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4화
#784. 나보다 더
조연희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주첨기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습다는 표정으로 껄껄 웃는 모습이었다.
“하하, 물론 잘못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지. 근데 지금은 너무 앞서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우리를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당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앞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비싼 밥 먹고 귀한 시간 쪼개서 비행기까지 타고 생판 모르는 동네에 와서 만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앞에 앉혀 놨는데,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덧붙여 말하자면 그동안 주미연이 부산에서 벌여 놓은 사업은 모조리 강제 처분을 할 겁니다.”
“강제 처분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문을 닫는다고요.
부산에서 따님이 벌여 놓은 사업이 다 망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조연희가 일부러 따님이란 말을 중간에 섞어서 주첨기의 반응을 떠보았더니 주첨기가 마치 독사같이 눈을 뜨고 조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아주 매섭고 날 선 표정이었는데, 마치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간해선 쉽게 기가 꺾이지 않는 조연희였지만 주첨기의 눈을 계속 쳐다보는 것은 꽤나 부담이 되었다.
‘무슨 사람 눈이…….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질 수는 없지.’
조연희도 속으로는 겁이 났지만 마음을 다잡고서 테이블 밑으로 무릎에 얹은 손을 꽉 쥐고는 주첨기의 눈을 망설임 없이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길 몇 분.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조연희에게 주첨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흠, 좋은 눈빛이야.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지.
그래, 설중매를 내어 달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사실 나도 설중매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데.”
“분명 홍콩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물론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을 수도 있고, 워낙에 몸을 숨기는 데 능한 자라…….”
이번에는 주첨기가 조연희를 한번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
잠깐 곰곰이 생각을 하던 조연희는 뒤에 앉아 있던 홍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홍은수가 얼른 일어나 조연희 쪽으로 왔다.
귀를 가까이 대라며 손짓을 하자 홍은수가 허리를 굽혔고, 귓속말을 몇 마디 건네자 홍은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주재관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홍은수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궁금함을 참다못한 주첨기가 조연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저 사람들은 어딜 가는 거죠?”
그렇게 묻자 조연희가 알 듯 모를 듯 입가에 조그맣게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어머, 두목님 정도 되시는 분이 그것도 모르세요?”
그러자 옆에 있던 주첨기의 부하들의 인상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을 삼가는 게 좋아.
감히 회주님께…….”
“깡패들 주제에 적당히 알아들을 정도로만 부르면 됐지, 뭘 더 바라요?
그리고 나 지금 당신네 두목님하고 대화 중이잖아요. 말 끊고 중간에 끼어든 당신이 싸가지는 더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조연희가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그렇게 쏘아붙이자 주첨기가 손을 살짝 들어 부하들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말을 계속하라는 듯 조연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뻔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면서요.
그러니 우리도 쓸 수 있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조연희가 주미연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주첨기가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찾을 수는 있소.”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셨어야죠.”
“…….
아무튼 좋아, 오늘 당장 연락해서 우리가 붙잡을 테니까 주미연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주개치!”
“예, 회주님.”
“당장 설중매를 찾아라.
그리고 내 명령이라고 하면서 한국 경찰에 자수를 하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주개치가 주첨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잠깐, 거기 아저씨! 멈춰요.
누굴 지금 바보로 아시나…….”
조연희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주첨기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또 뭐가 문제요?
방금 다 들었지 않습니까. 내가 명령을 했으니…….”
드르륵!
주첨기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조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같이 온 일행들도 덩달아 나갈 채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앉는 게 좋을 거요.”
“어머, 안 그러면 죽이기라도 하시려고?”
“……못 할 것도 없지.”
“그럼 당신네 조직도 오늘 여기서 망하겠군요.”
“뭐야?”
“우리가 지금 두목님하고 만나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홍콩에서 아무도 없어요.
오기 전에 일부러 동네방네 소문을 엄청 냈거든요.”
“…….”
“이것 보세요, 두목님. 알 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설중매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자수하란다고 자수를 하겠어요? 무슨 토사구팽도 정도껏이어야지…….”
“아, 그런 거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조직원들은 지금까지 내 명령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걸론 부족하죠.
설중매를 붙잡아서 넘겨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를 쓸 겁니다.”
그러면서 조연희는 살짝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
“……?”
“꼭 살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않소?”
“그게 무슨…….
그럼 설중매가 이미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곧 알게 될 거요.”
그 말만 남기고 주첨기는 몸을 돌려 옆에 딸려 있는 별실로 부하들과 함께 들어가 버렸다.
* * *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captain speaking.
Welcome aboard JM Air flight 411 bound for Seoul.
Our flight time to Kimpo will be…….]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기장입니다.
이 비행기는 서울까지 가는 JM 항공 411 편입니다.
김포 공항까지의 예상 비행 시간은…….]
서울행 비행기에 조연희와 노근식 외사 3계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 저기, 조 승지.”
“왜요? 나 피곤해서 잘 건데…….”
“근데 괜찮겠어요?”
“뭐가요.”
“아까 삼합회 보스 말이에요. 나는 그 양반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겠던데 조 승지는 또박또박 말대꾸까지 다 하고……. 보는 내가 다 떨리더구만.”
“아, 난 또 뭐라고.”
조연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당연히 있죠.
아까 내가 따님 어쩌고 이야기 꺼냈을 때, 주첨기가 나 째려보는 거 봤죠?”
“봤다 뿐입니까?
난 사람 눈이 그렇게 독하고 날카로운 건 처음 봤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겠어요.
주미연이 자기 딸이 맞으니까 그러지.
우리 사수님이 주미연을 감시하고 있거든요, 걱정할 것 없어요.
참, 그리고.”
“네?”
“내일 기자회견 할 때 말이에요, 내 이야기는 빼요.”
“그게 무슨……. 조 승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빼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도 그건 좀…….”
“우리 사수님이 항상 하는 말이 있거든요, 절대 튀지 말라고.
홍콩에도 가지 말라고 하는 걸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간 거거든요.
그냥 노 계장님이 알아서 다 처리한 걸로 말하면 됩니다.”
“조 승지 사수라면 그 김세민 경감을 말하는 거 맞죠?
소문은 무성하던데……. 믿을 수 있을지…….”
노근식 계장이 그렇게 미심쩍다는 투로 이야기하자 조연희가 대번에 정색을 하고 노 계장을 쏘아봤다.
“우왓.
뭐, 뭡니까?
그런 삼합회 두목 같은 눈을 하고.”
“지금 우리 사수님 욕하는 건 아니죠?”
“네? 욕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그냥 주미연 같은 중요한 인물을 부산에 그렇게 둬도 되나 해서…….”
“세상에 우리 사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거기가 제일 안전해요.”
“사수를 엄청 신뢰하나 봅니다.”
“그럼요, 어쩌면 내 자신보다도 더.”
그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조연희는 눈을 감아 버렸고, 노근식 계장은 조연희의 눈치를 보더니 안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뭔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열릴 기자회견에 대한 연습을 미리 하는 것이었다.
‘조 승지에게 잔소리 듣지 않으려면, 시간 날 때 해 둬야지.’
홍콩에서 조연희가 주첨기를 상대하는 것을 보고는 계급과 상관없이 마음속으로는 이미 한 수 접고 들어간 노근식 경정이었다.
다음 날 오전.
경찰청 소회의실에서 심가람을 살해한 설중매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 보고 기자회견이 열렸다.
노근식 외사범죄수사대장이 간단한 브리핑을 마쳤고, 곧이어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SBC 채혜림입니다. 어저께 홍콩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홍콩에서는 누굴 만났고 또 거기에서 어떤 수사의 진척이 있었는지, 그리고 심가람을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합회의 두목을 만났습니다.”
[……!]
[삼합회주를 만났다고?]
[실존 인물이었어?]
[특종이다 특종!]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만나서 살인범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김포 공항에 와서 자수를 하는 방식으로 넘겨받기로 약속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ABCD의 메리 레인즈 기자가 손을 들었다.
이미 해외 언론의 관심도도 최고치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삼합회의 보스는 그 존재가 밖으로 드러난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었습니까?”
“그건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현재 삼합회는 우리나라에서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사업을 많이 하고 있고, 그 역시 수사 중에 있으므로 곧 새로운 기자회견을 통해 중간 수사 보고를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러고는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노 계장은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청장실에서도 천세용 청장과 박정오 차장이 함께 기자회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 원, 3계장 저 자식 저거 너무 뻔뻔한 것 아니야?
우리 조 경사 공을 지가 뭔데 가로채서 저렇게 유세를 떠는 거야!
저 미꾸라지 같은 놈…….”
청장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그걸 보던 박정오 차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청장님도 참, 조 승지 홍콩 안 보내시겠다고 화내실 땐 언제고…….”
“아니 그땐 그때고 말이야, 애가 가서 일을 잘 보고 왔잖아?
근데 저 얼간이 같은 놈이나 치켜세워 줘야 하다니 내가 답답해서 그래, 내가.”
“그래도 여기까지가 전부 조 승지 계산인데, 어쩌겠습니까?”
“나 원, 겸손한 건지 욕심이 없는 건지…….
그 노 계장인지 노가리인지 하는 놈은 나중에 인사 올 필요 없다고 해!”
청장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TV를 꺼 버렸다.
며칠 후.
“네, 조 경사입니다.”
-아 네, 홍콩 경시청 마이클 왕입니다.
“아 마이클! 지난번엔 고마웠어요.
설중매는 어떻게 됐죠?”
-네, 설중매로 추정되는 시신이 오늘 페리 터미널 근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시신이라면…… 죽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팩스로 사진을 보낼 테니까 확인을 좀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
-여보세요?
“네, 알겠어요.”
* * *
부산 동부경찰서, 형사과장실.
“그래, 알겠어. 바로 확인해 볼게.”
철컥!
김세민은 막 조연희의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설중매가 죽었다고?
흠…….’
똑똑!
“네.”
“과장님, 이거 과장님한테 온 팩스입니다.”
유철 형사가 조연희가 보낸 팩스를 들고 과장실로 들어왔다.
설중매의 익사체 사진을 유심히 보던 김세민이 유철 형사에게 팩스를 건넸다.
“유 형사도 한번 자세히 봐. 설중매가 맞는 것 같아?”
“흠…… 얼굴이 퉁퉁 불긴 했어도, 대충 맞는 것 같긴 하네요.
골격도 비슷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들 돌려서 보도록 해.
나는 주미연한테 전화를 해 볼 테니까.”
“예, 과장님.”
또르르륵! 찰칵!
-네, 마삼보 무역입니다.
“수고합니다. 동부경찰서 형사과장인데 주 사장님하고 통화할 수 있을까요?”
-기다리세요.
-네, 주미연입니다.
“동부서 형사과장입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어쩐 일로 이렇게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주미연의 목소리는 꽤나 밝아 보였다.
‘아직 설중매가 죽은 건 모르는 모양이지…….’
“지금 잠깐 가게로 찾아가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습니까?”
-네,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김세민은 동부서에서 나와 길을 따라 범일동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서 가구점 거리로 내려갔다.
경찰서에서 가구점 거리에 있는 마삼보 무역 회사까지는 대충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마삼보 무역 1층에는 회사에서 수입하는 각종 물품들의 샘플이 전시되어 있었고 주미연의 개인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띨룽! 띨룽!
김세민은 마삼보 무역 회사의 유리문을 밀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가운데 책상을 놓고 앉아 있던 직원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주미연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아 네, 조금 전 연락하신 분이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직원이 전화기를 들고는 뭔가 중국어로 빠르게 이야기했고, 잠시 후 2층에서 주미연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내려왔다.
“와, 김 과장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못 본 사이에 더 훤칠해지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주 사장님도 사업이 잘되시는 모양이지요?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가구점에 사람이 엄청 많던데요.”
마삼보 무역 회사의 바로 옆에 있는 로마노 가구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마노 가구점은 칠기 가구 일색인 좌천동 가구 거리에서 유일하게 수입 가구를 취급하는 곳으로 최근 결혼하는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높았다.
“요즘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그런지 조금 살 만해요, 아주 조금.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
김세민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자 주미연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뭔데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설중매와 관련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