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6화
#656. 진공묘유
조연희가 양영미와 함께 수레에 찻잔을 가득 담아서 밀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런데 한참 웃고 있던 청장이 조연희가 들어오자마자 돌연 입을 닫고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짙은 감청색 정복에 부착되어 있는 약장과 대통령 기장들이 반짝이면서 한껏 조연희를 빛내 주었다.
“어흠.”
청장이 헛기침을 하자 이때다 싶어서 정보국장이 나섰다.
“청장님, 저렇게 입고 있으니까 보기 좋지 않습니까? 저 옷 색깔이 이번에 경리에서 새로 바꾸려고 하는 감청색이랍니다.”
“그 전보다는 색이 좀 밝은 것도 같은데?”
청장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경무국장이 이때다 싶어서 부연 설명했다.
“맞습니다. 전에 입던 옷은 검은색이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경찰 옷 하면 항상 검은색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저렇게 좀 밝은 청색으로 입으니까 훨씬 산뜻하고 보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경무국장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 청장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저건 조 경사 정도 되니까 저렇게 단정하게 입어도 티가 나는 것이지, 안 그래? 쟤한테 뭘 갖다 입힌들 안 어울리겠냐고.”
“…….”
“생각을 좀 해 봐, 길에 서 있는 교통순경들한테 입히면 검은 옷이나 저 옷이나 차이가 날 게 없다고. 전부 제대로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펑퍼짐하게 입고 다니는데 옷 색상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그리고 또 욕은 얼마나 퍼부어 대겠어? 청장이 바뀌었다고 한 밑천 뽑으려고 만만한 우리한테 옷 한 벌 해 입으라고 몸에 맞지도 않는 옷 던져 주고 청장은 기둥뿌리 뽑아 간다고 말이야. 난 여기서 나갈 때 나가더라도 그런 욕을 뒤통수에다 먹으면서 나가긴 싫단 말이지.”
청장이 대놓고 직원들의 불만이 뭔지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잘랐다.
갑자기 청장의 입에서 옷 가지고 따와이하기는 싫다는 말이 나오자 경무국장이나 정보국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청장 앞에 먼저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 조연희가 순서대로 차장과 정보국장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데 남 국장의 옆에서 찻잔을 든 손을 내밀자 오른 손목에 대통령 하사품인 손목시계가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어라? 너?”
“왜 그러세요?”
“야, 정복 안에 왜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거야?”
“아, 요즘 날이 좀 더워서…….”
“이게 진짜 누굴 바보로 아나, 너 그 대통령 하사품 시계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긴팔 와이셔츠 안 입고 반팔 입고 있는 거지?”
“후훗.”
“하! 이게 누구 보골 채우려고 작정을 했나?”
“국장님, 이 용정차는 아주 뜨거울 때 후후! 불어 가면서 드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대요. 그래서 이 용정차만은 꼭 차 뚜껑이 있는 찻잔에다가 마신대요. 한 모금 마시고는 꼭 차 뚜껑을 닫으셔야 해요.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조연희가 그렇게 정보국장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청장은 조연희가 쓴 액자의 글씨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인무원려 난성대업(사람이 멀리 내다보지 못하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이라고 했나? 저 글이 안중근 의사가 쓴 것이라고 그랬지?”
느닷없이 청장이 그렇게 물어보았다.
“네, 원래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와 있는 말인데 안 의사님께서 저렇게 쓰셨나 봐요. 논어에는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 :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필시 가까운 곳에 걱정거리가 있다)라고 위령공편에 적혀 있다고 해요.”
조연희가 그렇게 설명을 하자 다들 어이가 없는지 황당한 표정을 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뭐긴요, 정보국장님. 전 청장 부속실 직원이잖아요.”
“너 무슨 조선시대에서 살다가 왔냐? 논어를 다 알아?”
“뭐, 성장 환경 때문이랄까요.”
그러자 청장이 정보국장을 막고 나섰다.
“시끄럽고, 이봐 조 경사. 그래서 뭐야, 하고 싶은 말이.”
“네? 어떤…….”
“몰라서 물어? 경찰 제복 바꾸는 것 말이야. 니 의견이 어떤지 한번 말해 보라고.”
“글쎄요, 제가 이런 말을 드리기는 뭣하지만…….”
청장이 괜찮다는 듯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직원들 얘기를 들어 보면 다들 한 업체에서 독점을 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경찰복을 한 업체에서 제작을 하다 보니 옷이 제대로 제작이 안 되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시경만 경찰청하고 같이 일괄 제작을 하고 나머지 지방청은 예산만 내려 주어서 각자 지방청별로 옷 제작 업체를 선정해서 근무복도 직원들별로 다 맞추어 주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업체 측도 물량 부담이 줄어드니까 좀 더 신경 써서 제작을 하게 되고 전처럼 대, 중, 소로 일괄 제작을 하지 않아도 되니 훨씬 옷맵시도 날 것이고요. 그리고 전투복을 기동복으로 바꾸는 것도 데모 현장에서 직접 근무하는 경찰관들 의견을 들어 보고 이왕 새로 바꾸는 거니까 좀 더 현장의 의견이 반영이 되었으면 하더라고요.”
조연희가 진압복 얘기를 꺼내자 청장이 몸을 세웠다.
자신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이야?”
청장이 다그쳐 물었다.
“예컨대 지금은 일괄적으로 대나무 조각을 진압복에 넣는데 그게 무겁고 안에 있는 대나무가 돌에 맞아서 깨지면 나무 파편이 몸을 찌른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가벼운 강화 재질로 만든 플라스틱 같은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고 하니까, 직원들 의견도 다양하게 들어 보고, 기본 옷감은 한 군데서 제작을 하고 나머지 개인별 맞춤은 각 지방청별로 해서 나중에 품질 평가단을 감찰에서 각 지방청별로 내려보내 확인하게 해 보면 비난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전 잘 몰라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조연희가 거기까지 얘기를 하고 웃으면서 수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봐 경무국장.”
“예, 청장님.”
“방금 쟤가 이야기한 것 있지? 그거 그대로 기안해서 결재 올려.”
“예? 정말 그렇게 하시게요?”
“못 들었어? 지방청에도 전달해, 우리가 기본 피복 색하고 디자인만 주면 나머지는 거기서 알아서 직원들 옷 맞춰 주라고 하라고. 아무튼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다시는 시민들 입에서 길에 돌아다니는 경찰관 복장이 후줄근하다느니 이런 소리가 안 나오게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예!”
“네, 알겠습니다.”
경무국장도 전처럼 경찰청에서 일괄 제작을 해서 내려보내면 따와이 액수는 커지겠지만 청장이 난색을 표하는 일을 마냥 추진할 수가 없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어쨌든, 서울시경 하나만이라도 숫자가 많으니까 제대할 때 고급 승용차 한 대는 따와이해서 마누라하고 경치 좋은 곳에 여행이나 다닐 수 있겠다는 마음속 계산이 섰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침 참모 회의를 마치고 부속실로 나오는데 이진철 차장이 속으로 장난기가 동해서 조연희에게 물었다.
“이봐, 조 승지.”
“네?”
“넌 어떻게 청장님 속마음을 읽었어?”
“무슨 말씀인지?”
“청장님께서 검정색 제복을 바꾸고 싶다고 너한테 미리 말씀이라도 하신 거야?”
“설마요, 청장님께서 어디 그런 말씀 하실 분이신가요. 이거 한번 보세요. 어제 청장님 퇴근하시고 나서 제가 휴지통을 정리했는데 이게 나왔거든요?”
조연희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민 것은 청장이 낙서를 한 종이였는데 그 종이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란 글이 여러 번 써져 있었다.
“어라? 이게 뭐야? 진공묘유? 이게 뭔 뜻인데?”
이진철 차장은 조연희가 내민 종이에 쓰인 글씨를 읽기는 읽었지만 무슨 뜻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요새 청장님이 화엄경을 탐독하시잖아요? 거기 자주 나오는 말이거든요?”
“아 진짜 장난하나,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마음을 비우면 묘한 이치가 보인다. 의역하면 그 정도로 되나? 저도 쪽지 보고서 찾아봤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네 말은 이미 청장님도 옷 색상을 바꾸고는 싶은데 누군가 나서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시한 것이라는 말이네?”
그때 청장실에서 청장이 조연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조 경사! 잠깐 들어와 봐!”
“네~ 저 청장님이 부르셔서 들어가 볼게요. 그럼.”
조연희는 어리둥절해하는 국장들을 뒤로하고 청장실로 들어갔다.
* * *
오후가 되자 조연희는 당분간 정복을 입고 다니라는 정보국장의 지시도 있고 해서 청사 1층의 민원실에 내려갔다.
민원실은 각 지방청에서 올라오는 문서 수발 체송 직원들이 모이기 때문에 항상 혼잡스러웠다.
부속실에서도 청장실 문서함에 새로운 서신이나 연락이 온 게 있는가 싶어서 매일 내려가서 들고 오고는 했다.
원래는 박철 이경이 해야 하는 일이나 오늘은 새로 맞춰 입은 정복을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민원실장인 박미연 경감과 수다도 떨고 싶어서 내려온 것이었다.
박미연 경감은 순경으로 들어와서 경감까지 승진을 했기 때문에 단연 여경들한테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어느덧 나이도 50을 훌쩍 넘어 청에 근무하는 여경들한테는 듬직한 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충성!”
“충! 성!”
조연희가 내려가자 지방청에서 올라온 체송 직원들이 다들 조연희를 보고서는 부동자세로 서서 구호를 붙이며 거수경례를 한 후 복도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연희의 얼굴을 잘 모르는 체송 직원들은 멀리서 보는 조연희의 정복에 약장과 오른쪽에 총경들만 부착하는 대통령 기장, 그리고 어깨에 총경과 같은 네 개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본청에서 근무하는 총경급 여경인 줄 다들 착각을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충성! 충성!”
‘어라? 왜 나한테 다들 경례를 하지?’
“충성!”
‘에라이 모르겠다.’
“수고해요!”
무시하려 해도 너무 자기 쪽을 보면서 경례를 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같이 거수경례를 받았는데 조 경사가 지나가면서 계급장을 자세히 본 직원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뭐야? 경사잖아?”
“이런 병X 같은, 아휴! 쪼다같이!”
그걸 보고 있는 본청 직원들도 낄낄거리면서 지나갔다.
“저 멍청한 자식들 좀 보게, 경사가 경사한테 경례를 다 하네.”
“참 조 승지 덕분에 좋은 구경 한다!”
“조 승지가 아니고 조 총경이네, 조 총경!”
이제 조 승지란 칭호와 함께 조 총경이란 칭호도 같이 붙어 다니는 조연희였다.
* * *
김세민은 강갑도 주임과 오독새를 데리고 영락공원 부검실에서 방금 막 부검을 마친 서원수 박사와 의견을 나누었다.
“박사님 소견은 어떻습니까?”
김세민이 먼저 그렇게 물어보았다.
“하! 이거 나도 30년이 넘게 변사체를 다루었지만 이번 건은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김 과장도 무술을 어느 정도 한다니까 알겠지만 천돌혈을 이걸로 찔렀잖아? 그런데 피 한 방울도 안 나고 사람이 절명했다니까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기라. 이거는 뭐 무협지에 나오는 전형적인 살수들의 짓 같은데 말이라, 이것도 자세히 함 보라고. 그냥 평범한 굵은 철사를 뾰족하게 갈아서 만든 거라고. 이걸 가지고 한 방에 보낸다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보나 마나 해당화야.’
김세민이 재차 물었다.
“그럼 독극물이나 다른 것이 사인이 된 것은 없는 거죠?”
“없어! 그냥 깨끗해! 내 생각에 죽은 사람도 순간적으로 아무 고통 없이 심지어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죽었을 거라고. 천돌혈이라는 데가 뇌에서 내려오는 신경의 중추하고 폐로 내려가는 기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급소거든? 그러니까 한 방에 숨통을 막고 신경 중추를 끊어 버렸으니까 피가 안에서만 흘렀겠지. 그래서 조금 전 배를 열었을 때 피가 고여 있다가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지……. 으이그! 인제 나도 이 짓을 그만할 때가 되었나 보다. 별 시신을 다 보게 되네. 츳츳!”
처음에 부검을 하기 전에 배가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을 보고 죽은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빨리 복수가 차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메스를 대자마자 푹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던 것이었다.
가까이 서 있던 강 주임은 옷에 피까지 튀어서 너무 놀란 나머지 토를 하느라고 급하게 밖으로 튀어 나가기도 했었다.
부검을 마치고 가검물은 국과수로 보내라고 지시를 해 놓고 김세민은 다시 경찰서로 돌아와서 외사계 일본 영사관에 출입하는 전기주 경사를 불렀다.
시경 외사과에서도 영사관을 담당하는 직원이 있지만 동부서 자체로 관할에 일본 영사관이 있기 때문에 별도로 출입하는 직원을 두어서 영사관 측의 승낙을 받은 것이었다.
“과장님, 살인 사건 때문에 고생 많으시지예?”
전 경사는 외사 경력이 길어서 그런지 사람이 사근사근했다.
영사관 측의 배려로 이번에 부부 동반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도 하곤 했었다.
“아 전 부장, 영사관에서 CCTV 보여 주겠답니까?”
김세민이 그렇게 물어보자 전 경사가 당연한 걸 뭘 물어보느냐고 말했다.
“당연하지예. 점마들도 나라에 왔으모 우리 법을 따라야 한다 아입니까? 지가 오늘 중으로 다 제출을 하라고 했시니까 지금 한창 복사한다꼬 난리 피웁디다.”
“아니 우리가 가서 눈으로 확인만 하고 증거로 쓰일 부분만 복사하면 되는데 뭐 하러……?”
그렇게 말을 꺼내자 전 경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마 그냥 놔두시소. 한 번씩 이런 일로 비상을 걸어야 점마들도 경찰 무서운 줄도 알고 여러모로 한 번씩 군기도 잡고 그래야 하는 기라예. 점마들도 지금 난리가 났다고 카던데……. 그란데 너무 모션이 크다는 말이지예. 그기 좀 이상하기는 이상한데 말이라예…….”
“모션이 크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아, 특별한 거는 아이고예, 이건 제 느낌인데 점마들도 무슨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예…….”
전 경사가 말끝을 흐리자 김세민이 재차 물었다.
“지금 전 경사 말은 영사관도 이번 사건하고 관련이 있다, 그런 말입니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