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맨31
프롤로그
어두운 방 안, 시현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쇠사슬에 목을 매단 여성의 몸이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흔들리고 있었다.
약혼녀 류하리.
그녀의 몸이 쇠사슬에 매여 흔들리고 있었다.
-타다다다닥…….
방 안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낡은 타자기 하나가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타자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를 되살리고 싶습니까?’
“…….”
시현은 망연히 타자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다.
타자기를 잡고 들어보았지만 전선도, 다른 기계장치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냥 타자기가 혼자서 문자를 쳐낸 것이다.
-타다다닥!
그리고 시현이 보는 앞에서 다시금 타자기가 문자를 쳐냈다.
‘계약을 맺는다면 그녀를 되살려 드리지요.’
“뭐, 뭐야? 이건? 넌 누구야? 계약? 내게서 뭘 원하는 거지? 어떤 계약이야?”
그러자 타자기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갑자기 타자기 위에 숫자가 나타났다.
30이라고 표시된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윽!?”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과 문답을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계약을 맺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오직 그 대답만 하세요.’
“젠장…….”
계약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계약에 응할 것을 종용한다.
시현은 합리주의자다.
상대는 초자연적인 수단으로 말을 걸어오는 초자연적인 존재.
지금의 류하리를 살릴 수 있다면 아마도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여야 할 것이다.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계약을 종용하는 존재라니?
싫어도 ‘악마’라는 두 글자가 시현의 뇌리에 떠올랐다.
게다가 이 존재는…… 계약에 대해서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그저 류하리를 살려주겠다는 약속에 맹목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계약을 맺으면 파멸이다.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서명하는 것 이상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류하리는 그의 모든 것이다.
단순한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 존경, 애정, 질투, 시기, 경쟁, 욕망, 인정…….
시현을 인간적이게 하는 감정과 갈망, 그 모든 것의 종착역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계약이라도 응할 수밖에.
“그녀는 정말 살아나는 거지? 어떤 장애나 이상 없이 온전하게?”
시현은 질문을 던졌다.
그와 문답을 나누지 않겠다고 한 존재이지만 타자기가 타다닥 울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역시.
시현은 이 존재가 ‘맹목’을 원한다는 걸 알았다.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 계약에 서명하길 원하니, 시현에게 계약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이야기 하진 않지만, 계약을 나눈 후 류하리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준다.
류하리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 그가 바라는 ‘맹목’이 더더욱 부각될 테니까.
“그녀가 살아나기만 하고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된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아. 그녀는 온전히 되살아나고 온전히 해방되는가?”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하지만 적어도 계약의 속박이 옭아매는 건 당신뿐. 자, 시간이 없습니다.’
타자기가 우는 동안에도 그 위에 떠오른 숫자는 계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젠장! 알겠어! 하겠다!”
시현은 계약의 세부사항을 살피지도 못하고 미지의 존재와 계약을 맺고 말았다.
데드맨31
제1화
데드맨31 #1
-삐삐삑…….
시끄러운 알람소리가 울린다.
시현은 버릇대로 침대 머리맡을 뒤져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또 사무실에서 자버렸군.”
그는 사무실의 소파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니 퀭한 눈의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퀭한 눈의 남자의 머리 위에는…… 21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21일 하고 17시간 남았나.”
정신을 집중해서 보면 21 밑의 숫자들도 보이지만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대충 날짜만 보인다.
저 숫자는 그의 남아 있는 수명이다.
앞으로 21일 하고 17시간 뒤, 그는 죽는다.
“여유가 별로 없군.”
그가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타자기가 타다다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명은 유익하게 쓰고 있습니까?’
“닥쳐. 쓸데없는 소리해서 잉크 소모하지 마라.”
타자기를 매개로 말을 걸어오는 이 존재와 대화를 위해서는 타자기용 리본 카트리지가 필수다.
문제는 이 리본 카트리지가 이미 단종 되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구입하거나 이미 있는 잉크 리본 카트리지를 재생해서 써야 하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고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잉크리본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의뢰입니다. 의뢰주는 강남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노파이니 직접 접선하시길 바랍니다.’
“보수는?”
‘노파의 남은 수명 전부.’
“남은 수명 전부?”
시현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배율은?”
‘1:1.’
“통이 크네. 아니 보통 이러면 매우 의뢰가 엿같거나 그게 아니면 시한부 인생이겠지? 시한부 인생의 노파의 수명을 빼앗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닌데.”
‘그럼 의뢰를 거절하고 다른 타깃으로 바꿔드릴까요?’
“일단 이야기를 듣고 정하도록 하지.”
시현은 옷걸이에 걸어둔 외투를 입었다.
* * *
서울 최대의 번화가 중 하나, 강남.
강남 경찰서는 그곳에 위치한 거대한 성이다.
그 강남경찰서 앞에는 한 노파가 홀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빛에 바래 너덜너덜해진 패널에는 ‘동화 슈퍼마켓 살인사건의 진상을 알아주세요.’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세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햇빛과 풍파에 못 이겨 누렇게 변색된 패널이 눈에 띈다.
생명 없는 패널도 닳아 삭았으니 그걸 잡고 있는 노파의 손끝도 닳아서 갈라지고 망가져 만신창이다.
그리고 실제로 노파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듯한 노파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고작 180일?”
시현은 노파의 머리 위에 떠있는 숫자를 보고 혀를 찼다.
저 노파의 여명은 이제 180일, 고작 반년 남은 목숨이다.
“뭐 많이 줄 것처럼 으스대더니만. 고작 180일…… 그것도 전부가 아니잖아?”
시현은 짜증을 내면서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노파에게 제복 경찰들이 다가왔다.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거참. 왜 몸도 안 좋으면서…….”
경찰들은 마치 그녀를 걱정하는 듯 다가왔다.
‘이런.’
경찰들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는 시현은 일단 다가가는 걸 멈췄다.
그런데…….
-퍽!
“?!”
경찰 두 명 중 한 명이 주위의 시선을 가리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정말 절묘하게 사각에서 노파의 복부를 가격했다.
노파가 헉 하고 쓰러지자 경찰들은 그녀를 부축했다.
“아이고. 할머니.”
“괜찮으세요?”
“몸이 안 좋으셔서 넘어지셨네.”
경찰들이 꽤 절묘하게 노파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노파의 머리위에 있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젠장. 저 경찰 놈들. 죽일 셈인가? 아니, 보통 사람이 배에 주먹 한 대 맞았다고 갑자기 여명(餘命:남은 목숨)이 팍 깎이진 않지. 중병이 있는 건가?’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시현이 달려 나갔다.
“잠깐! 잠깐만요.”
시현이 다가서자 경찰들은 흠칫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현을 맞이했다.
“괜찮으세요?”
시현은 얼른 노파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부축하고 가급적 경찰들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으로 힐끗, 경찰들의 계급과 제복의 명찰을 확인했다.
‘태그를 박아둘까?’
시현이 정신을 집중하자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의 색이 변화했다.
노오란 금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주위 사람들이 유심히 보더라도 아마 지나가는 다른 빛이 반사된 것 정도로 보일 것이다.
그런 찰나의 빛이 사라지고 나자 경찰들의 머리 위에 붉은 화살표, 푸른 화살표가 박혔다.
이렇게 함으로서 저들이 변장을 하건 인파들 사이에 숨건 뭘 하건 간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럼…….”
“그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을 듯한데.”
“우린 그럼 업무가 있어서.”
시현의 등장에 경찰들은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들의 머리에 박힌 화살표가 점점이 멀어지는 걸 보며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시현은 노파를 데리고 일단 강남 경찰서를 빠져나와 인근의 찻집으로 향했다.
어디든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조용히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을 찾아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자, 괜찮습니까?”
“아…… 네. 콜록. 콜록. 감사해요. 총각.”
노파는 계속 마른기침을 했다.
180일가량 남아 있던 여명이 하루 줄어들어서 179가 되었다.
‘상태가 이런 걸 보면 관리 여하에 따라 더 줄어들 수도 있겠군.’
시현은 그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을 걸 보며 내심 혀를 차고 품에 손을 넣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시현은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꺼내는 와중에 호주머니에 있던 구미젤리 봉지가 함께 떨어졌다.
시현은 그것을 집어 들고 명함과 함께 그녀에게 건넸다.
‘시현탐정사무소’ 명함에는 그렇게 박혀 있었다.
“…….”
그 명함을 보던 노파의 눈동자가 떨렸다.
“누, 누가 보낸 거여? 나 보고 거기 나오지 말라고?”
“아뇨. 그런 거 아니라 영업이에요, 영업. 절 고용하시죠.”
“돈 없어요. 털어도 나올 곳도 없구요.”
“괜찮아요. 제가 받는 건 돈이 아니니까.”
“?”
“하지만 일단 사건 내막부터 좀 조사해 보도록 하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드님이 동화 슈퍼마켓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되었던 박광수, 맞으시지요?”
* * *
동화 슈퍼마켓 살인사건.
그것은 8년 전, 작은 구멍가게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슈퍼마켓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작은 구멍가게였던 동화 슈퍼마켓은 노모와 이혼한 딸, 두 모녀가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작은 가게였다.
이 가게에 강도가 들어와 모녀와 딸의 아이,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참살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가게에 설치된 CCTV의 데이터가 심하게 훼손되었고, 당시 인근 재개발이 벌어지면서 인근의 CCTV가 철거되어 요즘 세상답지 않게 증거 사각지대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관악경찰서 수사 과장이던 권오상 경정의 지휘 하에 경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곧 용의자를 특정해낼 수 있었다.
무직, 폭력 전과 2범에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던 박광수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리고 조사를 하니 밝혀진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평소 박광수가 피해자 모녀 중 딸 조수영을 스토킹 했었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들.
그리고 조수영의 반지가 박광수의 집에서 나오고 자백도 받아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경찰은 뇌물 수수와 시위대를 과잉 진압한 사건이 겹쳐 있어서 이 사건의 보도자료를 만들어 뿌려대었고 그 공로로 권오상 경정은 무난하게 총경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박광수는 발달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흉포함, 여론의 악화, 그리고 반성 없이 계속 무죄를 주장하며 항고한 것 때문에 미운 털이 박혀서 15년 형을 받았고 3년 후 교도소 내에서 자살했다.
발달장애로 평소 재소자들 사이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그가 견디다 못하고 자살했다는 수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엄연히 교도소나 집단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이를 강제로 교도소에 집어넣어 다른 이들과 마찰을 빚게 한 교도 당국의 잘못이지만 어린 아이와 부녀자, 노파를 끔찍하게 살해한 박광수의 흉악성 때문인지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바로 1개월 전.
갑자기 자신이 동화 슈퍼마켓 살인사건의 진범이라 주장하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강도 살인으로 복역 중이던 송채식이라는 사람으로 복역 중 간암이 발견되어서 죽을 날이 다가오자 여죄를 털어놓았는데 그 여죄 중에 바로 동화 슈퍼마켓 살인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 * *
“그럼…….”
거기까지 조사하던 시현은 힐끗 노파의 머리 위의 숫자를 보았다.
179…… 앞으로 179일 후, 이 노파는 죽는다.
“어머님은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지요?”
“어, 어떻게 알았대요? 암이래요. 의사 선생님이 이제 1년도 안 남았대요.”
“그렇군요. 경찰들도 알고 있겠네요?”
누명을 쓴 당사자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유일하게 남은 유가족은 여명 6개월 정도의 시한부 인생.
이런 상황에서 경찰과 검찰이 자신들의 치부를 굳이 파내려 할까?
하더라도 그녀가 죽고 난 뒤, 누구도 항변 못 하고 손해배상도 청구 못 하는 상황에서 조용히 흐지부지 처리하는 쪽을 선호하리라.
“솔직히 말하지요. 원하시는 게 아들의 무고함을 밝히고 강압수사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어머님의 남은 생애 안에는 불가능합니다.”
시현이 대놓고 그렇게 말했지만 노파는 딱히 놀라거나 분개하거나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별다른 기대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원하시는 건 그게 아니겠지요.”
“네?”
“진실이 밝혀지고 자식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만으로 만족 못 하시죠? 어머님?”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아, 실례.”
그녀가 그렇게 묻자 시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구미 젤리를 하나 꺼내서 찢어서 입에 넣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관악경찰서가 아니라 이곳, 강남경찰서로 옮겨서 시위를 하셨으니까요. 당시 수사과장이던 권오상 총경을 따라 이곳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법무부나 다른 곳에서 시위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요. 그런데 어머님은 굳이 당시 수사를 진행한 경찰들 중 유일하게 경찰 조직에 남아 있는 사람의 근무처로 따라왔어요. 심리가 이뤄져서 아들의 누명이 벗겨지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어머님 자신도 잘 알기 때문에, 원망스러운 경찰을 따라서 시위하러 오신 게 아닙니까?”
시현이 그 점을 지목하자 노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콜록콜록…….”
그녀는 격하게 기침을 했다.
시현이 기다려 주자 겨우겨우 기력을 회복한 그녀가 원망 담긴 눈길로 대답했다.
“네. 맞아요! 경찰들! 특히 그 권씨는 용서할 수가 없어요!”
노파는 분노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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