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4화
#494. 울면서 나오다
저녁을 봉계에서 먹고 다시 경주로 나와서 이미라 검사를 지청 뒤 관사까지 태워 주었다.
“에휴……. 인제 한참 재미있으려고 하니까 또 이별이네요.”
“그러게요.”
“어쨌든 김 과장님하고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서 좋네요.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자주 안부도 전화 주시고요.”
그러면서 이미라가 이별의 악수를 청하였다.
“네, 건강하시고요. 자리 잡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주하고 부산은 1시간 거리인데 한 번씩 얼굴이나 보여 주시죠?”
“좋죠!”
그렇게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김순철하고는 다시 영덕 경찰서까지 와서 헤어졌다.
“행정 사항에 도경에서 신고가 있다고 하니까 내일 대구에서 만나서 신고 끝나고 같이 부산 내려갑시다. X발 난 또 인자 1시간 반을 더 올라가야 한다. 하여튼 멀리도 유배 왔어. 키키! 그래도 다시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X나 기분은 좋네. 자, 그럼 난 가요?”
김세민은 밤새 가지고 내려갈 짐을 꾸렸다.
“뭔 짐이 이렇게 많아?”
올 때는 달랑 보따리 하나와 가방 하나였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졌나 생각하니 의아해졌다.
그래도 부산 가면 다시 혼자 지내야 하는데 살림살이 하나라도 버리긴 좀 아쉬워서 다 들고 내려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관사는 김세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직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과장님예, 지들 마 참말로 서운하니더. 그동안에 잘 모시지도 못하고 또 6개월씩이나 서울에 교육 가시는 바람에 아숩다 아잉교.”
“아닙니다, 처음에는 많이 낯설었는데 여러분 덕분에 편안하게 잘 지내다 갑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라고 이거는 부산 내려가시문 또 여기 생각도 많이 나실 끼고 인사할 때도 있실 기라서 지들이 강구에 있는 대게 통조림하고 복숭아 병조림, 잼하고 좀 넣었심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강구 해경 지서장 박동철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해운대 여름서 할 때 보니까 거기 미포에 있는 해경 지서장도 이름이 박동철이던데? 혹시 아세요?”
“캬! 잘 알지예. 지가 큰 동철이! 미포에 있는 금마가 지보다 아래니까 작은 동철이! 마 이래가 우리 교육받을 때부터 형아, 동생아, 하모서 지냈다 아잉교? 과장님 여 올라오실 때도 작은 동철이가 전화해가 억수로 과장님 자랑 많이 하데예? 인자 내려가시문 금마는 죽었다. 킬킬킬!”
김세민은 일일이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작별을 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인사 발령 공문을 보니 무려 서른 장이 넘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전국 발령이라 그런가…….’
발령장을 보니 계급순으로 정렬이 되어 있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부산청의 남강오 제1부장이 치안감으로 승진이 되어서 본청 정보국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김세민도 얼마 전 부산청장으로 강방천 정보국장이 승진 발령이 난 것을 보고 역시 용국 마피아의 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용국 마피아 출신도 아닌 아웃사이더 간부 후보생 출신인 남강오 부장이 요직 중의 요직이라는 정보국장에 발령 난 것을 보고 이제 용국 마피아도 힘이 좀 빠졌나? 하는 그런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외 부산청에는 경무관이 두 사람 승진해서 내려왔는데 다들 서울 시내 경찰서장을 하다가 승진을 한 모양이었고 김세민에겐 다들 낯선 이름이었다.
그리고 부산 애수회 멤버들은 다들 그대로 있었다.
서울 자원은 유배 2년이 원칙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남강오 부장이 더 끗발 있는 곳으로 갔으니까 그대로 유지는 되겠구나.’
내려가자마자 밥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리링!
“대단히 감사합니다. 영덕 경비과장 김세민 경감입니다.”
-인제 발령 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영덕 경비과장이래? 사수님, 많이 아쉬우세요?
“야 야, 지금 바빠! 짐도 싸야 하고 서장님 신고도 해야 한다고. 오늘 중으로 도경 가서 신고하고 부산에 내려가야 돼.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끊자.”
-그래도 좋잖아요? 부산 가면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고……. 에휴 부럽다!
“부럽긴 개뿔이……. 또 무슨 헛소리 하려고 아침부터 이래?”
-다른 게 아니라 부산청장으로 가신 강방천 치안정감님요. 공문 봤어요?
“응. 근데 그게 왜?”
-승진이 아니라 쫓겨서 내려가신 거거든요?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그건 또 뭔 헛소리야?”
-지금 옮긴 자리보다 정보국장이 100배는 더 나을걸요? 내보내려고 하다 보니 할 수 없이 부산청장으로 승진시켜서 내보내는 거라고요. 이제 부산청장 1년 하다가 올 연말에는 자동 나가리될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만 그렇게 아시고 너무 과잉 충성할 필요는 없다는 그 말이에요. 아마 본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예요.
“글쎄, 나는 도통 뭔 소린지……. 부산청장이 좌천되어서 가는 자리라니, 이해가 어려운데.”
-정보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자기 사람만 챙겨 요직에 앉혀 주고 하다 보니까 그런 말들이 청와대에 들어갔나 보더라고요.
“보통 다들 그러지 않나? 그 사람은 도가 지나쳤던 모양이지?”
-흠결이 그거 하나뿐이면 밀려나지도 않았겠죠. 정보국장이 끗발 있는 자리라는 이유가, 매일 아침 대통령한테만 들어가는 보고서를 올려요. VSRI(Vip Special Requirement for Intelligence)라고 하는데 그건 청장이나 민정수석도 함부로 열람을 못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대기업이나 금융권의 고위직 중에 그걸 봤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저런.”
-그래서 민정수석이 불같이 화를 내고 당장 아작을 내려고 하다가 일단 정보국장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살살 달래서 승진시켜서 부산청으로 내려보낸 거라고 보면 그게 제일 정확할 거예요. 그리고 여기 있을 때도 우리 청장님하고도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저하고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정보국장 정도 되면 저하고 사수님 관계는 안다고 봐야겠죠? 그러니까 일단 조심하시라고요. 다시 말해서 곧 나갈 사람이니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조심할 필요는 있다. 뭐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네요.
“에휴, 이젠 너 때문에 면식도 없는 사람을 적으로 둬야 하는구만. 피곤하다 피곤해.”
-에이, 별일 없을 거예요. 저야 항상 사수님 걱정뿐이니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거죠. 아무튼 부산 도착하시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까 알아보니까 기동 2중대장으로 내정되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조 경사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 이제 시작이라는 예감이 맞는 것 같았다.
영덕은 유배지가 아니고 그냥 휴양 온 것일 뿐이었고, 이제부터는 더 살벌한 세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세민은 아까 전화로 조 경사한테 자세히 물어볼 수가 없어서 정보과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 경비과장! 이거 만나자마자 또 헤어지게 되어서 섭섭한데? 도경에 신고도 해야 된다문시로? 그라모 이거 밥도 한 끼 못 하고 보내야 하는데 서운해서 우짜노?
“괜찮습니다. 그동안에 많이 먹었지 않습니까? 서장님한테만 신고하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VSRI는 뭡니까?”
-오잉? 경비가 왜 그런 걸 묻소? 고거는 나도 잘은 모리는데 마 우리 정보에서는 본청에서 SRI는 많이 내려온다 아이가? SRI는 뭔지 알제? 거기 앞에다가 VIP의 V 자 하나 더 붙였시니까 이거는 대통령이 요구해서 생산한 정보를 대통령만 보는 것이다. 마 고 정도로 알면 될 것 같은데? 이거는 본청 정보국장이 직접 챙기는 사항이라.
“그래요? 그래도 난 대통령이 직접 정보를 챙긴다는 것이 생소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고거는 내가 예를 하나 들어 볼게. 마 이번에 해외 순방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칩시다. 그런데 지난번에 해외 순방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나갈라꼬 카니까 국민들 보는 눈이 따갑다 아이가? 그라모 경찰 정보국장한테 슬쩍 오더를 주는 기라. 이거 한번 여론 조사해 봐라. 이리 나오면 우리는 위에서 SRI가 내려오면 정보 형사가 말단 동사무소에 부동산 소개소까지 다 들어가서 조사를 한다 아이가? 안기부는 돈으로 정보를 사는 구조거든? 자기네들 정보원 풀어 가지고 좀 조사해 봐라 하고 돈만 던져 준단 말이지. 그럼 이 새끼들은 전부 다 그럴듯하게 입맛대로 맞춰 가지고 오는 반면에 우리 경찰은 정보 형사들이 직접 발로 뛰어서 가지고 오는 정보라서 정확한 민심이 담겨 있다고 카는 기라. 그라이 대통령도 신임을 하는 거지. 마 고기까지만 하입시다. 경비는 아직 정보를 안 해서 1급 기밀 취급 인가는 안 받았다 아이가? 나중에 1급 기밀 취급 인가 받고 나면 내 말이 무신 뜻인가 다 자연히 알게 될 끼라. 내한테 올라왔다가 내려가소. 그래도 같은 과장이 발령이 났는데 전별금이라도 줘야지.
정보과장의 설명을 들으니 아까 했던 조 경사와의 통화가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나야 몸으로 때우면 어떻게든 되지만, 조 경사 저게 큰일이네…….’
청장실에 있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암투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아 김세민은 적잖이 염려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서장실에 올라갔다.
“충성!”
“어, 왔어?”
“다시 헤어지게 되어서 섭섭합니다.”
“너하고는 무슨 이런 인연이 다 있냐? 만나면 헤어지고 또 만나면 금세 헤어지고……. 캬! X나 웃긴다.”
“하하…….”
“어쨌든 또 만날 날을 기약하자고. 다음에는 서울에서, 어때?”
“좋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김세민이! 그동안 즐거웠고, 어딜 가든지 몸조심하고 잘 지내도록!”
그러면서 악수와 함께 가볍게 포옹을 해 주었다.
군 출신이 되어서 그런지 마치 군부대 지휘관이 해 주는 인사말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부 도경에서의 전출 신고는 1년 전의 데자뷔였다.
지방청장 표창장을 하나씩 받고 서로 헤어졌다.
“김 과장! 그라모 일단 부산 내려갑시다. 내일 부산청에서 신고한다니까 거기서 만나면 되겄다.”
“그렇게 하시죠.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김순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면서 자기 차에 올랐다.
김세민은 당장 오늘 지낼 곳이 걱정이 되었다.
작년에 올라올 때 산호가든 아파트를 전세를 주었는데 아직 기한이 남았기 때문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고 할 수 없이 김성수가 얘기한 분양소장을 찾아가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오빠! 저 연희예요.
“오, 연희야. 마침 전화 잘 했다.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려는 참이야.”
-우린 벌써 부산에 내려와 있어요.
“뭐? 아니, 갑자기 왜?”
-성수 오빠가 빨리 내려가서 집 정리 좀 하라고 해서…… 어제저녁에 부랴부랴 내려왔어요. 오늘 발령 났다면서요? 지금 아파트 청소하고 정리하고 있는데 이리로 오세요. 여기 주소가 어디냐면…….
“끙……. 그래, 일단 알겠다. 지금 대구에서 출발하니까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거야.”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 톨게이트 근처까지 오니 저 멀리 산에 세워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부산입니다.]
그 글귀를 보자 영덕에서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울면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도 울면서 나온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네. 영덕에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야.’
김성수가 내어 준 아파트는 생각보다 더 훌륭했다.
해운대에 새로 조성된 신도시 자체가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데다가 층수도 꽤나 고층인 22층이어서 해운대 바다가 마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 그냥 부산으로 확 이사와 버릴까?”
“그렇게 좋냐?”
“좋죠, 그럼! 정남향이라 그런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온다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거냐면…….”
“참 연우야, 쌍마 그룹 본사로 커피숍을 옮겼다면서? 거기는 어때?”
“너무너무 좋아, 매출이 강남서에 있을 때보다 10배는 더 나오는 것 같아. 배달도 거의 없고 사람만 몇 명 쓰면 난 사실 별로 할 것도 없어.”
“그래? 잘됐네.”
“그래서 말인데, 강남서 뒤편에 있는 커피숍은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까 연희 언니가 맡아서 계속하기로 했어. 형부도 언젠가 올라올 거잖아? 세진이도 강남에 있고 백두산 주임도 있으니까 강남 커피숍을 내놓기는 너무 아까워. 그러지 않아도 지금 팔지 않겠냐는 사람들은 줄을 섰거든. 올해는 우리 잘하면 부자 되겠어. 히힛.”
다음 날 김세민은 정복을 챙겨서 와이셔츠와 넥타이만 안에 입고 위에는 점퍼를 걸친 채 정복 윗저고리와 정모는 양복걸이 속에다가 넣어서 지하철을 이용해서 시경으로 갔다.
시경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늘은 새로 부임하는 간부들이 많아서 다들 정복 때문에 차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김세민이 막 정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뒤에서 [빵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뒤돌아보니 김순철 경감이었다.
“아, 왔어요?”
“에이 X발! 주차할 곳을 못 찾겠다. 벌씨로 몇 바퀴째 돌았는지 모리겠다. 김 대감! 어디다가 차 대야 되노?”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영도 다리 밑은 가 봤어요?”
“아 당연하지! 거기도 벌써 꽉 찼다 아이가? 아 맞네!”
김순철이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이마를 딱 하고 쳤다.
“저 앞길 옆에 불법 주차하면 되겠다! 어차피 아침이고, 오늘 발령 신고 있는 날인 줄 다 알낀데 단속 하긋나?”
“뭐, 그러는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닐 테니……. 근데 경찰관 차인지 모르고 단속하면?”
“운전석에 잠바 걸쳐 놓으면 되지! 계급장 보이게 해 가지고!”
‘하여튼 잔머리…….’
낄낄거리면서 가는 김순철을 보고 김세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경 강당은 현관을 지나 넘어가면 뒤쪽 1층에 있었는데 꼭 지하로 내려온 것처럼 어두컴컴하고 좁았다.
들어가니 인사계와 경무계 직원들이 내려와서 간이 접이식 의자를 벽에다가 세운다고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단상에 올라가 있는 인사계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이제 곧 타 시도 전, 출입자에 대한 신고가 있을 예정이니까 간부님들은 수고스럽지만 직원들하고 같이 의자를 들어서 벽에다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본청사는 장소가 협소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달려들어서 의자를 치웠다.
그러고 보니 낯선 얼굴의 경정들이 많이 보였다.
‘아, 이 사람들이 서울에서 승진해서 내려온 사람들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