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22. 전별금
오후에 동생 연희가 봉투를 두 개 만들어 주고 갔다.
봉투 두께가 너무 커서 평소 들고 다니던 교양 노트 대신에 1호 대 봉투에 넣어 감싸 쥐고 마음속으로 몇 번 예행연습을 하였다.
그러고는 상황실에 올라갔다.
“어! 계장님이! 충성!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아이고, 조 부장님! 이거 왜 이러세요? 옆방에 서장님 계시는데 안 그래도 경찰서에 서장이 둘이냐고 하시는데 자꾸 그러시면 제가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무전 잠시 쓰겠습니다.”
“예!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습니까?”
“아니, 됐습니다. 181! 여기 미 스물!”
“여기 181입니다.”
“아, 명인집에 솔둘(용무)이 종다(있다)하니까 날 때(시간) 1700도(시간)까지 미인집(경찰서) 종셋(도착) 미스물과 열두시(만나자).”
“아, 칠팔 했습니다.”
“아니, 그런 거는 그냥 저한테 전화하셔서 지시하시면 제가 앞으로는 다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제가 해야죠. 근데 저번에 얼핏 들으니까 외감 소리를 하던데 이번 승진 시험 끝나면 여기서 나가게 되나요?”
“예, 서울 시경에 근무하려고 제주도에서 3년을 X뺑이 쳤습니다. 서울에 오니 또 경비 부서인 상황실에다 집어넣더라고요. 이제 귀양살이 해방되는데 가만있으면 또 경비계나 이런데 갈 것 같아서 전 높은 사람 갖다줄 돈도 없고, 그래서 계장님이 늘 가까이 계시니까 한번 부탁드려 보는 겁니다. 저도 여기 청담에서 교통 외감 한번 할 수가 없겠습니까?”
“글쎄?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한번 밀어 보겠지만 나도 이번에는 기동대를 들어가니까 내가 먼저 발령이 난단 말이죠. 만약에 우리 서장님이 이번에 발령이 안 나고 계시면 제가 가기 전에 서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지금 원 경사는 아직 1년이 안 되었지만 오 경사는 2년을 했으니 어차피 발령이 나야겠지요. 오 경사 후임으로 제가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하이고, 계장님 말씀만 들어도 정말 백골난망이옵니다. 그리만 해 주신다면 제가 평생을 바쳐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을 것입니다.”
평일 낮에 상황실은 당직자들도 없고 상황실 전종 요원들과 의경 둘뿐인데 의경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 경사는 그 자리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니, 아니. 이러지 마시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도 없고 그냥 말 한번 해 주겠다는 것뿐인데 너무 그러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집니다. 차차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해 보십시다.”
“저는 순경 때 경남에 발령받아서 시골 경찰서만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경사 진급을 해야겠다 싶어서 전경대 기간요원 3년 조건부로 제주도를 갔는데 망망대해에 파도치는 것만 보면서 전경 애들하고 족구나 하면서 3년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근데 제가 모시던 전경대장이 경감인데 이분이 서울에서 오셨습니다. 승진을 해서 왔는데 이분이 서울서 근무할 때 아시던 분들이 주말이나 휴가철마다 위문 공연을 오는데 우리가 볼 때는 서울에 근무하면 다 저런가 싶어서 다들 나갈 때는 서울 가려고 난리였죠. 근데 서울에 여섯 명이 지원했는데 두 사람만 서울에 왔습니다. 오자마자 전 또 여기 상황실 근무이고 같이 온 사람은 파출소로 나갔지요. 저도 민원 부서라는 데서 한번 근무해 보고 싶습니다.”
조 경사의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살벌한 사회에서 경찰 조직에 아무 연줄 없이 들어와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는 김세민 자신 역시 처음에 다 겪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싶어 조 경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오후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시경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이제는 익숙한 부국장 부속실에 들어가면서 먼저 거수경례를 했다.
“어머, 김 주임님!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기다리고 계세요.”
다들 살갑게 맞아 주었다.
“이거는 같이 식사라도 하시고 자주 못 찾아뵈어서 송구합니다.”
하면서 부속실에 먼저 봉투를 건네니 다들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여기가 보기는 그럴듯해 보여도 이렇게 김 주임님처럼 올 때마다 부속실을 챙겨 주는 분들은 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승진해서 오시는 분은 저희들이 봐서 말씀을 드릴 테니 조용할 때 와서 인사라도 드리고 가시지요.”
김세민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부속실에서 먼저 새로 오는 부국장한테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양 형사, 이 녀석 이런 방면에서 머리는 천부적이었다.
한 번도 예측을 빗나가는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금세 나올 테니 차는 필요 없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 권 양이 차를 준비한다고 부산 떨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똑똑!’
“네, 들어오시오!”
부국장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충성! 경위 김세민! 부국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어! 김 주임 어서 오게! 안 그래도 내려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봐야지 했는데 잘 왔어. 어야! 권 양아! 차 한잔 내오거라!”
“차는 밖에서 기다리면서 먼저 마셨습니다. 멀리 내려가서 고생하실 텐데 이거 차비하시라고 좀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봉투를 꺼내 신문 밑에 넣고 돌아서는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번번이 고맙네. 내려가더라도 뭐 어려운 일 있으면 자주 연락 주고 휴가 때 부산에 한번 내려오라고, 내 딴 건 못해도 해운대에 좋은 호텔이라도 잡아 줄 테니 가족들 데리고 와서 쉬었다 가라고.”
다시 돌아서서 경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몸 건강하시고 다시 모시게 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자네도 건강하게 잘 지내게. 아, 참, 자네는 이번에 내가 경찰 학교로 보내 주라고 인사 계장한테 얘기를 해 놨네. 안기부에서도 자넬 미국에 무슨 FBI 교육을 보낸다고 하던데 미국 가서도 몸조심하고 연락 주게.”
“네, 감사합니다. 국장님!”
국장으로 승진을 했으니 승진한 계급을 붙여 불러 주었다.
“어헛헛허허! 국장이라! 자네가 처음 불러 주었군. 그래, 듣기 좋아! 국장이라! 허허.”
저녁에는 역삼파출소 선진 질서 추진 위원회와 녹색 어머니 연합 창립 발기식에 참석을 했다.
인원은 양쪽 다 해서 30명이었다.
여기 강남은 새로 생기는 도시다 보니까 다들 나이가 젊어 보였다.
이미 도가니탕 집은 홀만 일반 손님들을 받고 안쪽의 내실에는 벽에 플래카드도 붙이고 제법 그럴싸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저기 오시네!”
김세민이 늦어서 조바심에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리던 역삼 파출소장이 김세민이 차에서 내리자 무척 반가운 얼굴을 했다.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경에서 회의가 늦게 끝이 났습니다.”
부국장실에 갔다 온 것을 회의 핑계를 대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막 회의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자, 어서 들어가시죠?”
파출소장을 따라서 내실로 들어가자 서른 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김세민을 쳐다본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번에 역삼 선진 질서 회장으로 선출된 전일수올습니다.”
“교통 계장 김세민이라고 합니다.”
“자, 우리 회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회원님들! 우리 교통 계장님은 대단한 분이 오셨습니다. 저기 옆에 탄천 면허 시험장에도 계셨고 공항 100호실이나 태국 대사관에도 근무하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중요 범인 검거로 특진하여 순경에서 가장 빠르게 경위까지 진급하셨습니다. 그런 훌륭한 계장님을 모셨으니까 자, 박수로 환영합시다.”
“와아~ 짝짝짝!”
다들 진심으로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한 사람씩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고 하는데 한 사람이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어! 김 과장! 여기는 어쩐 일이야?”
판교 냉동 창고의 김병수 과장이었다.
“네, 형님. 여기 선릉 옆의 빌라로 이사를 왔습니다. 진작에 찾아봬야 하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니야. 바쁜 사람이 뭐 하러, 서로 안부 전화만 해도 되지. 야, 여기 역삼동 유지가 되었네.”
“그리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여기 이 친구가 제 고향 친구입니다. 여기서 치과를 열었는데 이번에 선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같이 활동하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끌려 나왔습니다.”
“와하하! 끌려 나왔대!”
다들 시끌벅적하니 좋아 보였다.
“어머! 계장님요? 우리 자주 보네요?”
경찰서 녹색 부회장인 윤기숙 여사가 웃으면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 역삼에도 활동하시는 모양이죠?”
“원래가 내가 여기 녹색 회장인데 골프 연습장 손사장이 연합회장을 맡으니까 내가 할 수 없이 부회장하게 되었다 아입니꺼.”
“감투가 두 개네, 두 개여!”
다들 웃긴다고 낄낄 거린다.
“자자 우리 계장님 인사 말씀 한번 듣겠습니다. 자, 박수 박수!”
“와아아! 짝짝!”
김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전 남 앞에서 말해 보기는 처음이라 긴장도 되고 해서 간단하게만 하기로 하였다.
“먼저 이렇게 지역에 봉사를 위해서 단체를 만들어 주시고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뭐 선진 질서라고 하지만 대단한 일을 하시라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에 계시면서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데 솔선수범해 달라는 그런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우선에 여기 역삼에는 학교가 제법 많이 있습니다. 녹색 어머니회에서 매일 등하교 시간에 맞추어서 학생들 안전과 보행 질서를 계도하기 위해서 나오시는데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는 선진에서도 녹색과 함께 출근길에 다 같이 나와서 거리 질서 확립 캠페인을 벌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는 시경국장님 관사도 있고 하니까 여러분이 나와서 거리를 활기차게 만들어 주시면 보기에도 좋고 우리 서장님도 칭찬 받으실 겁니다. 한번 의논해 보시고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교통 캠페인을 벌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아! 짝짝! 우리 계장님 말씀 잘하시네. 나중에 국회에 나가도 되겠다. 킬킬!”
“계장님! 긴급 동의 사항이 있습니다!”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발언을 요청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럼 캠페인만 같이할 게 아니라 따뜻한 봄이 되면 우리 녹색 회원들과 함께 관광버스 대절해서 야유회라도 한번 가십시다. 그래야 서로 사이도 돈독해질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와아 좋다 좋아. 나는 찬성이다. 대 찬성!”
선진 회원들은 좋다고 박수치고 녹색 회원들은 그냥 웃고만 있는데 녹색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마디 한다.
“아이 보소. 아재들이요. 여기다 한 마실 사람들인데 같이 어불러서 놀러 갔다가 바람이라도 나면 그땐 우짤라고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고? 문제 생기면 내가 그 뒷감당을 우째 한단 말이고? 내 맞아 죽는 꼴 볼라꼬 그카나?”
“괜찮아! 괜찮아!”
다들 너무 웃긴다고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 윤기숙 여사가 옆에 와서 김세민에게 말했다.
“손 회장이 오늘 저녁에 계장님 만나거든 잠시 골프 연습장에 들렀다 가라고 카던데 시간 있능교?”
“네, 그리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일은 무슨 일. 그냥 뭐 부탁할 게 있는가 보더라. 여기는 나한테 맡겨 놓고 한번 들렀다가 퇴근하문 되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오 경사와 다시 연습장에 들렀더니 손 회장이 반색을 하며 맞아 준다.
“절 찾으셨다고요?”
“하모, 저기 압구정사거리에 전 사장 알제?”
“아, 그 수입 가구 하시는 전 사장님?”
“그래, 맞다 아이가. 갸도 여기 와서 필드 나가기 전에 공 몇 박스 두드리고 나가는데 낮에 보이 혼마 파이브스타를 들고 다닌다 아이가? 그래서 내가 니 이거 어디서 났노? 하고 물어보니까 우리 계장님이 장만해 줬다면서? 아무 소리 말고 내 거도 하나 장만해 도! 내가 계장님한테 인사는 섭섭지 않게 할 테이까, 그래도 명색이 연습장 한다는 여편네가 아직도 쓰리스타 들고 다닌다 아이가. 두말하지 말고 파이브 스타로 내 거 하나 맹글어 도! 내 김 주임 골프채도 하나 장만해 주께!”
“아니, 아니, 전 됐고요. 회장님 거는 제가 공항에 얘기해서 하나 통관시켜 드릴 테니 그냥 소문만 내지 말고 조용히 갖고 다니십시오. 절대 제가 해 줬다는 소문을 내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내 알았다 카이. 그라고 이리 왔으니까 내 계장님 골프 자질이 좀 있는지 한번 테스트나 해 보자. 아야, 야야! 김 양아! 저기 김 프로 좀 오라고 케 봐라!”
손미숙 여사한테 억지로 이끌려 김세민은 난생처음 골프 연습장에서 스윙 코치를 받았다.
“자, 그립을 잡는 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오버래핑으로 잡으시면 무난하고요, 이렇게 왼손으로 먼저 그립을 잡고 오른손은 새끼손가락으로 왼손의 검지 위에 올리면 됩니다. 힘을 주는 것은 왼손으로만, 오른손은 방향만 잡고요, 다음 스윙은 발은 어깨너비로 벌리고 왼쪽 어깨가 자신의 턱밑으로 들어올 때까지 허리를 축으로 회전을 했다가 풀어 주면서 공을 밀어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끝까지 공을 보는 것입니다. ‘헤드업’이라고 자신이 친 공을 보기 위해 공을 치기도 전에 머리를 먼저 드는 것이 제일 나쁜 습관입니다. 골프 클럽이 공을 밀고 지나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공으로 하는 운동은 전부 다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미는 것입니다. 야구도 그렇고 테니스도 그렇고 골프는 더 그렇습니다. 골프 클럽을 믿고 부드럽게 위에서 아래로 밀어 보십시오.”
녹색의 직사각형 티 박스 위의 고무 핀 위에 하얀색 공이 기계에 의해 자동으로 올라가고 김세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프채를 휘둘러보았다.
‘딱!’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내 저 멀리 하얀색의 공이 직선으로 야간 연습장의 조명을 받으며 날아가서 건너편 동그라미 과녁에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이 샷!”
뒤에서 손 회장의 목소리가 감탄사로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