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119. 이번에는 미국으로
저녁에 퇴근을 하고 오랜만에 그라시아에서 연희와 식사를 함께했다.
“오늘은 뭔 바람이 부셨대? 밥 먹자는 소리를 다 하고?”
“에이, 그렇게 됐어. 뭐 곧 떠날 자리인데도 이상하게 일이 많아. 다들 날 거기 계속 있을 사람처럼 대해 주니 고맙기도 하지만 막상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네.”
“그거는 이제 오라버니의 그릇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지. 이제 갈수록 더 주위에 사람들이 모일 텐데 잘 가려서 오라버니 사람으로 만들어. 안 그럼 주위 사람들 때문에 다칠 수도 있다?”
“야, 이제 보니 연희, 너 세상 사는 이치를 훤하게 꿰고 있네. 앞으로는 네 코치를 받아야겠어. 난 경찰서 들어갈 때 정문에서 하는 경례 받는 것도 아직은 이상해. 내가 그 정도로 높아졌나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야.”
“그나저나 왜 1차장이 오라버니를 찾는데? 난 괜히 그 사람들이 오면 불안해. 늘 뭔가 일을 만들잖아?”
“그게 그 사람들 하는 일인데 어떡하겠어? 다들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데 안 하겠다고 뒤로 내뺄 수도 없고 안기부 일이나 경찰 일이 모두 국가를 위한 것이잖아? 도리에 맞으면 거절할 수가 없지. 나도 제발 이번에는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1차장 강인식은 반백의 머리칼에 조용한 성품이었지만 언제나 날카로운 칼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3차장에 비해서는 온화한 성품으로 평소에도 부하들에게 쌍욕을 퍼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하게 사람을 조여 오는 그런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었다.
해외 생활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매너는 신사였다.
먼저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1차장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윤정학이를 우리 1처에 데리고 온 것은 김 주임하고의 공작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이네. 다들 알다시피 려민주와 정태호가 미국의 손에 넘어간 이후로 우리는 대북 정보에 있어 아무것도 몰라. 오히려 미국에 물어보고 있는 실정이야. 전에는 미국이 우리한테 협조를 구하고 했는데 이제는 완전 정반대야. CIA가 우리한테 아무것도 협조를 구하는 게 없어. 이게 다 뭣 때문이겠어? 려민주란 대어를 가져간 대가야. 우린 이제 해외에서의 대북 정보에 대해서는 완전 깜깜이가 되어 버렸다고.”
“그거야 우리 정부에서 자초한 일 아닙니까? 려민주의 귀순을 북한의 눈치를 본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 사달이 난 것 아닙니까?”
김세민이 할 말은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되받았다.
“그 말은 맞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그치만 대국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지금 려민주는 CIA의 자문관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것 같네. 아직 북한의 해외 공작 거점을 불지 않았다는 방증이 여기 있네.”
그러면서 1차장은 중국 통신이 촬영했다는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김일성의 두 번째 좌측에 있는 백발의 노인이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군복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바로 실각되었다는 려민주의 아버지 려창성 차수야. 호위총국장에서는 밀려났지만 여전히 김일성의 옆자리를 차지할 만큼 실세이지. 아니 김정일에 의해 밀려났다가 다시 복권했다는 표현이 맞겠지. 아님 려민주가 아버지의 복권을 조건으로 북한의 해외 공작 거점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든지 말이야.”
“그 정도면 일급비밀일 텐데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세민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있지. 아주 중대한 이유가 있어. 자네가 려민주를 좀 만나 줘야겠어.”
“네? 전 이제 그 문제는 다 끝난 걸로 아는데요? 게다가 려민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틀림없이 미국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을 텐데 무슨 수로 제가 만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전 이제 안기부 일에는 손을 떼고 싶습니다.”
김세민은 이제 태도를 분명히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온화하던 1차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럼 내 하나만 묻지. 원자력 병원에서 정태호를 미국 대사관에 빼돌린 게 자네 둘이 한 짓이 아닌가? 내가 암만 생각해도 북한의 요원들이 그새 내려와서 병원에서 사람을 빼돌려 미국 대사관으로 보냈다? 이해가 안 되더라고. 근데 바보같이 안보 수석이나 2차장은 자신들이 벌여 논 일이 있어서 그런지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을 안 하더라고, 자, 지나간 일이니 한번 얘기해 봐. 윤정학이 자네가 여기 김 주임하고 벌인 일이지?”
윤정학이 당황해서 김세민을 쳐다보았다.
“그건 제가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낮에 낯선 사람이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이 암호명 ‘흑룡강’으로 강남에서 저의 동향을 매일 려민주한테 보고를 해 온 고첩인데 자신의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겠다고 했습니다. 려민주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흑룡강’ 세포 조직에 대해서는 가족들도 미리 남한으로 다 보내 주고 마지막에 자신과의 매일 통신이 차단되면 바로 저한테 연락을 하고 잠적해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도 좋다는 지령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려민주의 일본에서의 마지막 위치도 알려 주었고요, 자신이 사용하던 간첩 장비를 모두 제게 보내 주고 잠적을 했습니다. 근데 마지막 밀명 중에 하나가 원자력 병원에 입원한 정태호를 탈출시켜 미 대사관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려민주는 이 모든 결과를 다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럴 것입니다. 제가 북경에서 한국으로의 귀순을 권유했을 때도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려민주는 미국행을 원했습니다.”
윤정학 수사관도 한마디 했다.
“그건 김 주임 말이 맞습니다. 저는 당시에 안가에만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몰랐습니다. 미국 대사관에는 려민주의 일본 내 마지막 위치를 김 주임이 맥칼라 영사한테 알렸고, 일본에 있는 미국 CIA 요원들이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려민주가 남겨 둔 고첩들이 마지막 려민주의 지령을 수행한 것이고요.”
“그러면 앞뒤는 맞지만 뭔가 석연치 않아. 내가 얼마 전 맥칼라를 만났는데 말이야.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내가 요새 북한의 해외 정보가 없어 죽겠다고 려민주한테 뭐라도 얻는 것 있으면 좀 공유하자고 했더니, 왜 김세민이란 훌륭한 자원이 있는데 엉뚱하게 돌아서 우리한테서 찾느냐고 이러더란 말이야. 덧붙여서 이런 말도 했어. ‘김세민이는 당신네 요원 열 명보다도 더 뛰어나다.’ 그렇게 말이야.”
“정말로 맥칼라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글쎄 그렇다니까.”
“그건 맥칼라가 우리를 혼란시키려고 떠보는 소리입니다.”
김세민이 더 이상 개입하기 싫어서 단정적으로 말을 잘랐다.
“그렇지가 않아 이번에 려민주가 미국에 북한의 20달러 위조 동판을 가져다줬는데 미국에서 그 동판으로 돈을 인쇄해 보니 똑같았다는 거야. 그런데 려민주가 위조 달러를 어떻게 융통시키는지는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모양이야. 자기 아버지를 미국에 데려와야 협조하겠다고 했대. 미국이 지금 바짝 몸이 달았지. 려민주의 가치가 그만치 높아졌다는 뜻이지. 려민주는 미국이 자기 아버지를 데려오지 못하면 더 이상 협조해 줄 수 없다고 버티는 모양이더라고, 근데 우리는 곧 중국과 수교를 앞두고 중국 내 북한의 위장 회사나 거점이 어딘지 아무것도 몰라. 전 세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국 내 북한의 활동 거점 정도는 알아야 우리도 대처할 수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자네의 동의 없이 부장님 승인을 받아 작전 계획을 수립했네.”
“네에? 또 작전이요? 지금 베이징에 가 있는 정우진 경정도 저 때문에 짱깨들 틈에 산다고 얼마나 절 원망하는데 또 무슨 작전입니까?”
김세민은 두 손을 들어 휘저었다.
“자네들 경찰관 직무 집행법에도 보니까 경찰의 임무 중에는 대간첩 작전이 포함되어 있더군. 그러니 이거는 자네도 경찰관인 이상 따라야 하는 의무일세.”
“그렇지만 려민주가 간첩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이 작전이 하기 싫으면 경찰 옷을 벗고 나가야 할 걸세. 대신 이 작전을 잘 수행해 내면 그에 상응한 대가는 충분히 주기로 하지. 여기 윤정학이가 증인이야.”
‘야, 이 사람들 정말 무자비한 사람들이네. 1차장도 믿지 말라던 박 수사관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미국으로 건너가게.”
“네? 미국이요? 전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데 미국엘 가면 완전 까막눈인데.”
“걱정할 거 없네. 자네는 잘해 낼 거야. 려민주만 만나면 되니까 영어는 몰라도 돼. 일단 자연스럽게 해야 하니까 이번에 기동대 간다고 그랬지? 내가 확인해 보니까 경찰 학교 교관도 기동대 순위에 포함시켜 준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교관 요원을 지원해서 부평에 경찰 학교에 가 있으면 곧 해가 바뀌면 경찰청 승격과 맞물려서 미국의 FBI와 자매결연을 맺을 거야. 그러면서 FBI에 위탁 교육 프로그램이 생기고 지원자를 모집할 거야. 6개월 코스를 만들었으니까 그걸 지원하도록 하게. 부국장이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교관 생활 1년 중에 6개월을 미국 가서 견문이나 넓히고 온다고 생각하고 FBI 구경도 하고 갔다 오게. 이건 뭐 교육 성적 이런 것 하고도 상관이 없으니까 그저 가 있다가 혹시 려민주가 연락을 해 오면 만나서 중국 내 북한의 공작 거점을 파악해서 우리한테 알려 주면 자네 임무는 끝이야. 나머지는 자네 맘대로 해도 돼. 미국에서 려민주와 결혼을 하든 뭘 해도 아무 상관도 안 할 테니 그것만 도와주게. 북한의 움직임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고 중국에 가는 우리 요원들이 반드시 희생될 거야. 사람 살린다고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해 줘야 하네.”
“근데 제가 간다고 려민주가 제게 연락을 해 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홍보를 할 거야. 교민 신문이나 소식지에 이번에 한국에서 경찰관이 사상 최초로 FBI 교육을 받으러 왔다, 이거를 보스턴 지방 미국 신문에도 인터뷰 형식으로 내면 반드시 연락이 올 거야. 또 맥칼라를 통해서 CIA에서 려민주의 두 번째 사랑이니까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내가 요구를 강하게 할 거야.”
“네? 두 번째 사랑이요? 그건 려민주 저 혼자 하는 소리인데?”
“왜 자네는 려민주가 싫나? 똑똑하고 돈도 많고 이쁘잖아?”
“전 한 번도 려민주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아, 안다고. 여기 서 마담과 깊은 사이라는 거 다 알아. 하지만 어떡하겠나? 국가가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데 거부할 텐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김세민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근데 의문은 남았다.
“아직까지 북한의 해외 공작 거점이 남아 있을까요? 려민주가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당연히 전부 없애는 게 원칙 아닌가요?”
“그게 그렇게 쉽게 없앨 수가 없네. 비밀 안가 같은 거야 쉽게 정리하면 되겠지. 그러나 합법적인 사업이 꽤 될 거야. 김일성 일가를 위한 외화벌이 사업 같은 것은 겉으로는 합법적이니까 쉽게 없애지 못하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려민주만 아는 거점이야. 이거는 북한 당국도 현재 당황스러울 거야. 예컨대 만약에 려민주가 김일성의 통치 자금을 관리했다면 이거는 려민주 아니면 그 돈을 못 찾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특히 스위스은행에 돈이 들어가 있으면 더더욱 그렇겠지. 김일성이 스위스에 갈 수도 없을 거고 틀림없이 려민주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을 텐데 스위스는 본인 외는 어떤 경우에도 확인도 인출도 안 되거든. 만약에 려민주가 김일성의 금고지기까지 했다고 가정하면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대어를 눈앞에 두고 애가 타들어 가겠지. 북한은 북한대로 려민주 아버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복권시켜 놓고 어정쩡하게 놔두고 있는 것이겠지. 아마 려민주가 천문학적인 돈을 쥐고 망명을 했을 거야. 미국도 김 주임이 미국에 와서 려민주의 입을 열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거야. 내심은 말이지.”
“일단은 지금 승진 시험 공고가 났기 때문에 한 달 반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생각을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김세민이 할 수 없이 승낙을 하자 1차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 달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으로 떠나야 하네.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 정보기관은 모든 정보 요원들이 역할을 담당할 수가 없어. 우리 임무 수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서 원하고자 하는 임무를 하도록 설득시키는 것 그것도 우리의 중요한 역할일세. 김 주임 자네는 지금의 어려운 시국에 가장 그 일을 잘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선택이 된 거야. 부디 국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네.”
참으로 말은 번지르르하게 한다 싶었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셈에도 국가 운운하면서 경찰 옷을 벗긴다고 하는 데야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실제 윤 수사관 말을 들어 보면 안기부 내에는 검사들이나 경찰관들도 많이 파견을 나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국내 파트에서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들 동향 보고나 하고, 검사들은 공안부에서 파견 나와 좌경 의식화된 근로자나 학생들을 조사해서 기소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 김 주임처럼 직접 해외 공작에 투입되는 경우는 자기도 처음 봤다고 털어놓았다.
1차장과 윤 수사관을 차에 태워서 배웅하고 멍하니 서 있으니 누군가 다가와서 살며시 손을 잡았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오라버니 오늘도 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 이번에는 미국으로 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