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0화
#590. 은하수회
전화를 끊고 난 천세용 청장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자 조연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청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부산 동부서 정우진이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야. 안기부에서 3차장이 사전에 전화를 하고 대공 수사단 요원들을 보냈는데 범인을 못 내주겠다고 했다는구만.”
‘……알 만하네.’
“3차장이 우리 보안국장한테 전화해서 나보고 정우진이한테 전화를 하라고 했대. 이거는 뭐 하루가 멀다 하고 조용한 날이 없어, 조용한 날이……. 일단 니가 동부서에 연락해 가지고 좀 자세하게 알아봐.”
“네, 사무실 들어가면 바로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왜, 또 뭐가 있어?”
“보안 국장님 말은 최환 3차장님의 일방적인 말을 옮겼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환 차장님은 북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공산당에 의해 공개 처형되는 모습을 보고 전쟁이 나자 어린 여동생 손을 잡고 단신으로 월남했다고 해요. 그 여동생도 피난길에 잃어버리고 나서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안기부 공채로 들어갔는데 간첩 얘기만 나오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검찰 지휘 없이 3차장이 독단으로 벌이는 일인 것 같아요.”
조연희가 3차장의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를 하자 청장이 깜짝 놀랐다.
“아니, 나는 3차장 이름이나 겨우 알 정도인데 넌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다 알고 있어? 너 혹시 지난번에 참모 회의 할 때 정보국장이 은하수회 어쩌고 하는 게 다 거기서 정보가 나오는 거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날은 괜히 정보국장이 넘겨짚은 것이고요, 그냥 친목 도모 삼아 한 번씩 모이는 정도지요.”
“그래? 거기서 내 이야기도 나오나? 주로 무슨 이야길 하는데?”
“절대 안에 있는 얘기를 물어내지는 않고요, 그냥 특이한 성격의 기관장님 얘기는 한 번씩 나오기는 해요. 청장님 평판은 물론 아주 좋고요. 저도 양 언니 따라서 몇 번 가 본 게 다예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하수회.
정부 중앙 부처 각 기관장의 부속실에 근무하는 여직원들의 모임을 그렇게 불렀다.
각자의 별은 스스로 빛을 못 내지만, 그 별들이 모여 은하수가 되었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자신들도 힘들 때나 어려울 때 뭉쳐서 이겨내자는 뜻을 담고 있었고, 등록된 회원은 50명 정도였는데 꽤나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선발했다.
회장은 서울시장 부속실에 근무하는 6급 주사 나영지가 맡고 있었고, 부회장은 내무장관실 장은지 주사였다.
간사 자리는 본래 청장실 양영미가 맡고 있었으나, 지난번 회의에서 자신은 사퇴하고 후임으로 조연희를 추천했다.
조연희는 모임에 들어가자마자 각 기관장 부속실에 꽤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경(서울에 있는) 기관장 부속실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듣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상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기관장들 옷을 세탁소에 가져다주거나 커피나 차를 타고 집무실 청소하는 일이 전부였다.
업무를 통해 자신을 더 발전시킨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연희가 간사가 되고부터는 모든 일이 바닥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직급의 상향 조정이었다.
기능직 9급에서 대번에 8급으로 상향 조정을 시켜 준 것이었는데, 그 이면에는 최근 은하수회에 합류한 총리실에 근무하는 한민희 5급 사무관의 조력이 있었고 아울러 조연희가 서울시청에 출입하는 정보 형사들을 동원한 부분이 컸다.
각자의 현재 소속은 달랐지만 원 뿌리는 같았다.
즉, 서울시청 소속의 고용직 여직원으로 선발이 되어 들어온 것이었다.
고용직으로 들어와서 각 기관장실로 파견 근무 형태를 띠고 나가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월급이나 수당, 직급의 승진 등은 여전히 서울시가 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걸 조연희가 서울시 출입 정보 형사들을 동원해서 해결해 준 것이었다.
10년을 근무해도 한 단계 직급 승진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총리실과 내무장관실을 이용해서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들 여자 직원들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기관장한테 자신의 승진 문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흘러간 것이었다.
이제는 재경 정부 부처 기관장들의 모든 동향이 다 조연희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조연희는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정보 형사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청장님 비밀 지시 사항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도 조연희의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는데, 한 번은 서울시경 산하 모 정보과장이 조연희의 월권이 심하다는 보고서를 냈다가 정보국장한테 불려 가서 한 시간을 깨졌다는 소문이 나고 나서부터는 조연희를 씹는 내부 인사는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보국 정보 1계장 강명준은 어느 날 술 한잔을 먹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X발! 최인규(인사과 상훈계장)의 말이 진짜였어! 이제 정말로 조 승지가 아닌 조 승상의 시대가 되었어! 아이고! 복장 터지네!’
그러면서 만취한 상태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두드리다가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까지 돌아다니고 있는 판이었다.
경찰청으로 돌아온 조연희는 보안국장실에 연락해서 보안국장을 청장실로 불러 내리고 부산 동부서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삐삐비빅! 비리릭!
새로 바뀐 지휘관 전용 회선의 전자식 경비 전화음이 울렸다.
‘응? 이건 외부 선로인데? 그렇다면 최소 경찰청 경무관급 이상이다.’
불길한 예감에 정우진은 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전화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부산 동부서장 정우진 총경입니다.”
-아 서장님, 저예요.
“네? 누구라고요?”
-저라구요, 청장실 조연희 경사.
“뭐! 조 경사! 그럼 처음부터 이름을 이야기할 것이지, 저예요 이 X랄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무슨 김세민도 아니고 말이야, 왜 전화했어! 사람 바빠 죽겠는데.”
-에휴, 하여간 둘이 똑같다니까…….
“뭐야!”
-히히,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이걸 확 그냥! 너 사람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전화했지? 가끔 김세민이도 방에서 전화 받다가 버럭버럭 화를 낸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너 아니야?”
-……너무해! 난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해 드리려고 전화한 건데, 자꾸 구박만 하고! 그냥 끊을래요!
“야 야! 뭔데 그래! 무슨 소식! 말은 하고 끊어야 할 거 아냐!”
-…….
“여보세요? 여보세요?”
-후훗, 끊은 줄 알았죠?
“끄응……. 빨리 본론이나 얘기해. 진짜 지금 바쁘단 말이다. 안 그래도 팔까지 다쳐 가지고 힘든 사람 놀리면 재밌냐?”
-아 네. 서장님,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서 송구하지만…… 이번에 좌천당하실 것 같아요.
“……뭐,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 어디로 가는데? 지난번에 영덕으로 갔으니 청송? 봉화?”
-강남이라고 하던데요.
“강남이라. 응? 강남? 지방에도 강남이란 지명……이 있을 리는 없지. 내가 알기론 그런 관할서는 없는데?”
-왜 없어요? 대치동에 떡하니 있잖아요. 아무튼 힘내세요. 그럼 전 이만!
철커덕.
뚜-뚜-.
전화가 끊어지고 한참 동안이나 정우진은 멍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든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똑똑!
“서장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부속실 직원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정우진은 수화기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콰앙!
“이 뭔 개소리야!”
* * *
경찰청장실에서 석회가 열렸다.
먼저 주웅천 보안국장이 입을 열었다.
주 국장은 사법고시 출신이었다.
사시 출신을 보안국장에 앉힌다는 것은 고시 출신치고는 홀대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청장님, 지금 안기부 3차장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왔습니다. 부산 동부서장이 타격대까지 출동시켜 가지고 안기부 수사관들을 전부 경찰서 밖으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김세민 형사과장은 안기부 수사관의 권총을 뺏어서 아직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장하고 형사과장한테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안국장이 그렇게 말을 하고서는 청장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청장은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정보국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기 대신 정보국장더러 보안국장 입을 다물게 하라는 지시인 것 같았다.
정보국장의 경우에 매일 아침마다 대통령에게 들어가는 칠성문을 직접 작성하여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기부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안기부 차장들의 경우에는 칠성문을 올리려면 반드시 안기부 기획실장을 통해서 결재를 거친 후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재야 시절 총재 비서실장을 거친 박홍탁 기획실장의 위세가 대단하였던 것이었다.
안기부장도 기획실장을 함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보안국장!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고하면 안 되지! 아무리 간첩이라고 해도 현행법상 모든 대공 수사의 지휘권은 최종적으로 검찰에 있다는 거 몰라? 우리가 어떤 기관이야? 헌법에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기관인데 아무 근거도 없이 3차장 말 한마디에 피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 안 되지!”
“아니,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신…….”
남강오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아무튼 나는 이번 건에 대해서 동부서가 아주 잘했다고 봐. 그리고 형사과장한테 권총 뺏긴 놈도 그래. 지가 멍청해서 총을 뺏겨 놓고는 어디서 징징거리고 자빠졌어? 쪽팔린 줄 알아야지, 명색이 대공 수사관이란 놈이 온 천지에 그걸 씨불이고 다니고 말이야, 우리 같았으면 벌써 징계 때리고도 남았을 거야.”
“쿡쿡쿡.”
정보국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청장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청장님이 전화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안기부 하부 기관도 아니고 보안국만 안기부하고 업무 협조를 하면 끝날 일인데, 수사나 정보가 안기부한테 눌리면 안 됩니다. 그것도 안기부장도 아니고 차장 정도에 본청이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일단 알았다고 해! 보안국은 또 안기부하고 업무가 중첩이 되니까 괜히 쓸데없는 일로 감정이 상하게 되면 일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고. 우리 보안국 수사비도 전부 안기부에서 받아 오는데 말이야, 이 정도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나고 부산청도 지방청인데 부산청에서 알아서 하도록 우리는 손을 떼! 우리는 어디까지나 기획부서이지 집행부서는 아니지 않아?”
갑자기 청장이 경찰청의 기획부서 역할론을 들고 나왔다.
* * *
안기부 내곡동 청사.
조연희가 자신의 차를 몰고서 정문을 통과했다.
미리 2차장실에 연락을 해 둔 덕분에 신분증만 보여주니 곧 출입증으로 교환해 주었다.
“돌아가실 때 교환해서 가시면 됩니다.”
“네에…….”
회색 전투복을 입은 경비원들은 마치 기계처럼 딱딱한 움직임에 무표정을 고수하는 모습이었다.
좀 더 들어가니 정면에 로마 신전처럼 둥글게 안으로 휘어져서 세운 5층의 흰색 건물이 보였고, 정면에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슬로건이 새겨진 거대한 돌이 보였다.
‘맨날 뉴스에서 나오는 돌이다.’
주차장에다가 차를 세우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 벽에 ‘이름 없는 별’의 조형물이 보였다.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
흰색의 동판 위에 새긴 글 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큰 형태의 은색 별들이 검은 대리석에 박혀 있었다.
‘박 수사관님이라고 했던가? 전에 사수님이 말해 주셨었는데……. 여기 계시겠지? 일단 왔으니까 기도라도 하고 가자.’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숙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야, 이거 참……. 여기 처음이실 텐데 오자마자 이렇게 이름 없는 별에 묵념부터 먼저 올리시다니? 조 승지란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었군요?”
“……?”
고개를 돌려 보니 강남서 정보 투를 지냈던 정영진 경감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박길도 현 강남 정보과장이 나가면서 인수인계를 했고 정 경감도 2차장실에 있으면서 다음 경정 승진을 자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번 인사를 주도한 것은 물론 조연희의 작품이었다.
조연희가 안기부 청사에 온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 정 경감은 벌써 20분 전부터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정 계장님! 아니 이제 정 실장님이라고 해야 되죠? 오랜만이에요. 2차장님은 자리에 계시죠?”
“아 물론입니다. 조 승지께서 온다고 하니까 아까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 올라가시죠.”
“네~.”
* * *
“그러니까 조 경사, 자네 말은 두 기관이 서로 감정싸움을 하면 안 되니까 이 훈장 건으로 물꼬를 트자 뭐 그런 얘기인가?”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만……. 부장님한테는 약간 돌려서 말을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안기부 2차장 강준성 장군이 그렇게 물었다.
“어쨌거나 안기부 부산 지부에서도 밀착 감시를 했지만 놓친 것을 그래도 경찰이 끈질기게 감시를 잘하고 또 검거 과정에서도 산복도로 6킬로를 추격해서 검거하였으니 안기부도 훈장을 수여하는 것에는 찬성이다. 그러나 간첩의 잔당까지 일망타진하는 것은 경찰의 힘으로는 부족하니까 나머지는 안기부에서 더 수사를 하겠다. 경찰의 입장을 생각해서 검사의 지휘는 내려 주겠다. 뭐, 이 정도로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기부에도 검사들이 많이 파견 나와 있다면서요?”
“음…… 그러니까 네 말은, 안기부와 경찰이 서로 거래를 하자는 말이지? 훈장 줄 테니까 간첩은 양보해라. 딱 그거구먼.”
“헤헤.”
“뭐, 안 될 것도 없지.”
“정말요?”
“우리 부장님도 육사 출신이잖아? 군인들은 복잡한 것은 딱 싫어한다고, 차라리 탁 터놓고 얘기하는 게 더 좋아. 말 나온 김에, 지금 같이 가 보자.”
강준성 장군이 일어나면서 조연희한테 같이 가자고 말을 꺼냈다.
“네? 제가 부장님실에요?”
* * *
부산청장실 석회.
대공과장이 일어나 심각한 얼굴로 청장에게 보고를 했다.
“청장님, 안기부에서 난리가 났답니다.”
“무슨 난리가 나?”
“동부서에 내려간 요원들이 동부 형사과장한테 권총까지 뺏기고 서장실에 항의하러 올라갔다가 소총에 맞을 뻔했답니다. 오늘 중으로 청장님께서 해결하지 않으시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안기부 본부 대공수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저한테 전화를 걸어왔심니다.”
강갑중 대공과장은 순경 출신으로 대공에서만 근무해 온 베테랑 대공맨이었는데, 안기부에 파견 나가 있던 기간이 길어서 경찰보다는 안기부 입장에 설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기부 예산이 없으면 대공은 자체 예산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