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4화 (4/269)

제4화

사무실 입구의 벨이 울리고 두 명의 남자가 걸어 들어오는 게 아닌가?

한 남자는 중년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남자는 젊고 잘생겼지만 어딘가 눈 밑이 퀭해 보이는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환자 같은 인상의 청년이었다.

정비복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가 젊은 부하직원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어서 오시지요. 저희 업체에는 처음 오신 분들 맞으시지요? 차를 내올까요? 커피? 녹차? 아니면 음료수는…….”

“흥. 일없수다. 시간이 아깝구만!”

퉁명스러운 중년남자가 대뜸 내민 것은 OA기기 유통업체의 어음이었다.

서진 유통, 강남의 오피스들에 OA기기와 사무용품 등을 납품하는 중견업체로 규모가 크고 거래액이 많지만 그런 중에도 아직까지 종이 어음을 쓰는 몇 안 되는 업체다.

관련 업체들 사이에서 그 어음은 거의 현금처럼 쓰이고 있었다.

전자어음을 발행할 만큼의 규모가 아닌 회사 치고는 상당히 우량 채권이다.

대부분은 관련 업체들끼리의 결제에 쓰여서 어음 할인 업체에 오는 일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업체가 들고 왔다.

“어? 1주일 뒤 만기인 물건이네요? 이걸 정말 할인하시게요?”

“그럼 그냥 들고 왔을까!?”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옆의 부하직원이 힉 놀라며 눈치를 주었다.

“아하하. 상무님. 이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상무님은 나가서 담배라도 피고 쉬시죠.”

“아니, 젠장! 한두 푼짜리 일도 아닌데 내가 네놈에게 맡길 수는 없지! 얻다대고 이래라 저래라 지시야?”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젊은 직원이 상무라는 사람을 말리느라 힘을 빼고 있었다.

그는 상무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상무가 보이지 않는 데서 매니저에게 사과를 하고 상무에게는 제발 자리를 피해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무라는 남자는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젊은 친구는 꽤 빠릿빠릿하군. 뭐야, 이 꼰대는?’

매입처의 매니저가 젊은 직원을 동정할 정도였다.

“저, 혹시 여기서 이만큼 다 할인할 수 있을까요?”

젊은 직원은 어음과 채권 등을 꺼내보였다.

다들 우량하고 금액도 꽤 나가는 것이다.

“금액이 크지만 물론 가능합니다.”

“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그, 평상시에는 그냥 대금 결제에 업체끼리 돌려가며 쓰는데, 이번에 좀 캐시 플로에 문제가 생겼거든요.”

그러자 정비복의 남자가 젊은 직원을 노려보았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아, 죄송합니다. 상무님.”

젊은 직원이 머리를 조아렸다.

“우선 진품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새로 거래하시는 분이면 증빙서류를 받고 있습니다만.”

“증빙서류? 아니, 지금 우리를 못 믿겠다는 거야?”

중년 남자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젊은 직원이 난처해하면서 재빠르게 서류를 내밀었다.

매니저는 위조감별기에 어음과 채권들을 넣어서 확인해 보고 증빙서류도 검사해 보았다.

“이상 없군요.”

“흥! 당연히 이상 없지!”

상무는 불필요한 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으, 저 꼰대는 마음에 안 드는데, 물건은 탐이 나는군.’

신용이 탄탄한 기업의 1주일 뒤 만기인 어음이라니.

이건 사실상 현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거, 그 경찰서장 형이 원하는 물건이잖아?’

단기간에 구멍을 메워야 하는 경찰서장의 형, 권오창의 입장에서 정말 절실히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다.

* * *

동생의 계좌를 건드려 멋대로 주식투자를 하다 구멍을 낸 형, 권오창이 원하는 건 계좌의 기록에 남기지 않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전자 어음은 그래서 곤란하다.

계좌에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반면 종이 어음은 배서되어 기록에 남긴 하지만 그 주체를 바꿀 수 있다.

법인이나 개인 중 선택해 가며 거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기에 가까운, 신뢰할 수 있는 업체의 전자 어음이 아닌 종이 어음이야말로 권오창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물건인 것이다.

* * *

‘만기가 1주 남은 어음을 들고 와서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 보통은 후려치기 마련이지만…… 그랬다가 다른 업체에 가면 손해가 크지. 왜 일주일도 못 참지? 혹시 서진 유통이 곧 부도라도 나나? 그런 기미는 없는데? 어음 발행 정보에서도 딱히 그런 기미는 없었어.’

강남의 오피스들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매니저는 의아해하면서도 뭐 그러려니 했다.

아마 어려운 건 서진 유통이 아니라 이쪽 회사겠지.

“그래서 얼마나 줄 수 있소?”

“저, 이 정도면…….”

계산기로 정해진 할인율을 제시했다.

그러자 중년 남자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새끼 이거 완전히 사기꾼이네!”

“네?”

“아이고, 상무님.”

젊은 직원이 달려와 말렸다.

“하하. 죄, 죄송합니다.”

꽉 막힌 상무와 달리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인상의 젊은 직원이다.

매니저는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이 젊은 직원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1주일짜리 어음 할인하러 온 거 보니까 당신네 회사 모가지가 간당간당해 보이는데 이 친구도 참 안됐군.’

“야, 됐어! 다른 데 가보자! 어디 이놈이 사기를 치려고.”

상무는 빈정이 상했는지 아예 교섭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저기, 상무님. 그래도 거래처가 추천해 준 곳인데.”

부하직원은 상무의 막무가내에 난처해하며 연신 매니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상무의 무례를 대신 사죄하면서 그 모습을 최대한 상무에게 가려서 상무의 기분도 맞춰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강남 어딜 가도, 아니, 한국 어딜 가도 이 정도 할인율이면 양심적인 겁니다.”

“다 도둑놈인가 보구만! 됐어! 그 금액이면 차라리 은행가서 맡기지!”

상무는 이미 사무실 밖에 서서 부하직원보고 나오라고 턱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다 망해 가는 쬐깐한 중소기업 상무도 상무라고 나대네? 꺼져. 어차피 이거 내 장사도 아니니까.’

매니저도 짜증이 무럭무럭 날 때였다.

갑자기 사무실에 전화가 왔다.

“네. ID트레이드입니다. 네? 앗. 권 사장님?”

강남경찰서 서장, 권오상 총경의 형 권오창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아, 아뇨. 아직. 손님이 오셔서.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런데 매니저가 전화를 받는 사이 상무라는 남자가 일어났다.

“원 참! 다른 데 돌아보자! 날강도 같은 놈이 다 있네!”

“아이고. 상무님.”

젊은 직원은 난처해하면서 매니저에게 거듭 사과하며 책상 위에 놓인 ID트레이드의 명함을 가져가고 대신 자신들의 회사 명함에 볼펜으로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주었다.

“저 상무님도 한 차례 돌아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죄송했습니다.”

젊은 직원은 거듭 사과하면서 나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데스크 입구의 방문객을 위한 사탕바구니 앞에서 발을 멈춘 것이었다.

“저, 이걸 좀 받아가도 될까요?”

“아, 물론이지요.”

접객직원이 그렇게 말하자 그 젊은 직원이 사탕바구니에 손을 넣더니…… 마치 무슨 사료 훔쳐가는 미국너구리처럼 한 움큼 사탕을 퍼가는 게 아닌가?

“…….”

몇 푼 안 하는 거니까 가져가건 말건 상관없지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탕을 구석구석 주머니에 쑤셔 박은 젊은 직원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ID트레이드 사무실에 들렀던 상무와 직원은 작은 세단 차량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방금 전까지 꼰대 짓의 절정을 보여주었던 상무가 운전 중인 젊은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태도가 꽤 공손해졌다.

그러자 굽신굽신하던 젊은 직원이 안경을 벗었다.

몸을 숙여서 체격의 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던 그가 허리를 쫙 펴자 꽤 키가 큰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목숨을 거래하는 탐정, 시현이 부하직원으로 변장했던 것이다.

“잘했어요. 역시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다만 발성이 너무 커요. 목소리가 너무 크시면 좀 리얼하지 못하지요.”

“아, 연극무대 버릇이 들어놔서 그렇지요. 하하. 그래도 이번엔 꽤 캐릭터에 부합하지 않았습니까?”

“네, 정말 잘하셨어요.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별말씀을요.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상무로 변장했던 사람은 그리 말하고 히죽히죽 웃었다.

“안전한 곳까지 대피하고 나서 하도록 하지요. 아.”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ID 트레이드로군요. 흠, 빠른데.”

“제가 전화 응대를 할까요?”

“아뇨. 제가 하지요.”

시현은 심호흡을 하고 차량의 전화 수신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앗, 안녕하십니까?”

[어음 할인은 어떠셨습니까?]

“아, 여기저기 돌아다녀봤는데 말씀하신대로더군요.”

[그럼 저희 사무실 쪽으로?]

“아니, 그게, 상무님이 차라리 은행에 어음을 처리하면 했지 그쪽으론 못 가겠다고 성화셔서요.”

[그래요? 흠. 실은 할인 이자를 좀 더 깎아드리려고 하는데.]

“아, 그럼 저희 회사야 감사하지요.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상무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려 드리지요.”

“혼자 가실 겁니까?”

“이제는 혼자가 나아요.”

시현은 그렇게 답하며 한 손으로 품에서 ID트레이드에서 가져온 사탕 봉투를 꺼내다가 툭 차 밑으로 떨어뜨렸다.

“아, 젠장.”

운전 중이라 주울 수도 없다.

* * *

시현이 ID트레이드의 사무실에 당도하니 과연, 권오창이 와 있었다.

‘이게 권오상의 형인가. 검은 돈을 대신 관리하는?’

시현은 권오창의 머리에 반짝이는 태그를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에 비해서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인데 15297이라는 숫자가 머리 위에 떠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 수명이 41년도 더 남았다고? 동생도 그렇고 집안이 장수하나 보군.’

시현은 그리 생각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자 매니저가 불렀다.

“당신 상사 분은요?”

“아, 네. 바쁘시다고 돌아가셨어요.”

시현은 그리 답하며 어음을 꺼내보였다.

다섯 장의 어음들이 있지만 내놓은 것은 한 장 뿐이다.

“음? 왜? 나머지는 안 꺼내고?”

권오창이 물어보았다.

“우선 지불 방식을 보고 나서 필요한가 싶으면 나머지도 할인하려고요. 저, 그런데 이분은?”

“저희 대신 어음을 할인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 그렇군요.”

시현은 일부러 어수룩한 직원을 연기하며 떨리는 손으로 어음을 건넸다.

그러자 그걸 본 권오창이 손짓했다.

“이봐.”

“네?”

“나머지 어음들도 다 감별 받아봐.”

“아까 전에 했는데요.”

“상관없어. 다시 해 봐. 내 눈 앞에서.”

권오창이 그렇게 말하자 매니저가 동의를 구하며 시현에게 눈길을 주었다.

시현은 마지못한 척하며 파일에서 어음들을 꺼내어 넘겨주었다.

매니저는 그것을 위조감별기에 넣어보고 컴퓨터 앞에서 어음발행번호도 확인해 보고 업체들의 어음발행량을 보고 이 어음들이 부도날지 안 날지를 체크해 보았다.

“다 양호합니다.”

“그래? 그럼 전부 할인하도록 하지.”

권오창 입장에서는 어음 한 장 정도로는 간의 기별도 안 간다.

어음 할인율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 이자로는 부족한 금액을 다 메울 수 없는 것이다.

“아. 저, 그렇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곤란한데요?”

데드맨31

데드맨3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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