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0화
#640. 세상이 정의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연희가 부속실 옆 소회의실에서 한지를 펴 놓고 글씨를 쓰고 있는데 열려 있는 문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최영근 실장이 들어와서 말을 걸었다.
“조 부장,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 실장님.”
“글씨를 할 줄 압니까?”
“여기 벽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좀 허전하지 않나요? 그래서 뭐라도 걸어 놓을까 싶은데 딱히 마땅한 것도 없고 관공서에 그림을 걸어 놓기도 그렇고 해서 글을 써서 걸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시도해 보는 중이에요. 나중에 못 썼다고 흉은 보지 마시구요.”
“흉을 보다니요?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저도 어릴 때 경주에서 자라서 나름 한문 공부를 하긴 했는데……. 허허, 이건 참…….”
다음 날 오후.
경찰청장이 제4기동단 청사 준공식에 다녀오면서 석회를 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고 시간에 맞추어서 각 국장들이 부속실에 모여들었다.
“아직 도착 안 했어? 그럼 거기 조 승지 끓여 주는 상황버섯 차나 한잔 할까? 크! 조 승지 없을 때 곱빼기로 마셔야지!”
남강오 국장이 부속실에 들어오자마자 너스레를 떨더니 열린 소회의실 문으로 보이는 액자를 보며 물었다.
“저거 못 보던 건데? 언제 저게 저기 걸려 있었어, 글씨체도 좋은데? 보자~ 이게 무슨 뜻이야? 어이 최 실장! 이게 뭐라는 소리야?”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내다보지 못하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이라고, 논어에 나오는 말이랍니다.”
최영근 경감이 그렇게 대답을 하자 남강오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좋은 말이네. 마음에 쏙 와 닿는데? 잠깐만, 가만있어 봐. 이게 낙관이 있네. 의암당? 의암이 누구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이거 꽤 유명한 그림인가 봐?”
그렇게 말을 꺼내자 뒤에 들어오던 경무국장이 이렇게 말을 받았다.
“의암이면 논개잖아? 논개가 진주 촉석루에서 떨어져 죽은 바위 이름이 의암이라고. 근데 누군데? 필체가 꽤 그럴듯한데?”
경무국장까지 물어보자 더 이상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최영근 실장이 실토를 했다.
“여기 소회의실 벽이 허전하다고 조 경사가 써서 붙인 것입니다.”
“뭐어?”
“저게 조 승지 글씨라고? 농담 아니고?”
“이야……. 조 승지한테 저런 재주가 있었어? 난 엄청 유명한 서예가가 쓴 줄 알았는데, 글솜씨가 저렇게나 뛰어나단 말이야?”
“안 되겠다, 저 글씨 내가 압수한다. 내 방에 걸어 놓아야지.”
“예? 아니 그건 좀…….”
“뭐 어때! 그래도 치안감 방에 걸려 있을 정도면 조 승지도 출세한 거잖아. 안 그래?”
“아니 뭐가 또 조 승지 얘기야? 출세는 또 뭐고?”
때마침 청장이 그렇게 말을 하면서 들어오자 국장들이 다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청장님, 저 글씨 한번 보십시오.”
“호오, 못 보던 건데 꽤나 잘 썼구만. 이거 누가 쓴 거야? 낙관은 의암이라고 되어 있구만?”
“조 승지가 썼답니다.”
경무국장이 조 승지 글씨라고 떠벌리고 말았다.
“뭐라고? 저게 조 승지 글씨라고?”
청장이 놀란 눈으로 글씨를 다시 쳐다봤다.
“이야, 이거 놀랄 노 자로구만. 그럼 이 낙관은 조 경사 당호인가? 의암이라?”
청장이 그렇게 물어보자 조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 아버님께서 지어 주신 호입니다.”
“명필이네. 과연 명필이야. 최 실장! 저 글씨 맘에 드니까 내 집무실에 걸어 놓도록!”
“아니 청장님, 저건 제가 먼저 찜했는데…….”
정보국장이 아쉽다는 듯 이야기하자 청장이 어림없다는 눈빛을 했다.
“이 사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정보국장 방에 걸어 놓기는 글씨가 아까워! 킬킬킬!”
* * *
부산의 형사과 소 참모 회의.
먼저 최인식 주임이 보고를 했다.
“과장님예. 저기 만복당 아들내미 아있심니까? 금마 어제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심니다. 나 원 참, 살인 교사인데 그걸 풀어 주다니 말입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옵니다.”
최 주임이 기가 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인제 시작이야. 아마도 돈으로 김봉두를 매수했겠지. 김봉두 가족이 연길에서 와서 면회를 했다면서?”
“예, 그저께 면회를 하고 나서 임마가 진술을 번복했다고 하네예. 자기는 그냥 만나서 밥 한 끼 얻어먹은 것뿐이고 별다른 지시를 받은 것은 없다고 고래 진술을 번복을 했는데, 짝퉁 시계도 당구장에서 발견이 되어서 우리가 압수를 했고 하니까 이제 꼼짝없이 송춘식이 금마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는 거라예.”
“그럼 춘식이도 별다른 자백은 안 했고?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가겠대?”
“춘식이도 말을 바꿨어예. 자기가 당구장에 놀러 온 김봉두에게 변 경사가 아줌마를 협박해서 시계를 뺏았다고 얘기를 하니까 김봉두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고거이 아주 나쁜 간나구먼! 내래 다음에 손 한번 봐줘야 하겠구먼!’ 이렇게만 말하는 것을 들었지 자기는 절대 사람을 죽이라는 소리는 안 했다고 오리발을 냅니다.”
김세민이 그 말을 듣더니 기가 찬지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이제 만만한 김봉두가 다 뒤집어쓰는 거야?”
“어데예? 김봉두도 김봉두대로 자기는 절대로 변 경사를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으며 칼로 찌른 사실은 절대로 없다고 있는 대로 오리발을 냅니다. 참말로 시상이 돈 좀 있는 놈들한테는 법도 안 먹혀들어 가니 말이라예, 없는 놈들한테만 법이 존재하는 것 같심다.”
최 주임이 이런 살인 사건에 증거가 하나도 안 나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그렇게 떠들어 대었다.
“그래서 자백에만 의지를 하면 이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 판사는 직접적인 증거를 원한다고. 즉, 김봉두가 변 경사를 직접 홍만두의 지시를 받고 칼로 찔렀다. 이런 증거 말이야.”
“동감합니다. 가끔 보면 다 떠먹여 줘야 하는 어린애들 같다니까요?”
“새키들, 그러면서 법조계에 있는 놈들은 다들 정의를 실현한다면서 웃기는 소리만 하고 자빠졌다 아이가. 뭐, 하루 이틀 일도 아이고…….”
형사들이 저마다 불평을 늘어놓았다.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경찰 일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세상이 정의로웠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가끔씩 내가 머한다꼬 이래 빡세게 구르고 있노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제법 있단 말입니다.”
“글쎄, 뭔 갑자기 그런 이야길 꺼내고 그래?”
김세민이 얼버무리려고 하자 형사들이 김세민의 생각이 궁금한지 다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정의란 말은 권력을 잡기 위한 핑곗거리가 아닌가 싶어.”
“핑계 말입니까?”
“정의라는 것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잡을 때 내거는 으레 상투적인 소리라고, 자기네들이 권력을 쥐고 나면 언제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는지 다들 눈을 감아 버리지. 이런 이야기는 해 봐야 끝도 없으니까 술 한잔 먹을 때 얘기하기로 하고, 거기 시청 청소부는 대질해 봐도 별거 없었다면서?”
김세민이 3반 오정한 주임에게 그렇게 물었다.
“예, 데려와서 저기 형사들 틈에 섞여 앉아서 보라고 했는데 긴가민가하대요. 워낙 거기가 밤이 되면 가로등도 어둡고 해서 길 건너에서는 식별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목격자도 별 신빙성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저번에 뭐야, 우리가 선로과 기관사들 휴게소에 붙인 신고 전단 있잖아. 거기선 뭐 들어온 거 없어?”
“예,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들어온 게 없어예.”
최 주임이 맥이 빠진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자자, 벌써부터 그렇게 기운이 빠지면 어떡해? 다들 힘을 내자고. 실은 말이야, 내가 그 다음 날 같은 시간대에 가 보니까 시멘스하고 부산역 철로 가운데에 높이 솟은 조명탑에 CCTV가 붙어 있더라고, 본 사람 있나?”
그러자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거 한두 대가 아일 낀데요?”
김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맞아, 여러 대가 설치가 되어 있던데 그걸 오늘 중으로 가서 확인을 해 봐. 5반 이 주임은 시멘스 CCTV를 확인해 보고 최 주임은 부산역 CCTV를 확인해 보고. 참, 부산역 CCTV는 360도로 회전을 하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우리 세관타 교통 신호기에도 CCTV가 달려 있지?”
“예 맞습니다.”
“김봉두 숙소가 송도라면서? 관제실에 가서 그날 사건 발생하기 한두 시간 전의 송도에서 시작해서 남포 사거리하고 광복동 사거리 신호기에 붙은 CCTV를 확인하도록 해. 일단 김봉두부터 확실하게 엮어 보자고.”
송도에서부터 사고 발생 장소인 시멘스까지 신호기에 붙은 CCTV를 전부 확인을 해 보라고 하자 최 주임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라이까 우리 과장님 말씸은 김봉두가 그 시간에 길에 돌아다니는 것을 찾아라~ 그런 말씸이네예. 맞심다. 그 시각에 길가에 돌아다니는 놈도 별로 없실 기고 점마는 맨날 군복 물들인 거 입고 다니이까 금방 눈에 띄겠심니다.”
“그래,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김봉두만 찾아내면 판사도 딴말 못 할 거야. 그럼 이놈이 자기가 죽겠다 싶으면 춘식이를 물고 들어가든 아님, 홍만두를 물고 들어가든 하겠지. 천천히 조여 들어가자고.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범행에 사용한 칼을 찾아야 한다는 거야. 거기서 김봉두 DNA만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의도한 대로 흘러갈 거야.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김세민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날 오후.
김세민은 서장실에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과장님, 서장님이 잠시 다녀가시래요.”
“왜? 누구 손님 와 있어?”
“네, 오륙도 호텔 강명 위원장님하고 낯선 분이 한 분 와 계세요.”
직감적으로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김세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2층으로 올라갔다.
“들어가도 돼?”
“네, 들어가세요.”
똑똑!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김세민은 문을 밀고 들어섰다.
“서장님, 찾으셨다면서요?”
서장실 소파에는 강명과 함께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누구지……?’
별생각 없이 노인을 바라보던 김세민은 노인의 눈빛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눈은 꽤 큰 편이었는데 흰자위 안에 눈동자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분명 저런 눈을 사백안이라고 했었는데.’
사백안은 관상학적으로 대단히 불길하다고 일컬으며 의지가 강하고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이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사백안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겠지만, 저토록 선명한 사백안이라니……. 섬뜩하구만.’
김세민이 노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노인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핫! 우리 과장님도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내 눈매가 쪼매 거슬리지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자 노인이 익숙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보시다시피 눈이 아주 매섭소! 고래서 남 앞에 잘 안 나서고 고마 사람 만날 일이 있어도 눈을 깔고 감추는 편인데, 역시 형사과장은 소문대로 못 속이겠구만? 허허!”
“그러고 보니 홍 회장님은 눈이 아주 무섭게 보입니다.”
진대현 서장이 그렇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홍 회장? 그럼 이자가 홍점두인가…….’
그때 강명 사장이 나서서 소개를 했다.
“소개하지. 짐작했겠지만 여기는 광복동에서 만복당 금방을 오래 하신 홍점두 회장님. 평안북도 박천 출신이시고 나하고는 북에서 같이 내려와서 여기에 자리 잡았디. 아마 여기 부산이나 경남, 경북에서 결혼할 때 예물 시계 하러 만복당 안 들른 사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부산 사람들 중에 만복당 모르는 사람 있을까. 광복동하고 부산 시내에 홍 회장이 갖고 있는 건물만 해도 수십 채는 되지 않습니까?”
“허허! 사람 참, 뭐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라노?”
“뭐가 쓸데없습니까, 다 사실인데. 나도 얼매나 있는지 잘 몰라.”
그렇게 강명 사장이 홍점두를 소개했다.
소개를 하는 동안에도 김세민과 홍점두는 서로 마주 보며 상대를 탐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몇 차례 오가자 자연스레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
“어흠! 흠!”
진대현 서장도 분위기가 불편한지 연신 헛기침을 했고, 강명 사장이 나서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자 자, 무슨 눈에서 불이라도 나가겠습니다.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이 중요한 것 아이겠심니까? 그동안에 사건 하면서 오해가 많았던 것 같고 이제 검찰에서도 아들래미 석방 되었으니까 사과도 할 겸,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오늘 이렇게 우리 홍 회장이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아입니까. 그래서 말인데예 서장님, 어디 가까운 데 가셔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면서 천천히 말씀을 나누시죠?”
“벌써요?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닌데?”
“시간이 좀 이르긴 해도 그래도 사람이 먹을 것이 앞에 있으면 분위기도 풀어진다 아입니까?”
“흠……. 형사과장, 잠깐 이쪽으로.”
“예.”
진대현 서장은 창가 쪽으로 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찰칵!
“후……. 자네 생각은 어때?”
“식사 자리는 그렇다 치고, 절대 받아서는 안 됩니다. 봉투 말입니다.”
“…….”
갑자기 진대현 서장이 말이 없어지자 김세민은 불안한 느낌에 재차 물었다.
“혹시 벌써 받으셨습니까?”
“아니, 안 받았어. 저치들, 분명 그것 때문에 온 걸 텐데……. 에둘러 거절해야겠구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김세민이 아직 수사 중이라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식사는 다음 기회에 하시지요. 아직 수사가 다 끝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홍점두가 펄쩍 뛰었다.
“아이 형사과장! 어제 우리 아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왔으면 그걸로 다 끝난 게 아임메? 뭐가 또 수사할 기 남았다고?”
“뭐 통상적인 절차라고 보시면 됩니다. 참, 강 위원장님.”
“응? 뭡니까?”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오?”
“아까 고향이 평안남도라고 하셨지요?”
“그렇디. 내래 평안남도 출신이오.”
“평안남도에서는 누가 ‘내 눈앞에서 싹 치워라.’라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이 있는 거라고 하던데, 혹시 아십니까?”
“아, 내 눈앞에서 싹 치우라우! 이거 말임메? 그야 문자 그대로 아니겠소? 눈에서 안 보이게 해라, 뭐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디.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인데, 그런 말은 또 어떻게 알았소?”
강명의 말에 김세민이 알았다는 표정을 하자 홍점두가 그만하라는 듯 강명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욱! 아 이 사람, 갑자기 왜 그래?”
“강 회장, 당신 오늘 너무 말이 많구만 기래! 농담이오. 다 농담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