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2화
#772. 사주
청장은 조연희와 김세민이 나눈 이야기가 꽤나 궁금한 듯한 눈치였다.
“아 네, 심가람과 길영을 죽인 범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김 과장은 아마 청부 살인일 거라고 하더군요.”
“……!”
청부 살인이라는 말에 두병인 회장의 얼굴에 잠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조연희가 두병인 회장의 얼굴을 슬쩍 봤더니 애써 눈을 피하면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라도 얼굴 표정을 숨기고 싶겠지…….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봐라.’
“청부 살인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형사국장이 조연희에게 그렇게 물어왔다.
“일단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심가람이 자주 다니는 나이트에서 손님으로, 그리고 아즈텍 호텔에서는 안마사로 위장해서 범행을 저질렀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피해자의 주변인들에게 얼굴을 노출했다는 점입니다. 심가람의 경우에는 사촌에게, 길영의 경우에는 호텔 직원들 및 경호원들에게. 이 점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범인은 한국에 얼굴이 팔리는 것 따위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맞아……. 과연!”
“송일남 사건하고는 결이 다르단 말이지?”
정보국장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조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께 부산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우에는 범인이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모습이었습니다. CCTV에 인상착의가 어느 정도 드러나긴 했고, 화장실에서 범인을 목격한 3명의 손님에게도 사정청취를 했지만 아쉽게도 3명 다 만취한 상태라 크게 특정할 만한 부분은 찾지 못했지요. 화면도 선명하지가 않았고요.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은 청부 살인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범인이 누군가의 부탁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특정 목적을 가지고 저지른 것이라고 봐야지요.”
“그래서, 지금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두병인 회장이 조연희에게 그렇게 물었다.
“김 과장의 말대로 이게 정말 청부 살인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부를 한 사람을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청부를 한 사람이 나라는 이야기지? 아까부터 자꾸 선을 넘는 것 같아 듣기가 불편하구만. 안 그렇소, 청장?”
두병인 회장이 그렇게 청장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청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팔짱만 끼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봐요, 청장! 저런 소릴 면전에다 대놓고 하는데, 계속 보고만 있을 거요!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두병인이 옆에서 그렇게 악을 쓰는데도 청장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조 경사, 계속해.”
“예, 청장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건 수사를 해 보면 알게 될 일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심가람과 길영의 경우에는 여기 계신 두병인 회장님과 송춘재 회장님을, 이번 부산 아테나 클럽에서 있었던 송일남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반대로 심 의원과 길 회장을 의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지요.”
조연희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청장과 정보국장, 형사국장 중에서 누구 하나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심중에는 조연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두병인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자네 상상이고, 아닐 가능성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자고. 심가 놈과 길가 놈 말고, 우리 아들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놈이 누구야?”
“심 의원이나 길 회장이 사주한 것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죠.”
“그게 뭐지?”
“지난번에 박기삼 의원과 심 회장을 테러하고 함무라비 서문을 현충원 벽에다 써 붙였던 사건, 혹시 기억나십니까?”
“……!”
두병인 회장은 폭발로 인해 숯 검댕이 된 박기삼 의원의 차, 그리고 반병신이 된 채 병원에서 폐인이 된 심 회장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었다.
“저런, 괜찮습니까? 많이 놀라신 모양이네…….”
청장이 두병인 회장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봐, 조 경사!”
“네, 청장님.”
“두 회장한테 차 한잔 더 내드리지.”
“알겠습니다.”
“아아, 차는 됐고……. 이봐요, 청장.”
“네?”
“내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 극악무도한 놈들에게서 우리 자식을 좀 제발 지켜 주시오. 제발…….”
조연희의 입에서 테러 단체 이야기가 나오자 겁을 먹었는지 두병인 회장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이봐, 형사국장.”
청장이 형사국장을 부르자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회장을 보고 이야기했다.
“예, 주변 파출소하고 관할서에다가 자택 근처 순찰은 평소보다 좀 더 강화하라고 전달해 두지요. 그리고 앞서 살해당한 심가람과 길영은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고, 송일남의 경우에는 피해자를 납치했기 때문에 그렇게 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당신네 아들 두송죽이도 그걸 보고도 못 본 척 같이 낄낄대고 놀았으니 똑같은 쓰레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굳이 죽이기까지야 하겠습니까.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뭐, 뭐야? 쓰레기!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네, 다 했습니다. 솔직히 그 말도 엄청 순화해서 한 겁니다. 청장님 앞이라…….”
그러자 천세용 청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우리나라가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인데, 하고 싶은 말도 못 해서야 쓰나!”
그러자 두병인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당신들 미쳤어! 내가 분명히 처음에 이야기했지! 청와대 들어가서 대통령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그러자 천세용 청장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저기, 아까부터 자꾸 대통령 운운하는데 말입니다. 좀 전에 조 경사가 하는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무슨 이야기!”
“청부 살인 건 말입니다. 말로만 아니라고 한다 해서 우리가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사람들이 아닌 건 알고 있지요? 그리고 지금이야 대통령이 당신 뒤를 봐 준다고 해도, 당신 혐의점까지 전부 알게 된 후라면 어떨까?”
“……!”
“당장이라도 여기 형사국장더러 취조를 시작하라고 하고 싶지만 일단은 대통령 백을 달고 왔고 잘 봐주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잠자코 있는 겁니다. 안 그랬으면 확 그냥…….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야, 그 점을 꼭 명심하라고. 조 경사! 손님 가신다! 배웅해라!”
그러고는 청장이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며칠 후, 동부경찰서 참모 회의.
장현성 정보과장이 과장들한테 봉투에 든 티켓을 나누어 주었다.
“이게 다 뭡니까?”
“해운대에 이번에 새로 판테온 호텔이라꼬 호텔이 개장을 했심니다. 다들 들어는 보셨지예?”
“그 뭐고, 사장이 일본놈이라 카든데?”
“하핫, 일본놈이라 카모 좀 글코예, 재일 교포라 캅시다. 혹시나 나중에 호텔 가가 사장 만날 일 있거든 그 앞에서 쪽발이 카고 쨉스 카고 일본놈이 어쩌고 하면 안 됩니데이? 아무튼 그 양반이 일본에서 빠칭코로 돈을 X나게 벌었는데, 진짜 사장은 아무튼 그 일본놈…….”
“우하하핫!”
장현성 정보과장이 말실수를 하자 주변에서 대번에 웃음이 터졌다.
“저 봐라, X나 잔소리하드만 지도 일본놈 구카면서!”
“부산놈들은 일본놈 소리가 입에 배 가지고 잘 몬 고친다니까네?”
“자자, 그 뭐 예? 사람이 실수도 좀 할 수 있고 하는 기지……. 아무튼 그기 아이고! 진짜 사장 말고 바지 사장이 있는데, 실제 운영을 맡은 사람 말입니다. 그 양반이 예전에 부산에서 경찰 생활을 했답니다.”
“오오…….”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첨 듣는데? 니는 들었나?”
“아니?”
“해운대서에서 경위까지 하고 나왔다고 카데예. 그래 가지고 부산 시경에 과장급들한테 한번 와서 목욕이나 하라꼬 돌린 사우나 티켓이라예. 거기 호텔이 층수가 애법 높아 가지고 사우나에서 바다가 잘 보인다 캅디다. 시간 내서 한번 갔다 오시소.”
그러자 경무과장이 나서서 첨언을 했다.
“아~ 어제 각 서 정보과장 회의를 지방청에서 했다고 하드만 이거 호텔 사우나 티켓 나눠 주려고 그랬는 모양이네. 크~ 그래도 정보가 좋기는 좋다. 지방청 회의에서 이래 사우나 티켓도 나눠 주고 말이지. 어이, 근데 서장님은? 서장님 것은 없나?”
경무과장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진대현 서장이 멋쩍은 듯 말을 꺼냈다.
“아, 나도 받았어요. 난 사우나 티켓 외에 숙박권이 두 장 더 있던데……. 한 장에 1박이니까 2박 3일인 셈이지.”
그러자 이인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정하고 총경 차이가 그렇게 심하게 나는군요. 에휴, 난 어느 세월에 숙박권 받아 보나?”
이인철 교통과장이 그렇게 말을 하자 경무과장이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
“야! 교통! 그라모 임마, 총경하고 경감하고 맞먹자 이 말이가! 이 자석 이거는 젊은 놈이 고생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맞먹을 생각만 하고!”
평소에 사람 좋기로 소문난 진대현 서장이라도 말이 너무 나갔다 싶어서 참모들 중 가장 고참인 경무과장이 공개적으로 교통과장한테 주의를 준 것이었다.
삐삐삐삑!
갑자기 경찰서장 지휘관 전용 경비 전화가 울렸다.
진대현 서장이 허리를 바로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동부서장입니다.”
-네, 지방청장님 일제 전화입니다. 서장님이 직접 전화 받으시기 바랍니다. 서장님이 안 계신 서는 경무과장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부산 지방청장 부속실 서진이의 음성이 상냥하게 들렸다.
-그럼 서장님들 점호해 보겠습니다. 중부서장님!
서진이가 중부서장을 호출했다.
“중부 나왔다! 바쁘니까 뒤에 서장이란 소리는 빼고 서만 불러도 된다.”
중부서장이 다 서장인데 뭐 하러 뒤에 존칭을 붙이느냐고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동래!
“서장!”
동래서장이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꾸를 했다.
명색이 총경 서장인데 부속실 여직원한테 점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영도……. 강서!
“서장!”
-네, 다 나오셨네요. 그럼 청장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뽁뽁!
-청장님! 각 서장 일제 다 나왔습니다.
-빠진 놈 없어?
-네에, 다 나왔어요.
‘놈이라니?’
‘방금 놈이라고 한 것 맞아?’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다들 그렇게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가운데 청장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내 청장입니다. 방금 본청장실에서 일제 전화를 받았는데 오늘 새벽에 우리 본청장님 자당(남의 어머니를 높여 이르는 말)께서 별세하신 모양입니다. 청장님 말씀은 조문을 안 받겠다고 하니까 그냥 참고로만 알고 있으라고 내가 연락하는 거고, 무슨 말인지 다들 알죠? 혹여나 장례식장에 나타난다거나 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꼭 내가 이런 말까지 노파심에서 해야 되고 말이야, 에이 X발…….
‘X발?’
‘방금 X발이라고 한 것 맞아?’
‘내가 또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아무튼 다들 눈치껏 알아서 하도록, 이상.
철컥!
전화를 끊고 난 서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무과장이 물어왔다.
“무슨 전화입니까?”
“아 그게, 청장님이 모친상을 당하신 모양인데 절대 조문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대. 근데 지방청장님이 마지막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각자 알아서 하라고. 이게 뭔 말이야? 뭘 알아서 하라는 거지? 경무과장은 이게 뭔 소린지 알겠어요?”
진대현 서장이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그렇게 경무과장한테 물어보았다.
“하이고 참, 서장님도 이리 순진하시기는…….”
“내가? 왜?”
“그거야 뻔할 뻔 자 아닙니까? 조의금 보내라는 소리지요. 장례식장에 요란하게 나타나지 말고 봉투만 알아서 보내라는 소리인데 그걸 뭐 그리 어렵게 알아듣습니까?”
경무과장은 대번에 조의금 봉투만 보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서 그렇게 답변을 했다.
띠리링!
다시 경비 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동부서장입니다.”
-아! 동부! 내요, 부산진!
부산진 장춘식 총경이었다.
“아 네, 형님. 아침부터 어쩐 일로?”
-방금 청장님 일제 전화 받았제? 당신이랑 나는 당신이 처음에 후보생 순환 보직 할 때 같이 부산진에서 형사 주임 하던 사이 아이가?
“네 뭐, 당연한 말씀을…….”
-그라이 본청장님 조의금을 내 당신한테 보낼 테니까 거기 김세민 경감이라고 있제?
“네, 우리 형사과장입니다만.”
-본청장 부속실 조 승지 사수라고 하던데, 내가 지금 조의금 봉투를 보낼 테니까 당신이 알아서 내 몫까지 전달해 주소. 수고하고.
딸깍!
“여보세요, 여보세요? 허 참, 아니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디립다 끊어 버리나 그래? 어이가 없어서 원…….”
띠리링!
다시 경비 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동부서장입니다.”
-동부? 내요, 중부!
김인주 중부서장이었다.
“아 네, 선배님!”
후보생 1기 선배인 만큼 같은 총경이라도 깍듯이 존칭을 썼다.
-내 우리 경무계장 편에 본청장 조의금, 그쪽으로 보냈으니까 동부서장이 알아서 조 승지한테 전달해 주소. 그럼 들어갑시다.
“네? 잠깐만요! 선배님! 여보세요!”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이거 큰일 났네.”
“무슨 일입니까, 서장님?”
“누구한테 온 전화입니까?”
“아니, 부산진 서장하고 중부서장인데, 다들 나한테 조의금 봉투를 보낸다는 거야. 이봐, 형사과장!”
“예, 서장님.”
“이거 당신 통해서 조 승지한테 전달하라는데, 가능해? 난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네.”
당황한 진대현 서장이 김세민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자 김세민은 딱 잘라서 대답했다.
“아니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다들 막무가내로 조의금을 내겠다고 밀어붙입니까?”
“이미 보냈다는데 어떡하나, 그럼…….”
“서장님, 그냥 받지 마십시오. 이거 해 준다고 서장님한테 득될 것도 하나 없고, 혹시나 나중에 문제 생기면 서장님이 다 감당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정보과장도 한술 더 떴다.
“옛날부터 그랬어, 우리 조직은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겠다고 설치니 말이야. 지금 총경 승진 인사권을 본청장이 가지고 있으니까 전국의 경정급이나 총경들은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의금을 보내려고 기를 쓰고 있을 거야. 이봐, 형사과장.”
“예.”
“그냥 서장님하고 한 며칠 휴가라도 내고 도망가 버려! 그게 차라리 속 편할 거야.”
“그럼 문제가 더 심각해질 텐데요.”
“뭐 맨날 똑같은 일만 하느라 지쳤는데, 가끔은 다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구경하는 것도 재미 아니겠어? 당장 오늘 오후 되면 정신없을 거야. 크크큭.”
김세민도 속으로는 진짜 그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진짜 이참에 휴가나 가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