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197. 살쾡이
“스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그동안 스님 찾으려고 제가 얼마나 수소문을 한지 아십니까?”
“허허! 이 땡중을 찾으셨다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처사께오서는 자당(慈堂: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 생전에 베푸신 중생에 대한 공덕으로 이미 억만금의 부를 이루셨는데 아직 소승이 필요한 일이 있사옵니까?”
“있다 뿐이겠습니까? 제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아 스님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일이 많으니 이번에는 어디 가지 마시고 제 곁에 좀 오래 머무르시면서 많이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그러시다면 소승 시주께 며칠 신세를 좀 지겠소이다. 그리고 예전에 우리 대흥사에서 만났을 때 제가 데리고 있던 행자승을 기억하시는지요?”
“아! 그 키가 작고 몸이 날쌘 아이 아니옵니까?”
“이름도 기억하십니까?”
“이름은 잘 모르겠고 아마도 그때 스님이 살쾡이라고 부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놈이 살쾡이였지요. 어쩌면 진짜 살쾡이보다 더 빠르고 한번 목표를 잡으면 절대 놓치는 법이 없지요.”
“근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소승 어제 참선에 들었는데 갑자기 시주님 얼굴이 보이더이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들른 것입니다. 그 살쾡이란 놈이 2년 전에 내 곁을 떠났는데 지금 소문에 광주와 호남의 건달들을 다 평정해서 범 남도파란 건달 조직을 만들었다고 합디다. 내 말이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올 놈이라 사람이 필요하시면 쓰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이제이란 말은 잘 아시지요?”
“그거는 오랑캐는 오랑캐로 제압한다는 말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 여기서 난동을 피운 칼잡이 그놈도 곡산 땡중 그놈이 키운 살수입니다. 같은 호남 출신으로 맞서야 어쩌면 피해가 적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그 행자승인 살쾡이를 정말로 저한테 데려올 수가 있습니까?”
“소승이 약속을 드리지요. 그럼 오늘 하루 신세를 지고 소승은 내일 아침 일찍 광주로 내려가겠습니다.”
“스님! 정말 어떻게 이리 때맞춰 오셔서 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까? 정말로 감사드리옵니다.”
“다 시주님 자당 어른의 복이지요. 부자중원(富者衆怨 : 부자는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받는다 )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십 년 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정길범 회장은 모친의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해남의 대흥사를 찾았다.
그런데 종무소에서 천도재가 많이 순서가 밀려서 이번 달에는 지내기 어렵겠다는 말을 듣고 낭패가 난 심정으로 대웅전 앞 쌍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데 낡은 가사를 걸친 중이 지나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천도재! 그거 다 쓰잘데기없는 짓이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전 한 구절 외우는 것보다도 더 못한 것이지.”
정 회장은 순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스님! 스님!”
멀어져 가는 객승의 뒤를 쫓아서 두륜산 자락을 올랐다.
정상의 무지개다리 근처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쫓아 올라갔는데 그만 행적을 놓치고 말았다.
‘말라빠진 중놈이 무슨 걸음이 그리도 빨라! 에이 X발! 괜히 쫓아왔네!’
툴툴거리면서 다시 내려가려는 순간 눈앞에 키가 작은 바짝 마른 행자승이 나타났다.
“처사님! 저희 스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십니다.”
깜짝 놀라서 어린 행자승을 따라서 산길을 다시 올라가는데 어찌나 발이 빠른지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 산속 비탈의 석굴 앞에 닿을 수가 있었다.
안에는 겨우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과 한쪽에는 법당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불도 없이 마른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침상을 대충 만들었으며 담요 두 장이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아마도 저기에서 두 사람이 잠을 자는가 싶었다.
“스님! 아까 지나가면서 하신 말씀이 귀에 뱅뱅 맴돌아서 이리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정 회장은 무조건 무릎을 꿇었다.
“어허허허! 별 뜻은 없었소이다. 보다시피 우리는 가난한 운수 행각을 하는 땡중이고, 난 돌아다니려니 돈이 필요해서 그냥 폼 한번 잡은 것뿐이외다. 그리고 큰 절에서 천도재니 뭐니 하는 것, 사실은 다 필요 없는 일이지요. 그저 살아 있는 사람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니 그럴 바에야 나한테 그 돈을 주시면 내가 여기서 49일 동안 자당 어른 천도재를 지내 드리지요.”
“정말로 그래 주실 수가 있는지요?”
“일단 오늘은 이리 올라오셨으니까 한번 자당 어른의 천도재 첫날을 지내도록 하지요.”
“아니 근데 스님! 아까부터 자당이라고 하시던데 어떻게 제 모친인 줄 아셨습니까? 전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허! 이런 말 하면 내가 미친놈 소리 듣겠지만, 제 눈에는 지금 자당 어른의 혼이 처사님 뒤 왼편에 서 계십니다.”
“네에? 아니 뭐라고요?”
화들짝 놀란 정길범이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수련을 거쳐 득도를 하게 되면 심안이 열리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이게 마련입니다. 자 여기는 따로 드릴 것은 없으니까 저기 옥수수 삶은 것으로 요기 좀 하시고 춥더라도 오늘은 여기서 지내시지요. 나중에 모친도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처럼 손님도 오셨는디 꿩이라도 한 마리 보시해 드려야겠다. 세걸아! 어저께 봐 둔 꿩 자리에 꿩이 돌아왔느냐?”
“예! 스님! 방금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아무리 땡중이라도 대놓고 살생을 할 수는 없는 법. 옜다. 세걸이 네가 한 마리 잡아서 보시해 드려라.”
“예! 스님.”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스님이 옆에 있던 죽립을 행자승에게 던져 주었다.
세걸이라고 불리는 행자승이 갑자기 입을 오므려 ‘꺽껍!’하는 꿩이 우는 소리를 내더니 돌을 집어 숲속으로 던지자 갑자기 어둠이 내린 숲속에서 장끼 한 마리가 하늘로 박차고 올랐다.
그 순간 행자승이 죽립을 한번 슬쩍 휘둘렀는가 싶었는데 죽립에서 한 자루의 비도가 쏜살같이 날아가서 막 하늘을 날던 장끼 한 마리가 구슬픈 소리를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저기 둥지에 아직 어린 새끼들이 있어 까투리는 잡으면 안 되고 장끼는 잡아도 또 까투리가 다른 짝을 금세 찾으니께 죄책감이 덜하구먼.”
스님이 혼자 말을 정길범이 들으라는 듯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행자승은 익숙한 솜씨로 꿩의 털을 벗겨 내고 불에다 굽기 시작을 했다.
금세 구수한 냄새가 산속에 퍼져 나갔으며 정길범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들렸다.
소금만 뿌리고 먹는 꿩인데도 맛이 기가 막혔다.
“스님도 좀 드시지요?”
하고 권하니 화기가 밴 음식은 일절 드시지 않는다고 행자승이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행자승과 둘이서 꿩 한 마리를 다 먹고 나서 스님 앞에 앉았다.
“이제 곧 자당 어른과 만나실 테니 평소 하고 싶은 말씀은 다 하시우.”
그렇게 스님이 말을 하는데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잘 되지도 않았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행자승이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정갈한 석간수를 그릇에 가득 담고 그 위에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를 물에다 꽂아 놓았다.
처음에는 힘이 없이 비스듬히 쓰러져 있던 꽃이 스님이 뭐라고 중얼거리자 이내 꽃줄기에 힘이 들어가면서 반듯이 물 위에 서 있더니 이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울음소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꿈에도 잊지 못하던 모친의 음성이 들려왔다.
“길범아! 네가 길범이니? 내 말이 들리니?”
정길범은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자신이 보는 것은 스님이 중얼거리는 모습이었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돌아가신 모친의 음성이었던 것이었다.
바로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꽃잎 심령술’의 실체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날밤을 새우다시피 길범은 모친의 음성을 들었다.
다음 날 길범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스님한테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님! 언제라도 절 찾아 주시면 제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아미타불! 시주는 이제 곧 물 건너 멀리 가게 될 운이니 부디 망설이지 말고 운에 맡기시게. 자당 어른이 항상 시주를 지켜 줄 것이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이다. 잘 내려가시오. 소승은 여기서 49재만 끝나면 다시 운수 행각을 떠날 것이니 만약에 소승이 생각나면 소승 생각을 열심히 하시면 소승이 알아서 시주를 찾아가리다. 아미타불!”
그러고는 십 년 동안 두 번밖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도 꼭 정길범이 궁지에 몰렸을 때 귀신같이 알고서는 찾아와서 도움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와서 살쾡이를 데려가라고 했으니 정길범은 하늘이 자기를 돕는다고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BK 그룹 오 회장이 늘 자신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는 통에 영 기분이 별로였던 요즘에 일산 스님의 방문으로 그 모든 먹구름이 걷힌 것이었다.
* * *
특수대에서 자체 수사 회의를 개최했다.
“자, 지금 지난번 BK 칼부림 사건 말이야, 호텔 직원들 조서도 다 받고 했는데 정작 제일 큰 피해자인 유달수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말이야. 뭐라더라? 건달끼리 싸움에 형사가 끼는 것은 쪽팔린다고 했다던가 뭐 그랬지?”
정우진 대장이 대구까지 내려가서 유달수 조서를 받으러 갔던 원 형사한테 다시 한번 물었다.
“예. 우리가 내려가서 암만 꾀고 설득해도 자기는 입을 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꾸 쪽팔리니 체면이니 의리니 하는데 아주 골치예요. 이거는 뭐 정작 의리를 지켜야 할 사회 지도층이나 정치인들은 안 지키는데 밑바닥 건달들은 의리나 체면 이런 거를 목숨처럼 지키려 드니, 이게 다 무슨 사회 풍조인지 모르겠습니다.”
원 형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S호텔에 잠복은 어떻게 되었어?”
이번에는 5팀장 서운찬 주임에게 물었다.
호텔 잠복은 5팀에서 전담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 새끼, 우리가 잠복하고 있다는 걸 눈치 깠는지 얼씬도 안 합니다. 근데 이상한 것은 독고다이가 없는 데도 명동파는 별 이상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락실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밤 12시면 어김없이 수금하고, 노점상 수금도 차질 없이 하고.
이건 제 생각인데, 아무래도 이 새끼가 어디 짱 박혀가지고 명동파를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과연,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뭐 좋은 수가 없을까…… 김 주임! 뭐 아이디어 없어?”
정 대장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김세민의 의견을 물었다.
“글쎄요, 이거 뭐 딱히…….”
김세민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는데 마침 관리반 이선유 경감과 이미라 검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은 별도로 할 일이 있다면서 회의에 늦게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논의가 잘 끝났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정우진 대장의 옆으로 다가왔다.
“뭐야, 왜 이렇게 실실 웃고 그래?”
“타초경사(打草驚蛇: 수풀을 휘저어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
“뭐?”
이미라 검사가 뜬금없이 사자성어를 들먹이자 모두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타조…… 뭐라고?”
그러자 이선유 경감이 나서서 설명을 했다.
“타초경사요. 실은 이번에 우리 1팀에서 비밀리에 명동 오락실들을 조사했는데 상당히 수상한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방금 이 검사님하고 의논을 했는데, 먼저 오락실 단속부터 하려구요. 그러면 숨어 있던 독고다이가 안 튀어나오고는 못 배길 겁니다.”
“뭐고, 꼭 무슨 동네 도랑가에서 괴기 잡는 것도 아이고.”
강 형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근데 지금 오락실은 단속이 모호하다면서요?”
김세민이 의문을 제기하자 이번에는 이미라 검사가 대답을 했다.
“일단 오락실 내에서 환전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밖에다 환전 장소를 만들어 두고 안에서 당첨 메달이나 상품을 들고 나가서 현금으로 바꾸는 형태로 장사를 하고 있죠. S호텔을 비롯한 몇 곳은 슬롯머신 기계까지 안에 들여다 놓고 있는데 이건 말 그대로 돈 넣고 돈 먹는 기계아닙니까? 현장에서 자판 압수하고 종업원, 손님 진술서 받아서 단속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환전 장소에는 형사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환전하러 오는 손님들을 덮치는 거죠. 그렇게 손님 진술서하고 환전상 진술서 받아서 업주 구속시키구요.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단속해 나가다 보면 튀어나올 겁니다.”
“근데 말이야, 독고다이 그놈보다는 정치인들 빽이 먼저 들어오지 않겠어?”
정우진 대장이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하자 김세민이 어깃장을 놓았다.
“아, 그거야 대장님이 막아 주셔야지요. 그거 못하겠다고 하시면 처음부터 단속은 못 하는 거죠.”
“저거 김세민이 또 사람 물귀신처럼 물고 들어가는 거 봐 저거, 좋아! 내가 막아 보지. X발 놈들 어느 정치인이 오락실 돈 먹고 지랄 떠는지 한번 제대로 봐야겠어.
그리고 말이야, 이번에는 아예 기자들 데리고 단속을 해 보자고.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김 주임이 D데이 정해! 기자도 부르고 해서 아주 제대로 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단속을 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화령일보 조성제 기자한테 연락을 했더니 자기는 이제 편집실 캡으로 승진했다며 다른 기자를 보낸다고 했고, 젊은 여성 기자가 사진 기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화령일보 진연수 기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 기자는 당찬 목소리로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어! 잘 왔어요. 지금부터 합동 단속 들어갈 거니까, 잘 보시고. 기사 잘 써 줘야 합니다?”
정우진 대장은 사전에 단단히 못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