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209. 자리 잡기
신고와 인사를 다 끝내고 김세민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은 낡은 철제 책상에다가 서랍도 아귀가 맞지 않아 서랍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고 의자도 한쪽이 기울어져서 앉으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렸다.
책상 위에 놓인 유리판도 두 군데나 깨어져서 청 테이프로 붙여서 유리판 안에 있는 각종 자료도 제대로 안 보이는 형편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두 개의 영전 축하 화분도 눈에 거슬리고 거추장스러워서 직원들 보고 가져가라고 말을 했다.
이제 빨리 서울하고의 연을 끊어야 자신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임을 실감했다.
“배 부장님! 경찰서에서 가장 가까운 여관이 어딥니까? 제가 숙소로 당분간 지내야 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김세민은 방범과 서무 반장인 배종식 경사한테 물었다.
“아, 우리 계장님 부산에 전혀 연고가 없으십니껴?”
“예,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가만있어 봐라, 그라무 제가 퍼뜩 알아보겠심다.”
그러더니 전화기를 들고 파출소로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수안 파출소! 나 방범계 배 경사인데 거기 차석 옥 경사 좀 바꿔 보소!”
“아, 옥 대감! 나 배 경사인데 우리 계장님 오늘 서울에서 새로 오셨는데 거기 수안 여관 있잖아? 경찰서에서 제일 가깝잖아? 계장님 오늘 저녁부터 거기서 당분간 주무셔야 되는데 방 값 좀 D.C 해서 깨끗한 놈으로 하나 잡아 갖고 퍼뜩 지금 전화 좀 해 주소! 하모, 그래야지. 요새 세상에 공짜가 어딨노? 계산은 내가 할 끼다. 내 수안보고 방값 내라 소리 안 할 테니까 깨끗한 걸로만 하나 잡아도! 오냐! 빨리 연락해도!”
김세민은 배 경사가 파출소에 전화하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아니, 파출소에 부담을 지우지 마십시오. 제 방값은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김세민이 파출소에 방값을 부담시키는 것 같아서 펄쩍 뛰었다.
“아입니다. 요새 그리도 못 하고요. 좀 할인해서 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월세로 끊으면 한 30만 원 정도는 받는다고 그러네요.”
“아, 그럼 됐습니다. 제가 오늘 바로 그 돈 드릴 테니 방값 할인하지 말라고 하세요. 괜한 부담 지우기 싫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배 경사의 얼굴이 묘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전 계장님을 아직 잘 모르지만 서울에서 오신 분들치고는 꽤 반듯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여기 경비과장님도 서울에서 승진해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분은 온천장에 있는 호텔에서 숙식을 하시는데 지금 몇 달이 지나도 방값은커녕 식대도 한 푼을 내지 않았다고 그럽디다. 경비과 서무반장이 저한테 죽겠다고 그럽니다. 물론 경비과장 밑에 교통이 있어서 그분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시겠지만 그분 혼자만 쓰시는 게 아니고 주말이면 경비과장님 사모님과 애들까지 서울에서 와서 방을 하나 더 잡아야 하고 호텔에서 다 먹으니까 월말에 교통들이 결재한다고 아주 애를 먹습니다.”
“아니 경정급 과장이면 예산에서 관사로 쓸 돈이 나올 텐데 왜 호텔에서 지낸답니까?”
김세민은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그분이 간부 후보생 25기인가 그런데, X대 경찰행정학과를 나왔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R.T도 했고 하니 제대로 성골 코스를 다 밟은 셈인 데다가, 후보생 졸업하고서는 바로 청와대 101 경비단에 들어가서, 거기서 소대장, 중대장으로 경감까지 승진했다가, 이번에 경정까지 승진해서 일선이라고는 처음 나온 것이지요. 그러니 서울 경찰들 따와이 하는 얘기만 많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지방 와서 이 정도 민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사실 부산은 서울에 비하면 따와이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나중에 계장님도 파출소 나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서울 순사들에 비하면 완전 촌놈들입니다.”
“에이, 서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이죠. 확실히 경비과장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네요.”
김세민이 그렇게 말을 하자 이번에는 파출소 직원들 외근 근무 성적 평가를 담당하는 김종호 경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거기 경비계에 101단에서 경사까지 진급해서 내려온 김성식 경사라고 있는데 김 경사가 경비과장한테 대하는 것 보면 이건 뭐 군에서 하사관이 대대장 대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아침에 보면 충성 구호 붙이는 것은 당연하고 과장님 앞에서 부동자세로 결재 받는 것 보면 어떤 때는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한 번은 같이 숙직을 하면서 왜 그렇게까지 벌벌 떠느냐고 물어보니까 당신도 청와대 가서 근무 한번 해 보면 알게 된다고 그럽디다. 청와대 101단 군기가 군대보다도 더 세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경찰관인 순경이 간부들 딱가리를 하면서 단화나 워커도 다 반질반질하게 광을 내서 닦아 줘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김세민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경직된 청와대의 분위기가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고 자신도 대통령 주위의 비서관 한 사람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이리 부산까지 밀려와서 오늘부터 여관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을 새삼 현실로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서울 일은 다 잊어버리고 여기 부산 경찰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만 더 다지게 되었다.
대충은 알지만 그동안 형사만 쫓아다녔으니 파출소 일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배 부장님! 제가 형사만 한다고 파출소는 경장 때 근무한 것 말고는 제대로 아는 게 없는데 당장 오늘 저녁부터 파출소 순시를 나가라고 과장님이 그러시니까 제가 챙겨야 할 것을 뭐 정리라도 해 둔 것이 있습니까?”
김세민은 우선 업무 파악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방범과 서무인 배 경사한테 물었다.
“음~ 우선은 순시하실 때 체크 리스트는 있습니다.
그 외에 최근에 저희 과나 지방청에서 내려온 공문을 기안 재생산해서 내려보낸 것들을 복사해서 드릴 테니 읽어 보시고, 파출소 나가서 그대로 시행이 되는지 점검을 해 보시고 문제점이나 파출소 직원들 잘못이 있으면 지적해서 저희들한테 넘겨주시면 제가 알아서 조치를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파출소 순시 차량은 따로 나오는 게 있습니까? 제가 아직은 파출소 위치를 다 몰라서 그럽니다.”
“아, 그것은 야간에 상황실에다 연락을 하면 계장님 파출소 순시용은 배차를 해 줄 것입니다. 당분간은 의경이 운전하는 경찰서 풀차를 타고 다니시면서 위치를 익히시고 나중에는 계장님 개인 승용차를 이용하시는 게 편하기는 하실 겁니다.”
“아, 네 그렇군요.”
잠시 후에 수안 파출소에서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계장님! 안녕하십니까? 수안 파출소 근무하는 송 순경입니다. 계장님 짐 가지러 왔심니다. 그라고 방 열쇠는 여기 있심니다. 나중에 여관에 들어가실 때 카운터에 25만 원만 선금으로 주면 한 달 동안 지내실 수가 있습니다.”
파출소에서 온 젊은 경찰관이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아, 이거 내가 들고 가도 되는데, 그래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가방 한 개하고 정복과 양복 넣은 커버 하나뿐인데 그럼 부탁해요.”
김세민은 자신 때문에 파출소 직원이 심부름 온 것이 미안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퇴근 시간이 되자 배 경사가 말을 꺼냈다.
“원래 오늘 계장님도 오셨으니까 과 회식을 한번 하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오늘 선약이 있다고 하시고 우리 방범계도 문 경장이 집에 제사도 있다고 해서 다음 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고 들어가셔야 하니까 저녁은 저하고 둘이서 하입시다.”
그래도 서무 반장이라서 그런지 예의는 갖추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각자 퇴근하십시오. 전 여기 가까우니까 걸어가다가 간단하게 한 그릇 먹고 들어가면 됩니다.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김세민은 정말로 이제는 혼자 있고 싶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낯선 곳에서의 하루라 정말 피곤하기도 했다.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환경이 바뀌면 적응할 때까지는 힘들다고 하지를 않던가 말이다.
배 경사가 김세민의 의도를 눈치를 챘는지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안내해서 여기 경찰서 뒤에 돼지 국밥집이 맛있는 집이 있심니다. 거기서 간단하게 잡숫고 들어가서 쉬시소.”
그렇게 배 경사의 청에 못 이겨서 경찰서 후문을 나와서 길을 건너 시장통으로 들어가니 돼지 국밥집이 여러 군데 보였다.
서울에서는 돼지 국밥집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부산은 돼지 국밥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김세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돼지 국밥을 먹었다.
처음에는 국물 속에 돼지고기가 그대로 둥둥 떠 있는 것이 낯설고 냄새가 날 것 같았는데 한 숟가락 떠서 먹어 보니 느끼한 맛보다는 구수한 맛이 더한 것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이 돼지 국밥이 서울 사람들은 묵지 않는다고 카더라고요. 근데 부산 사람들은 이거 이틀에 한 번은 꼭 먹어 줘야 합니다. 값싸고 내용물도 푸짐하고 한 그릇 먹으면 배가 부르거든요? 촌놈들은 일단 배가 불러야 한 끼 잘 먹었다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거든요? 계장님도 빨리 서울은 잊어버리시고 부산 촌놈이 되시는 게 마음이 편할 낍니다.”
그렇게 배 경사와 저녁을 같이 먹고 헤어지고, 알려 준 대로 시장통 안으로 들어가니 수안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2층의 여관이었는데 그런대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깨끗해 보였다.
카운터에 들어서니 풍채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대번에 김세민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이구, 이거 새로 오셨다는 방범 계장님 아니신교? 안 그래도 파출소에서 신신당부를 해서 지가 직접 기다리고 있었다 아입니꺼. 그래 저녁은 잡쉈능교?”
그래도 인사말을 다정스럽게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네. 먹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숙박비 25만 원 있습니다. 혹시 적으면 더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김세민은 방값을 먼저 내놓았다.
“아이구! 이거 지가 받아도 되는가 몰라. 난 안 받으려고 했는데 파출소에서 안 받으면 안 된다고 어찌나 케샀던지 지가 초면에 실례부터 했심더. 우짜든동 편하게 기시고 뭐 불편한 게 있시문, 언제라도 지한테 말씀만 해 주이소. 순사들 말대로 즉각 시정하겠심다. 호호!”
주인아주머니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농담까지 하고 그랬다.
그래도 첫 인상이 좋은 것 같아서 지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이제 여기도 또 다른 김세민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었다.
샤워를 하고 방 안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 갖고 온 외근 근무 관련 공문을 읽어 보고 있으니까 아까 낮에 과장한테 신고를 할 때 저녁에 파출소 순시를 돌아보라고 지시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첫날부터 잔소리 듣기가 싫어서 TV 뉴스를 좀 보다가 저녁 10시 쯤 되어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서 2층에 있는 상황실로 올라갔다.
상황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근무자들이 전부 책을 보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저, 새로 온 방범 계장인데 순시용 차를 배차받을 수가 있습니까?”
입구에 앉아서 월간 조선 잡지를 읽고 있던 경장 계급을 달고 있는 근무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고 이거 제가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야! 김 수경! 지금 나갈 차 있나?”
“아, 그게 말입니다. 아까 풀 차는 과장님들이 전부 다 퇴근할 때 타고 나가셨는데 아직 한 대도 안 들어왔지만 한 10분 있으면 한 대가 들어온다고 방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
김 수경이라고 불리는 상황실 근무 의경이 경장에게 보고를 했다.
“계장님! 이거 좀 기다리셔야겠는데요? 이게 원래 풀 차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전부 과장님들 전용차나 마찬가지이거든요? 낮에는 일반 계장님들이나 직원들은 아예 배차도 안 되고 밤에는 순시용으로 배차를 하는데 보통은 밤 12시가 넘어야 합니다. 과장님들이 손님들하고 저녁 먹고 술 한 잔하고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오면 보통 12시 가까이 되거든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밤 12시 되어서 나오시면 제가 바로 배차를 해 드리겠습니다.”
상황실 박길수 경장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원래 경찰서 과장들이 사적인 용도로는 사용하지 말도록 한 것이 풀 차 제도인데 일선 경찰서에서 운영은 제도 개선은 하나 마나였다.
김세민은 이제 자신이 처음 온 이곳에서 아무것도 규정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부산에 왔으니 부산 경찰 룰을 따르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 30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차가 들어왔다.
운전 의경의 표정을 보니 꽤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일단은 군대 생활이니 힘들어도 참아야 하지 않겠나 싶었지만 김세민은 왠지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차에 타자마자 이렇게 말을 했다.
“금세 들어왔는데 쉬지도 못하고 또 나가자고 해서 미안하다. 내가 서울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가지고 파출소 위치고 뭐고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어느 정도만 파악하고 나면 앞으로는 나 혼자 다닐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안내해 주면 좋겠다.”
김세민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운전 의경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계장님께서 그리 말하시면 제가 정말 난처합니다. 이건 당연히 제가 해야 될 일인데요…… 괜히 피곤한 티를 내서 마음 쓰시게 한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직접 나오시지 않아도 상황실에 전화로 배차 신청하시면 제가 숙소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홍 상경이라고 했지? 그런데 자네는 말투가 좀 다르네? 부산 사람이 아닌가 봐?”
“아 예, 저도 계장님처럼 서울에서 왔습니다.”
“어쩐지, 서울 어딘데?”
“강남입니다만…….”
“그래? 이야, 반가워!”
김세민은 안 그래도 단신으로 먼 곳까지 와서 적적하던 차에 강남에 사는 의경이라도 만나니까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디를 먼저 가실 겁니까?”
“동래에서 가장 변두리 파출소가 어디에 있지?”
“변두리라…… 거제 4파나 연산 9파출소 정도겠네요.”
“9파출소? 그럼 연산 9동까지 있다는 말이야?”
“네. 맞습니다. 연산1동에서 9동까지 전부 다 파출소가 있습니다. 관할 면적이 제일 크거든요.”
“그럼 일단 거제 4파부터 갔다가 오는 길에 연산 9파에 들르고 본서로 돌아오자고.”
김세민은 첫날이니 일단 두 군데 정도만 둘러보기로 했다.
“네. 모시겠습니다.”
홍 상경이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