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0화
#810. 당근과 감시
기조실장이 말끝을 흐리자 홍 상무는 몸이 바짝 달았다.
“다만?”
-사건이 언론에 확대 생산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상당히 경계를 많이 하시는 눈치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나국배 의원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까?”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 계열사 병원에 입원 수속을 하도록 하고, 원하면 서울로 데려와서 치료를 받아도 좋습니다. 비용은 전적으로 우리가 부담한다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회장님 마음에 들게 잘 처리하면 홍 상무님께도 아마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시긴 했습니다만, 연말에 홍 상무님 전무 승진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나왔었습니다. 물론 이번 건을 처리하는 걸 보고 결정하시겠다는 말씀도 함께…….
“……!”
-그리고 얼마 전 그룹 내에 회장님 직속 문제 대응 팀이 생긴 것은 알고 계시지요?
“네, 듣긴 들었습니다. 군 출신 인사가 들어왔다고…….”
-특전사 참모장까지 하고 전역한 사람입니다. 곧 홍 상무님께 연락이 갈 테니 협조해서 일을 진행하기 바랍니다.
그럼.
딸칵!
홍 상무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조금 전에 뭐라 그랬나, 날 보고 전무가 된다고? 전무가 된다, 그런 말인가?
전무라니! 아니, 내가 전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히힛! 우히히힛!’
솜상 그룹의 전무.
적당히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공채로 들어와서 근 20년 이상을 주말도 반납하고 굴렀던 덕에 지금의 상무 자리를 겨우 꿰찰 수가 있었다.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운이 좋아서 된 것이었기 때문에 전무 자리는 내심 포기하고 있었고, 만약에 단다고 해도 최소 2년은 있어야 전무 승진 대상에 올라갈 상황이었는데 회장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실장 입에서 전무 소리가 나온 것이었다.
공채로 같은 대학 동기생들이 20명이나 들어왔지만, 이제는 다 나가고 화학에 있는 동기생 한 명과 거제 중공업에 나가 있는 한 명, 그리고 개발 부문에 있는 자신이 남아 있는 인원의 전부였다.
‘세 명이 남아서 그래도 별은 달았으니 체면치레는 한 셈이구만.’
잠시 옛날 생각에 잠겼던 홍종신 상무는 서둘러 액셀을 밟았다.
* * *
부산 지방 경찰청장실.
토요일엔 아침 참모 회의는 안 하기로 했지만 사안이 다급해서 청장이 전부 다 모이라는 지시를 했다.
디디디디!
“네, 부산청장입니다.”
-앗! 청장님 충성! 금정서장 총경 이윤재! 근무 중 이상 없심니다!
“이 친구가 지금 장난하나! 관내에서 천지 대사건이 났는데 뭔 놈의 근무 중 이상이 없어! 근무 보고하려면 하고 그딴 형식적인 소리는 싹 다 때려치우라고. 그래, 현장에는 나가 봤어?”
-아 예, 저도 방금 보고를 받아 가지고……. 안 그래도 지금 현장에 나가 보려고 하고 있심니다. 아무래도 먼저 청장님한테 보고는 드려야겠다 싶어서 이리 먼저 전화 보고를 드리게 되었심니다.
아직 관할 경찰서장이 현장에도 안 나가고 있다는 소리에 문 청장의 성질이 폭발했다.
“아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당장 때려치워!
니 같은 새끼가 서장은 무슨 서장이야!”
난데없이 불벼락이 날아오자 이윤재 서장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마! 너 나국배가 누구인지 몰라? 대통령이 독대까지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아니야! 알아 몰라!”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그래?
더군다나 그런 사람이 총에 맞았다는데 넌 현장에 나가 보지도 않고 뭐? 전화 보고?
엉덩이가 그렇게 무거워서 어따 쓰겠어! 집에 가서 티브이나 보든지!”
-…….
“에잇 젠장, 이건 뭐 어째 쓸모 있는 놈이 아무도 없어!
너, 내가 농담하는 거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제 발로 옷 벗고 기어 나가!
니 같은 새끼가 괜히 백으로 진급을 하고, 그런 새끼들이 자꾸 헛짓거리를 하니까 우리 경찰이 시민들한테 욕을 먹는 거야! 알아 몰라!”
-시정하겠습니다…….
청장이 있는 대로 열이 받아 이 소리 저 소리 마구 퍼붓자 듣는 입장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 지금 나국배 상태는 좀 어때!”
-아 예,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카네예.
“그래?
그건 불행 중 다행이네, 당신 운이 좋은 줄 알아!
의사는 뭐래?”
-공기총이라서 탄환이 얕게 박혀서 괜찮다고 카는데, 왼쪽 무릎에 박힌 탄은 위치가 좀 나빠서 경과를 봐야 상세하게 진단을 하겠다고 그렇게 말을 하네예.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어?”
-예? 무슨 말씀인지?
“계속 앉아서 전화통만 붙잡고 있을 거야? 얼른 현장에 튀어 나가야 할 것 아니야!”
-예, 예! 지금 즉시 현장에 나가 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심니다. 충성!
금정서장이 경황이 없었는지 충성 소리를 또 하자 문 청장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총경씩이나 돼서 충성 소리를 앞에 하고 뒤에 하고, 당신 뭐 의경 훈련소라도 온 거야? 나 원 기가 차서……. 아무튼 보고서 똑바로 올려! 본청에 보고했다가 이상한 말 나오면 그때는 가만 안 둬!”
-예! 걱정 마십시오!
* * *
DM 골프장 클럽 하우스.
비행기로 서울에서 날아온 홍종신 상무는 곧바로 골프장으로 와서는 간부들을 불러 모아 대응 지침을 지시했다.
출입구는 물론이고 33만 평이나 되는 넓은 골프장에 기자들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장소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대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골프장이라서 접근성도 아주 좋았기 때문에 이 넓은 곳을 다 틀어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 일단 아웃코스 4번 홀에만 집중을 합시다. 경찰이나 우리 허락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절대 4번 코스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되고, 지금 이 순간부터 경찰서 형사들이 물어보는 것 외에는 일절 기자들 취재에 응답을 하면 안 됩니다.
기자들이 접근해 오면 즉시 우리 대응 팀에 알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인코스 라운딩하는 캐디들도 혹시나 손님들이 질문을 하면 모른다고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중으로 경찰에서 조사가 마무리되면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내장객들을 받을 계획입니다. 우리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들 명심해 주세요. 여긴 우리의 직장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홍 상무가 힘을 주어 그렇게 말을 하자 다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바탕 교양을 끝내고 로비로 나오니 홍 상무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역삼각형의 다부진 몸에 승모근이 도드라져 보이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홍 상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홍 상무님?”
“네, 혹시…….”
“처음 뵙겠습니다. 그룹 기획실 소속 대응 팀장인 박강일입니다.”
“아, 그 특전사 출신에 대령으로 전역했다던…….
여단 참모장까지 하다가 나왔다고요? 대단하십니다.”
“다 지난 일인데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지금 현장 확인을 하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시죠?”
“아, 네. 저도 이제 막 가 보려고 했습니다.”
홍 상무는 박강일 팀장과 함께 나란히 클럽 하우스를 나섰다.
현장에는 시경 감식반과 금정서 형사들이 나와서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고, 형사계장인 소민식 경감도 함께였다.
잠복 지점으로 의심되는 곳에는 임시로 지뢰 매설 깃발 같은 노란색 삼각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런데 깃발은 한 군데만 꽂혀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박강일 팀장이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홍 상무와 소민식 경감 쪽으로 왔다.
“실은 여기 오기 전에 먼저 장로 병원에 들러서 의사를 만나 봤습니다.
양쪽 다리에 공기총을 맞았는데 거의 동시에 맞았다고 하더군요. 만약에 저격수 한 사람이 먼저 다리에 총을 쏘면 피해자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게 되거나 넘어질 확률이 높겠죠. 그런데 서 있는 상태에서 양쪽을 맞았단 말입니다. 이건 저격수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란 것을 뜻합니다.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서 교차 저격을 한 것이죠.
이런 교차 저격을 하도록 훈련시키는 데는 전 세계에 단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특전사만 교차 저격 훈련을 시킵니다.”
박강일 팀장이 확신에 찬 어조로 그렇게 설명을 하자 소 경감도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럼 저격한 범인들이 특전사 출신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우수한 저격수들입니다. 일반 저격용 소총은 어느 정도 조준경을 통해서 거의 100% 명중률이 나옵니다. 그런데 공기총은 탄환 자체가 작고 가볍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지금 거리가 대략 50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이 정도 사거리에서 다리를 쏴서 맞힌다는 것은 꽤나 능숙한 솜씨 같아 보입니다.”
박강일 팀장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홍 상무와 소 경감은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모른다고 하기가 싫어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홍 상무는 홍 상무대로 전무 승진을 목전에 둔 마당에 조그마한 허점도 보이기 싫다는 계산이었고, 소 경감은 경찰도 아닌 회사 관계자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최대한 아는 척을 하며 타이밍이 어긋나지 않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죠!”
“난 또 뭐라고, 그 정도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박강일 팀장이 알 만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지금 이 타이X리스트 공 말입니다. 여기가 4번 홀이지 않습니까?
매 홀마다 이븐 파(매 홀 규정 타수와 플레이어가 친 타수가 일치하는 것을 말함)를 치고 왔다고 쳐도 최소 10번 이상은 공에 드라이브나 아이언이 맞은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보십시오. 깨끗하지 않습니까? 공에 골프채로 친 자국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국배가 치려고 한 골프공을 지적하자 다들 공을 이리저리 돌려 보기 시작했다.
“정말인데?”
“그럼 나국배가 속인 거야?”
자신의 공이 오비가 되어서 못 찾으니까 몰래 새것을 떨어트린 것이 아니냐는 투로 그렇게 형사계장이 이야기하자 홍 상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골프장은 다른 것은 몰라도 경기 하나만큼은 캐디들이 철저하게 관리를 합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그럼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저쪽에 서 있는 캐디를 손짓해서 불렀다.
“부르셨어요.”
“응, 오늘 아침에 라운딩할 때 말이야.
이 공은 새것인데 왜 여기에 나온 거야?”
홍 상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캐디가 놀라서 공을 받아 자세히 보더니 꽤나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어, 진짜네…….”
“이봐, 제대로 확인도 안 한 거야?”
“……죄송해요.
제가 오비가 난 줄 알고 마음이 급해서 그만 상표만 확인하고 공을 자세히 살펴보지를 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나 원……. 이게 무슨 망신이야! 근무 똑바로 안 할 겁니까!”
“…….”
홍 상무가 버럭 화를 내자 캐디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이 일로 인해 쫓겨나기라도 할까 봐 대단히 염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박강일 팀장이 홍 상무를 만류하고 나섰다.
“너무 그렇게 다그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같이 훈련받은 사람들이나 이런 허점을 찾아내지 캐디들이 어떻게 일일이 그런 것까지 예상을 해서 공을 샅샅이 살펴보겠습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마세요.”
소 경감도 덩달아 캐디를 감싸고 나섰다.
“이그, 좀 실수도 하고 그러면서 배우는 건데 상무님이 너무 빡빡하시네.”
박 팀장이 홍 상무더러 캐디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고 이야기한 까닭은 캐디 입에서 밖으로 온갖 말들이 새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불문에 부치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주의를 준 것이었고, 홍 상무도 그런 낌새를 눈치챘는지 마지못해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뭐, 정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세요.”
“이제 대충 그림이 보이네요.
저기, 그리고 저기.”
박강일 팀장이 손가락으로 지근거리의 두 지점을 가리켰다.
“저곳에 저격수들이 잠복해 있었고 나국배를 가장 최적의 저격 위치로 유도하기 위해서 오비가 난 공을 숨기고 이 공을 던져 넣었겠지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소 경감은 호기심이 동한 듯 박 팀장이 가리킨 곳으로 직접 가서 살피는 모습이었다.
“이봐요.”
박 팀장이 캐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오늘 아침에 라운딩한 사람들은 전부 다 타이X리스트 공만 쓴 겁니까?”
“네, 맞아요. 색을 보니 저희 클럽에서 판매하는 공을 사 오신 것 같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홍 상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있자, 아침 07시 27분에 라운딩을 하는 사람이면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클럽에 도착해서 등록을 해야 하는데…….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아침을 먹은 다음에 클럽 하우스에서 공을 샀다고 치면…….
설마, 일행 중에 공모한 사람이 있다고?”
홍 상무가 놀란 듯 조금 크게 이야기하자 어느새 옆에서 듣고 있던 박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겠군요.
일행이 어떤 공을 사는지 보고 알려 줬다고 치면 무리가 없죠.”
“이제 내부 공모자가 누군지 그것만 찾으면 의외로 쉽게 일이 해결되겠네요.
그럼 경찰에 일단…….”
홍 상무가 소 경감이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하자 박 팀장이 홍 상무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뭡니까?”
“아직 경찰에 알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네? 그건 왜요?”
“……괜히 알렸다가 시끄럽기만 시끄럽고, 일은 일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회장님께서 분명 질책을 하실 겁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일단 직원들 전원 회의실에 모여서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침 근무조 퇴근이 몇 시입니까?”
“오후 3시 이후입니다.”
“그럼 다들 남아 있겠군요. 전원 소집을 해 주세요. 다 모이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네, 가장 먼 홀에 나가 있는 직원들까지 모이려면 대략 한 시간이면 다 올 수 있을 겁니다.”
박강일 팀장과 홍종신 상무는 저격 지점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소민식 경감을 뒤로하고 슬그머니 클럽 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