 지시로 김세민의 뒤를 24시간 감시하던 북한군 6군단 소속 해상저격여단의 리명호 상위와 강철 특무 상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