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7화
#427. 폭풍 전야
며칠 뒤.
시설계장 이하 주임, 그리고 서무 반장은 조용히 사표를 내고 조직을 떠났다.
여죄를 끝까지 추적해서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지방청 내에 높았고 현 청장의 의지도 있었으나 서울 청장으로 간 전임 부산 청장이 한사코 만류하는 통에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대신 시설계 있는 동안 따와이한 것을 전부 토해 내고 사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시설계장의 욕심이 화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새로 청장이 바뀐 것을 뻔히 아는 마당에 어떻게든 인사를 했어야 할 것을, 제3자를 통해 스리 쿠션으로 인사하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내부에서 크게 한 방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꼴이 된 것이었다.
교통계 서무 오 경사도 자신이 최초 원하던 대로 면허계에 가는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렸다면 굳이 시설계를 씹어댈 이유가 없었지만, 면허 시험장행이 틀어지고 나자 평소 잘나간답시고 깝치던 시설계장에게 악감정을 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민원 부서에는 어디 할 것 없이 예전부터 공통적으로 내려오는 말이 있었다.
[한 놈은 인삼 먹으면서 다른 한 놈이 무말랭이 씹는 날엔 반드시 사고가 난다.]
결국 해 먹더라도 모두 다 같이 즐거워야 뒤탈이 없다는 말이었다.
남부 면허 시험장에서 김세민이 제안한 방식을 차용한 도로교통법 시험이 치러졌다.
교통부서의 인기는 예상대로 대단해서 경쟁률이 무려 10:1에 달했다.
문제지 유형을 고르고 총 세 번에 걸쳐서 시험을 쳐야만 다 치를 수가 있을 정도였고, 두 군데의 고사장을 풀로 운영하는데도 일반 응시생들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문제 수는 총 100문제, 시간은 50분입니다. 1문제당 30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김세민이 컴퓨터 OMR 답안지를 나누어 주었고, 보조 직원들이 문제지를 나누어 주자 곧바로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와이고! 뭐가 이리 어렵노?”
“무슨 X발 사법 고시가? 문제가 이따구고?”
여기저기서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50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고, 종료 벨이 울리자 이번엔 너나 할 것 없이 상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어이 잠깐만! X발 아직 다 못 풀었다고!”
“이 문제 낸 놈 어떤 쉐끼고? X도 이거 다 떨어진 도로교통법 알아가 어따 써먹는데?”
“이 X발 놈들……. 이거 문제 낸 새끼도 아마 못 풀 끼야. 이딴 거를 문제라고……. 금마보고 와서 풀어보라 케라! X도 경찰은 현장이 중요하지 이래 대가리만 굴려서 머할 낀데!”
다들 이 시험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후에는 영도 봉래동에서 싸이카대 희망자 체력 테스트를 했는데 그 역시 가관이었다.
넘어진 싸이카를 제대로 일으켜 세우는 지원자가 전체의 50%도 안 되었던 것이다.
300킬로가 넘는 싸이카를 세우려면 한쪽 다리를 오토바이 안쪽에다 집어넣고 엉덩이 쪽으로 힘을 줘서 순식간에 밀착을 시켜야 허릿심을 이용해 바로 세울 수가 있는 것이었고, 양팔의 힘만 가지고서는 제아무리 장사라도 힘들었다.
싸이카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는 테스트가 끝날 무렵에는 체력 시험 통과자가 전체의 20%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이거야 원. 이래서야 학과는 볼 필요도 없겠는데? 체력이 이렇게나 부실할 줄이야……. 근데 왜 그렇게 싸이카를 타고 싶어 하지?’
갑자기 궁금해진 김세민은 옆에서 헉헉거리는 지원자 한 사람을 불러 물어보았다.
“안 힘들어요?”
“헉…… 헉……. 죽겠심니다, 와이고…… 숨이 안 쉬어지노. 헉…….”
“아니,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서 뭣 하러 여길 지원했습니까? 차라리 면허계나 고순대로 가지 그랬어요.”
“멋있다 아잉교?”
“뭐요?”
“파란 교통복에 선글라스 끼고 하얀 싸이카 위에 앉아서 [부다다당!] 소리 내면서 가는 걸 어릴 때 한 번 봤는데요, 그때부터 그게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모든 선발 절차가 끝이 나고 김세민은 먼저 면허 시험장 요원부터 인사 발령을 내 주도록 인사계에 협조 요청을 했다.
김세민 또한 청장의 지시에 의해 남부 면허 시험장 관리주임으로 발령이 났는데, 자신의 교통계 후임으로는 동부서에 있는 특차 간부 후보생 출신 정길수 주임을 추천하여 같이 발령을 받게 되었다.
“김 주임님, 감사합니다. 저하고는 초면인데도 이리 챙겨 주시니…….”
“아닙니다. 정 주임도 임관한 지 이제 10년차 아닙니까? 이제 슬슬 심사 승진 바라보셔야죠. 이 자리가 교통과 전체 서무주임이라 근무 성적은 잘 나올 겁니다. 또 교통과에 오는 주임들은 전부 다 면허계 갈 욕심으로 오기 때문에 심사 승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구요……. 심사는 돌아가면서 하게 되어 있으니까 여기 있다가 교통과에 순번이 돌아오면 그때를 노리도록 하세요. 뭐, 생기는 건 없는 자리지만 별관에 있어서 마음 하나는 편할 겁니다. 정시 출퇴근도 가능하고……. 나름 재밌어요. 정 붙이고 잘 지내세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 있으면서 김 주임님 가시는 남부 면허계에 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힘껏 돕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럼 또.”
특차 간부 후보생은 평생을 고시 공부에 매달리는 고시 낭인들을 구제한다는 취지 아래 수사, 정보 요원으로 한정하고 2기수에 걸쳐서 선발한 뒤 교육도 종합학교에서 속성으로 6개월만 이수하고는 경위를 달아 주었던 탓에 조직 내 정규 간부 후보생들의 반발이 컸다.
그래서 이 제도를 추진한 치안 본부장이 바뀌자마자 제도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2기수 약 100명의 특차 후보생들만 조직에 남게 되었는데 위아래 할 것 없는 심한 왕따 속에서 진급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이 들었고, 승진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보직이란 꿈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였다.
정 주임 역시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차에, 김세민이 자신의 승진을 염려하여 자리를 만들어 준다고 하니 순경 출신이고 뭐고 간에 마음 같아서는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에 교통과로 신고를 들어온 남부 면허 시험장 직원들에게 김세민이 특별 교양을 했다.
“여러분이 지금 자리로 가서 전임자를 만나면, 당장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돼지를 여러분에게 인계하려고 들 것입니다. 절대로 받아선 안 됩니다. 아무리 동료라고 해도 냉정할 때는 냉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업무 인수인계 핑계를 대더라도 단호히 거절하세요. 이미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시의 기능직 직원들이 업무에 있어서는 훨씬 빠삭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할 일은 뭐냐, 그저 부정으로 면허가 발급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청장님 역시 여러분에게 그걸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기간 만료 전인데도 이렇게 교체를 단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돼지를 인계받으면 안 됩니다. 받는 순간 어찌될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그렇게 교양을 하고 김세민이 후임인 정 주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서무 오 경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주임장님! 지금 남부 시험장에 큰일이 났답니다. 빨리 가 보셔야 되겠심니다.”
“무슨 큰일? 아직 직원들이 도착도 안 했을 텐데? 그리고 면허장장은 그대로 있잖아요?”
“……지금 장장님도 통제가 안 되나 봅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글쎄 그게……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돼지 다 처리 안 해 주면 전산실을 다 불태워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답니다.”
“뭐야?”
김세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X끼들이…… 진짜 미쳤나? 박수목 경장! 지금 바쁜 일 없지? 따라와!”
“아 옙!”
김세민은 체송하는 박수목 경장을 데리고 즉시 남부 면허 시험장으로 갔다.
원래 9시가 되자마자 일반 민원인들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데, 전산실을 장악한 직원들이 여직원들의 전산실 출입을 아예 막아 버린 통에 적성 검사나 신규 면허 발급 등 모든 업무가 중단된 상태였고, 시험장 입구 주변에는 민원인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거 큰일인데? 이대로 가다가 방송국에서 나오기라도 하면…….’
이 상황이 조금만 더 계속되면 대번에 방송국 중계차가 나와서 중계방송이라도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목적이 떳떳했다고 해도 지금의 지방청장과 1부장은 치명타를 입게 되고, 김세민 역시 입지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면허 시험장 1층의 넓은 민원실로 뛰어 들어간 김세민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기능직 직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사람들 다 내보내! 그리고 범칙에 조 여사!”
“예! 주임님!”
“지금 바로 안내문 써 붙이세요. 전산 고장으로 수리될 때까지는 업무가 중단이다. 오후에 재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써 붙이고 여기 새로 발령 난 직원들 데리고 정문의 철문도 닫아걸어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통제를 해야 합니다.”
범칙 담당 조연수 여사는 여기 시험장에서만 10년 가까이 근무해 온 기능직 중에서는 최고 고참이었다.
조 여사를 움직여야 여자 기능직들이 움직인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 직원들끼리 주먹다짐을 하고 싸우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하는 것을 보고 교통계 서무인 오 경사한테 먼저 연락한 것도 조 여사였다.
김세민은 급한 마음에 두 계단씩 뛰어올라 장장실로 갔다.
장장실 밖에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면허장장인 도태식 경정과 학과, 기능, 관리주임 등이 서로 뒤엉켜서 소리를 지르고 한창 밀고 당기는 중이었다.
기능반의 채수병 주임이 장장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미쳤나! 니 이거 안 놓나!”
“X발! 내 지금까지는 참아 줬다만 인제 더는 못 참지. 아직 6개월이나 기간이 남아 있잖아! 근데 그 새로 온 교통주임 X끼 말만 듣고 쫓아내면 우짜는데!”
“야이 미친놈아! 내가 니 쫓아냈나! 와 내보고 X랄이고!”
“쫓아내는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근데 그럴 거면 우리가 갖고 있는 돼지는 정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야 될 거 아이가! 우리가 무슨 끌베이 X끼도 아이고 이래 탈탈 털어가 쫓아내면, 우리가 알겠심니데이 하고 곱게 나갈 줄 알았나? 장장! 입이 있으면 함 씨부리 봐라! 이게 이치에 맞는 일이냐고! 에이 X발, 그냥 전산실이고 뭐고 확 불 싸질러뿌고 다 뒤지뿌까!”
“그 손 놓고 나하고 얘기하지 그래?”
장장실에 도착한 김세민은 채수병 주임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오, 이게 누고? 너 이 X끼! 잘 만났다, 오늘 니 죽고 내 죽자!”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보면 모르나? X발 X 같아서 확 불 싸질러뿔라고 한다. 와, 불만 있나!”
“그래? 그럼 질러. 자, 여기.”
김세민이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채 주임의 발 앞으로 던졌다.
“이…… 이기 뭐 하는 기고?”
“불 지른대매, 그럼 어서 질러 보라고 이 X발 놈아!”
갑자기 김세민이 소리를 빽 지르자 놀랐는지 장장의 멱살을 잡았던 주임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왜, 판 깔아주니까 갑자기 못 하겠냐?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니가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방화가 얼마나 큰 죄인지는 잘 알 테고, 넌 백 프로 사형이야. 니 가족들 생각은 안 하냐?”
김세민이 약한 곳만 집어서 툭툭 건드리자 채 주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김세민이 득달같이 채수병 주임에게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잡아채고는 그대로 이마를 바로 앞 탁자 위에다 큰 소리가 나도록 찍어 버렸다.
쿵!
“크아악!”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한 채 주임은 이마뿐 아니라 눈까지 책상에 같이 부딪히는 바람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 X발 놈이!”
그러면서 채 주임은 김세민의 양다리를 노리고 자세를 낮춰 잡아 들어갔다.
‘니가 그렇게 빨라? 일단 잡히기만 잡히면 니는 끝이다!’
어떤 상대라도 손에 잡히기만 하면 다 넘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간파한 김세민은 채수병이 몸을 낮추는 것을 보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오른발 앞차기로 채수병 주임의 명치를 그대로 찍어 버렸다.
푸우욱!
“쿠와옵!”
김세민의 발이 채수병 주임의 명치에 그대로 꽂히자 채 주임은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잡고 헥헥거리며 땅바닥을 기었다.
“…….”
김세민은 팔짱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채 주임은 장장실 소파까지 기어가서는 싸움 중이란 것도 잊었는지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와~ 숨이야, 와이고……. 와 이래 숨이 안 쉬어지노? 와이고 내 죽겠데이…….”
사실 김세민도 채 주임이 진짜로 불을 지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직원들이 전산실을 장악하고 업무를 마비시킨 것은 다 장장실에서 벌어지는 이 난투극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 중 우두머리인 채수병 주임의 기를 꺾어 놓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고, 김세민은 채 주임을 도발한 후 바로 치고 들어간 것이었다.
‘이제 끝내야겠다.’
김세민은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헥헥거리는 채수병 주임이 앉은 소파의 뒤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고서는 한순간에 채수병 주임의 뒤로 몸을 넘겼다.
그러고는 오른팔로 앉아 있는 채 주임의 목을 감아서 졸랐다.
“아아아악!”
“…….”
“그만! 그만! 이기 뭐꼬? 누구 죽일라꼬 카나?”
“…….”
탁탁탁!
“김 주임요! 내가 졌소! 이거 좀 놓으라고!”
탁탁!
채수병 주임이 졌다는 표시로 김세민의 팔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직원들이 실망한 얼굴로 멀리 전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에게 팔을 들어 X 표시를 했다.
상황 끝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전산실에서 시너 통까지 준비하고 폼을 잡았던 발령 난 직원들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인자 우짜노? 진짜 X 됐네.”
“X발, 그라지 말고 인자 어차피 X 된 마당에 진짜로 확 불이나 싸질러 버릴까?”
“뭐, 뭐라카노 미친놈이? 다 쑈 아이가 쑈! 하는 척만 하기로 했잖아!”
“아이 X발,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상황이 바뀌었잖아! X 같은 거, X발 확 다 타 버려라!”
그러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라이터를 꺼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