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7화
#477. 무시 못 하는 백
사건 발생 닷새째.
아침에 경주 지청을 다녀온 이미라 검사가 풀이 죽은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왜 그래요? 뭔 일 있어요?”
“빨리 매듭을 지으라고 위에서 엄청 쪼는가 봐요. 지청장님이 중간에서 죽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여튼 윗사람들은 아래 부하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고 자기네 불편한 심기만 생각을 하지.”
옆에 앉아 있던 정애란 경감이 툴툴거렸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제가 오늘 중으로 화재 감식 보고서를 작성해서 검찰에 제출을 하겠습니다. 성명 미상의 방화자가 시너를 이용해서 계획적인 방화를 한 사건인데 내부 소행이 의심된다, 그렇게 일단 보고서를 내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주관적으로 수사한 사항이 아니고 CFEI 화재 감식 자격증을 가지고 첨부를 할 거니까 누가 가타부타하기는 쉽지 않겠죠. 일단 그렇게 보고서를 먼저 내고 나서 수사를 계속하는 겁니다. 지금 보험 조사관들이 신고 전화가 오면 일일이 나가서 다 신고자들을 만나 보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뭔가 나올 것입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신 주임이 전화를 받았는데 이내 김세민을 바꿔 주었다.
“과장님, 황문조 경사입니다. 한번 받아 보시죠.”
“네. 김세민 경감입니다.”
-과장님, 황 형사입니다. 지금 과장님 지시하신 대로 효자 검문소에 나와 갖고 검문 일지를 다 뒤졌는데요, 불이 나기 전날 밤에 신나를 가득 실은 1.4톤 타이탄 화물차가 새벽 03시 21분에 여기 검문소를 지나갔니더. 다행히 위험물 운반 차량이라고 심야에 근무하던 해병대원이 차량 번호와 운전자 인적 사항을 적어 놨네예. 임마가 울산에 사는 놈인데 지가 바로 울산에 내려가겠니더. 사람 찾아 갖고 바로 수갑 채워가 델꼬 와도 되지예?
“결국 찾아냈네요. 그럼 빨리 내려가서 잠수 타기 전에 현행범 체포하세요. 인적 사항 먼저 불러 주면 체포영장 발부받아 놓을 테니까. 놓치면 안 됩니다!”
-걱정 마시소. 대가리가 나빠서 그렇지 사람 손목에 수갑 채우는 것은 우리가 선수입니다. 선수! 캬! 드디어 한 건 했네!
“이 검사님, 됐습니다. 시너 통을 싣고 온 놈을 찾았답니다. 지금 황 형사가 울산으로 잡으러 갔으니까 빨리 이놈 이름으로 체포영장부터 발부해야겠습니다.”
“정말이에요? 휴, 인제 살았다. 조마조마했는데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네요.”
“그래도 여기 데려와서 자백을 받을 때까지는 보안 유지합시다. 인제 어마어마한 곳에서 백이 들어올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형사들 수사 보고서 낸 것 찬찬히 검토해서 질문지를 만듭시다. 꼼짝 못 하게 추궁을 해야 합니다.”
수사본부도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그동안에 수사 보고서를 검토해 본 결과 확실히 계획된 방화라는 데 다들 입을 모았다.
불이 나기도 전에 누전 차단기가 내려졌으며 호텔에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해 본 결과 그날은 아예 예약조차 받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투숙객을 피난시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처음부터 투숙객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미성년자를 입장시켜서 단속이 되었다는 것도 엉터리였다.
미성년자로 지목된 학교를 찾아가서 학생을 찾았더니 애초에 그런 학생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허위 공문서 작성이라……. 방범지도계 이 자식들은 나중에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이딴 짓을 했지? 너무 간이 큰데?’
울산에서 범인을 검거했다는 전화가 오고 체포해서 데리고 오겠다는 전화를 끊자마자 형사계장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보소! 보소! 영덕 과장요! 잠깐 보입시다!”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렸다.
“할 얘기 있으면 하세요, 난 비밀 얘기 같은 것은 안 합니다.”
“그라지 말고 저기 잠깐만 이바구 좀 하입시다. 너무 딱딱하게 구카지 말고.”
“아니 옆에 검사님도 계시는데 어딜 자꾸 사람을 오라 가라 그래요? 여기서 할 말 있으면 하란 말입니다. 난 아무 데도 안 갑니다.”
“하따! 이거 큰일 났네. 황문조 이 X끼는 그런 일이 있시문 나한테 먼저 이바구를 해야지 덜렁 사람부터 잡아가문 뭐를 어쩌자는 거고?”
혼자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울산에서 사람을 체포한 것이 어느 틈에 형사계장한테까지 연락이 된 것 같았다.
김세민이 끝까지 형사계장하고 상대를 안 하겠다고 하니까 잠시 후에 포북서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네, 서장님. 김세민 경감입니다.”
그래도 모시고 있었던 서장인데 차마 그것까지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일단 전화는 받았다.
-그래 김 과장, 고생이 많아. 지금 내가 뭐 때문에 전화 걸었는지는 알겠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김언적이 우리 관내 국회의원이잖아? 나도 여기 와서 몇 번 용돈 받아 쓴 것도 있고 말이야. 김 의원한테까지는 불똥이 안 튀겠지?
그래도 노골적으로 다 털어놓고 얘기를 하니 김세민은 그래도 일말의 동정은 일었다.
“아직까지는요. 일단 운전수가 들어오면 추궁을 해 보고 지배인을 불러 다시 대질을 해서 거기서도 김 의원 이름이 안 나오면 어쩔 수가 없겠지요. 무리하게 수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서장님 체면도 있으니까 제가 여기 부장검사님하고 잘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제발 내 체면 한 번만 세워 주게. 자네 그날 나한테 왔다 가고 나서 형사계 내려가서 형사계장 군기 잡았다는 소리는 내가 들었어. 나 때문에 그렇게 한 거라고 생각은 하네. 덕분에 이놈들도 이제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어. 김 과장! 정말 고맙네! 내 이 빚은 꼭 갚을게.
김세민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옆에서 정애란 경감이 입을 샐쭉 내밀었다.
“서장이 뭐라고 그래요? 봐주래요?”
“일단 알겠다고는 했지만 앞으로 누굴 조사하든지 피의자 입에서 김 의원 이름이 나오면 그때는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정애란이 김세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정말로 이 사건 해결하면 보험사에서 15억이나 받아요?”
“그럴걸요?”
“대박…….”
“걱정 말아요, 나중에 정 계장 서울 갈 차비는 떼 줄 테니.”
“정말이죠? 약속했어요? 어째 간밤에 꿈자리가 좋더라니, 그게 재물 운이었구나!”
“하여튼 애란이 너도 못 말린다. 아, 김 과장님이야 우리 서울에서 근무할 때도 화재 사건 나면 꼭 우리 몫까지 챙겨 주지 않았어? 너 학교 있을 때도 다 챙겨 줬고 말이야.”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헤헤.”
“그럼 나는?”
옆에서 이미라 검사도 덩달아 김세민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네 네, 보면 한 대가리라면서요? 당연히 챙겨 드려야죠…….”
“후훗, 역시. 아무튼 김세민은 언제 봐도 변함이 없어, 이렇게 한결같은 남자는 정말 드문데.”
“맞아요,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잖아요.”
“어휴,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시지요.”
[뚜르르륵]
“네, 아 서장님…….”
영덕서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세민이, 조용히 듣기만 해. 방금 전에 청장님한테 전화 왔는데 말이야, 그거 어떻게 좀 봐줄 수 없어?
“곤란한데요, 아직 피의자 조사도 하기 전이라…….”
-지금 이렇게 급히 전화까지 한 거 보면 모르겠어? 보통 사안이 아니라고 이게!
“아니, 울산에서 검거해서 지금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하는데 벌써 백 달고 들어와요? 그리고 이 사건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이미라 부장검사가 직접 하는 거니까 제 선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아, 옆에 이 검사 있는데, 바꿔 드려요?”
-야이 씨, 바꾸지 마! 난 이미라하고 별로 안 친하단 말이야.
“일하는데 친하고 안 친하고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 검사님. 정우진 서장 전화 받아 보세요.”
-야! 김세민이! 이 자식이 확!
김세민은 정우진 서장의 전화를 이미라 검사한테 넘겨 버렸다.
[삐리리리]
“뭐야, 왜 이렇게 갑자기 전화가 많이 오는 거야? 네.”
-형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누구신지…….”
-저 성수입니다. 거기까지 가서 고생이 많으시죠?
“아니, 갑자기 웬일이야? 정말 오랜만인데?”
-네, 장례식 때 뵙고는 이렇게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사실은 김언적 의원 사건 때문에…….
“거 참, 내가 아는 사람은 어떻게 다 알고 전화를 하라고 하냐?”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글쎄, 아직은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어. 지금 피의자 데려오고 있는 중인데 조사해서 김 의원 이름만 안 나오면 별수 있겠냐?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너하고는 친한 모양이지?”
-면식은 있습니다.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는…….
“나는 두 번 정도 만나봤는데, 포항에서는 건달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무 엮이지는 않는 게 좋겠다.”
-압니다. 그래도 같은 당에 있으니까, 또 제가 처남인 것을 알고 얘기 좀 해 달라고 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러네요.
“그래, 네 입장도 있겠지. 너한테 전화 왔었다고 얘기할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정말 은혜가 백골난망이겠습니다. 서울 한번 안 올라오세요?
“안 그래도 9월부터 6개월간 서울에서 수사 지휘 과정 교육받으러 갈 거야. 그때 시간 되면 한번 얼굴이나 보자.”
-네, 알겠습니다. 서울 와서 연락 주세요.
때마침 정우진과 통화를 끝낸 이미라 검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사건은 내가 하는데 전부 다 백이 나한테 안 들어오고 어째서 김 경감님한테 들어온대요? 정우진 서장은 뭘 잘못 먹었나?”
이번에는 부산의 남강오 1부장한테서까지 전화가 왔다.
“이거 전화기 내려놓든지 해야지. 전화 받다 세월 다 가겠어.”
정애란이 기가 찬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했다.
“네, 부장님.”
-그래, 별일 없고? 포항까지 내려가서 사건 한다고?
“사건은 검찰에서 하고 전 검찰의 의뢰를 받아서 화재 감식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쨌든 자네가 영향력은 있다고 그러더라고. 거기 부장검사하고도 친하다면서?
“네. 전에 서울에 있을 때 특수대에서 같이 근무를 했습니다.”
-그래. 난 거기 김언적 의원하고는 아무 면식이 없어. 근데 조금 전에 경북청장한테 전화가 와서는 자네한테 얘기를 좀 해 달라는 거야. 자네가 워낙이 성격이 깐깐하니까 청장도 함부로 전화하기가 뭣해서 이거 나한테까지 연락이 온 것 같은데……. 일단 자네가 알아서 하고 나한테 전화가 왔었다는 얘기만 김 의원한테 해 주면 내 체면은 서니까, 난 그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하고.
“네, 알겠습니다.”
“이제 전화 올 데 다 왔어요?”
김세민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이미라 검사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했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은 사람이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전화질이니 오늘 저녁에 바로 자백을 받아야 하겠어요. 안 그럼 내일 되면 난리 나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마지막 전화는 울진의 김순철 과장이었다.
-캬! 우리 김 과장! 억수로 큰 따와이 했다문시로! 역시 대단해! 따와이계의 거물은 이 김순철이가 아니고 김세민이야! 암! 한 건을 해도 지대로 해야지. 우리같이 잔잔한 거는 시끄럽기만 시끄럽고 돈은 안 되는데, 김 대감 따와이는 역시 통이 크단 말이지, 크! X나 부럽다!
“아니, 벌써 울진까지 소문이 난 겁니까? 전화는 왜 했어요?”
-그게 말이라, 오늘 난데없이 정보과장이 울진 원전 본부장이 날 찾는다꼬 캐사서 X나게 뛰어갔다 아이요? 평소 우리 군번으로는 원전 본부장은 만날 수가 없거든? 서장도 명절 때나 우짜다가 한번 얼굴 보는 거지 평소에 밥 먹고 하는 그런 관계도 아이라꼬. 당연히 여는 비상이 걸맀다 아이가? 부산에서 올라온 다 떨어진 김순철이를 원전 본부장이 찾는다꼬 카이 말이라.
“뭔데 그렇게 서론이 길어요? 바쁘니까 빨리 말해요.”
-본부장 하는 말이 거기 김 대감이 사건 하는 김 의원이 국회 산업자원부 상임위원인가 뭐시긴가 그렇다요. 그라모 원전하고는 직접 업무가 아다리가 된다 아이가? 그래가 김세민이하고 누가 친한지 부산 고리 원전에다가 하명을 했는데 아 글쎄, 부산 고리 원전에서 그리 보고가 올라왔다는구먼.
“뭐라고 하는데요?”
-부산에서 김세민이하고 젤로 친한 인간이 바로 이 김순철이라고 보고를 해 왔다는 거 아이요? 둘이 해운대에서도 죽고 못 살았고 진급도 같이해서 김세민이가 경남도 포기하고 김순철이하고 경북에 같이 올라가서 지금 영덕, 울진에 아래위로 나란히 자리 잡고 주말마다 만나서 둘이 술 빨고 한다고 그리 보고를 해 왔다고 하네. 캬! 이거 정말 쥑이는 소리 아이가?
“뭔 주말마다 술을 빨아요? 한 번밖에 안 마셨는데!”
-그라이 내 말이 그 말이라. 인자 앞으로 우리 둘이는 운이 탁 트였소. 본부장 말이 둘이 여기 있는 동안에 술값은 물론이고 생활비는 다 대줄 테니까 그 김 의원한테 울진 본부장이 잘 봐달라고 부탁 전화가 바리바리 온다고 딱 그 말만 해 달라고 사정을 한다. 캬! 이 일을 인자 우짜면 좋소? 키키키! 내가 마 나오는데 웃음이 막 나오는 거 안 있소? 참말로 당신하고 내하고는 잘 맞는 기라! 따와이빨도 잘 맞고, 인자 우리 둘이는 아무 걱정 없다 카이. 내가 여서 당신 몫까지 따와이해서 우리 주말마다 만납시다. 내 입으로 주말마다 초 빤다고 했시니까 약속은 지키야 할 거 아이요?
“제발 좀 정신 차리세요. 아직 피의자 조사도 안 했는데 벌써 따와이할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 옆에 검사님도 계시니까 전화 끊습니다.”
-뭐라꼬? 옆에 검사가 있어? 하이고! 내 목소리는 옆에 안 들리제?
“글쎄요.”
-아이 X발, 들리면 X 되는데……. 아무튼 따와이는 나한테 다 맡기고 당신은 잘 주물러서 작품 하나 만들어 보소? 경북에 둘이 같이 올라오기를 정말 잘했네! 캬! 오늘 와 이리 자꾸 웃음이 실실 나오노?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그라모 욕보소? 난 들어가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뭣이 챙긴다고 하더니……. 참 나.”
이미라 검사가 팔짱을 낀 채 뾰로통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 * *
타이탄 트럭 운전자 김하명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놈은 울산의 선박 도장 업체인 H 도장의 직원이었다.
벌써 데려오면서 황문조 경사가 얼마나 겁을 주었던지 의자에 앉혀서 녹음기를 틀고 타자기를 앞에다 두고 조서를 두드리니 바로 술술 불었다.
“지는 마 아무것도 몰라예. 그저 신나가 필요하다꼬 캐서 한 차에 잇빠이 싣고 여기 갖다 준 죄밖에는 없어예.”
“그래도 임마! 시너 한 차에 2백만 원 한다는데 그걸 니가 5백이나 받아 처먹었으면 뭔가 이기 범죄에 이용될 거라는 것은 짐작했을 거 아이가?”
황문조 형사가 그렇게 추궁을 했다.
“아이라예, 지는 마 이거 갖고 가짜 휘발유 만드는 줄 알았어예.”
“그래? 부탁한 건 누구지?”
“몰라서 묻습니까? 여기 지배인 하는 김성식이다 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