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종로구 K일보 앞 길.
메이저 언론사이긴 하지만 규모가 작은 언론사의 앞에선 이제 막 점심시간을 다 끝마친 직장인들이 서서히 자리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아직도 술이 안 깨네.”
한 남자가 담배를 물고 흡연자 구역에서 서성이다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에는 미친놈이라는 이름으로 전화가 울리고 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가서 거절에 손을 대고 쓱 그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그때였다.
-턱!
누군가의 손이 남자의 어깨를 건드렸다.
“힉?!”
남자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시현이 서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으시지? 장 기자님?”
“네놈 전화를 받으면 좋은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내 수명 1년 빨아먹어 놓고서도 그렇게 뭔가 부려먹고 싶냐?”
“공짜로 해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게다가 다 공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잖아?”
“웃기시네. 전화 안 받으면 만나기 싫다는 줄 알고 좀 꺼져 주면 안 되냐?”
“오늘은 당신 일 시키려는 거 아냐. 좀 조언을 들으려 온 거지.”
시현은 그리 말하며 500원짜리 동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들어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 순간 시현의 손에서 동전이 빙그르르 돌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팜, 마술사들이 동전을 가지고 쓰는 기본적인 테크닉이다.
아마 손등에 숨긴 거겠지.
시현은 그렇게 손재주를 과시하면서 말했다.
“동화 슈퍼 살인 사건.”
“흠…… 아, 그거? 별로 재밌는 일이 아니야. 누명 쓴 쪽이 워낙 비호감이고 누명 씌운 놈은 너무 잘 나가. 이미 쌀이 밥이 되어서 다 먹히고 똥까지 된 사건인데? 경찰, 검찰, 다 짝짜꿍이 되어서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 이런 건 피해자가 어지간히 동정 가는 인물 아니면 띄우기 힘들다고. 이미 전에도 한 번 나 말고 다른 애가 기사를 썼는데 데스크에 압력이 와서 내렸다니까.”
그렇게 말하던 장 기자가 흠칫 놀랐다.
“그런데 너 설마 그 일 맡은 거냐? 이거 목숨 여러 개인 놈이네? 표적은? 경찰이나 검찰이냐?”
“윤 회장을 엮는다면 기사로서 쓸 만해질까?”
어느새 두 개로 불어난 500원짜리 동전을 장 기자의 상의 포켓에 넣어준다.
“더 위험해지지. 기사로서의 매력이 올라가는 것 이상으로…….”
장 기자는 담배를 공용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뭐, 어디 연예인 같은 놈 얽히는 거 아니면 쉽게 달려들 만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설령 그런 연예인 같은 놈이 얽혀있다 해도 그놈만 줘 패고 끝나겠지. 윤정식은 빠져나갈 거다.”
“그래도 경찰 정도는 같이 잘리겠지?”
“미친놈.”
장 기자는 방금 담배를 꺼놓고 품에서 새 담배를 꺼내다 멈칫 했다.
아무래도 줄 담배는 아니다 싶은 모양이다.
“그럼 총대를 메고 이 위험한 다리를 기꺼이 건널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시 의원.”
“시 의원?”
“선거가 1년 남았잖아. 그동안 별 실적 없이 초조한 인물들이 뭐라도 하고 싶어질 때지. 하지만 시 의원을 움직이면 죽었다고 생각해야 해. 그 치들은 정보원을 보호하지 않거든. 그런 주제에 정보원이 확실하지 않으면 떡밥을 물지도 않는다고.”
그 말을 듣고 시현은 박수를 쳤다.
“역시 K 신문사 고참 르포라이터 장 기자님. 많은 도움이 되었어.”
“그럼 꺼져. 난 가늘고 길게 살 거거든.”
장 기자는 그리 말하고 상의의 포켓을 확인해 보았다.
시현이 넣은 동전이 없다.
“후후.”
시현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 500원짜리 동전들이 반짝이고 있다.
몇 푼 안 되는 동전에 불과하지만 주는 거 아니었나.
하지만 이제 와서 달라고 하기에도 뭐하다.
“잠깐. 그런데…… 난 얼마나 남았냐?”
장 기자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을걸? 그냥 마음껏 피라고.”
“쳇. 재수 없는 새끼.”
장 기자는 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 *
강남경찰서 서장실, 그곳에서 서장, 권오상 총경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보고 고민하고 있었다.
“으음…….”
테이블 위에는 어제 아침, 그의 집에 투척된 투서와 메모리 카드가 증거품용 비닐 백에 들어간 채로 놓여 있었다.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 형님. 결산이 끝났나? 무슨 일이지?”
[크, 큰일 났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야?”
[사기, 그러니까 사기를 당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 *
ID트레이드의 사무실은 강남경찰서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어서 권오상 서장은 ID 트레이드 사무실에서 형인 권오창을 만났다.
ID 트레이드 매니저는 즉시 CCTV를 틀어주었다.
“얼굴이 잘 나오지 않았어요. 그 상무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언성을 높여서 이 직원이 말리느라 일어서 있어서…… 여기 테이블에는 그래도 앉아 있으면 얼굴이 보이는 각도인데…….”
상무가 시비를 털자 말리며 일어나는 청년에 의해 의자의 위치가 바뀐다.
그리고 앉을 때 다시 위치를 바꿔서 카메라를 등지고 앉는 게 아닌가?
“젠장.”
권오상은 CCTV의 화면 밖을 맴도는 상대의 움직임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니, 공포마저 느꼈다.
이건 틀림없이 훈련받은 놈이다.
스파이?
암살자?
경찰서장이나 되는 인물인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이 부각되었다.
“이건 통상적인 어음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짜 어음 1억을 준비해 와서 위변조 확인이 끝난 다음에 바꿔치기를 하다니 보통 주도 면밀한 놈이 아니에요. 저희가 거래할 때는 그래서 두 번 확인 하는데…… 그, 권 사장님이 거래하는 거라 그만…….”
ID트레이드의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장의 눈치를 살폈다.
“어음 뒷면에 배서한 연락처는?”
“진짜 법인입니다. 망했지만 휴업신청을 안 한. 민번은 노숙자 거고요.”
“고작 1억 사기 치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1억 짜리 사기에 판돈을 1억을 준비해와?”
수익률 100%는 보통 투자에서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사기는 다르다.
합법적 투자와 달리 사기는 잡힐 경우 중형을 치러야 할 리스크가 있는 것이다.
수익률 100%정도로 그 위험한 다리를 건널 리가 없다.
“어쩌면 상대의 목적은 사기가 아니라 나를 때리려고 한 걸 수도 있어. 일단 형. 신고는 하지 말고 내 쪽에서 수습해 보지.”
“그, 그래.”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권오상 총경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1억이 어디 애 이름도 아니고 적은 가격도 아닌데 정작 자신이 사기당하니 정식으로 경찰에 수사를 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검은 돈이니까 수사를 못 하는 게 당연한데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왜 다른 잡것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는데 정작 경찰인 나는 보호를 받지 못하지?’
권오상 총경은 분노하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조 과장! 난데!”
* * *
윤 회장은 강남에 위치한 레반테스 호텔에서 장기 거주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들끓는 클럽의 오너답지 않게 그가 택한 레반테스 호텔은 원래 이전에는 유명 호텔 체인의 가맹업체였던 곳이다.
고급스럽고 품격 있으며 나이트클럽과는 연관 없는 조용한 5성 호텔.
번화한 강남 한복판에서도 조용하고 유유자적함을 즐길 수 있는 호텔이었다.
그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40대 중반의 청년사업가로 보이는 윤정식은 와인 잔에 손가락을 대고 테두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직접 만나는 일은 삼가는 게 좋다고 했을 텐데? 알 거 다 아는 분이잖아? 우리 과장님?”
윤정식의 의자 뒤쪽 테이블에는 강남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조경식 경감이 앉아 있었다.
권 서장에게 혼쭐이 난 그는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윤 회장에게 부득불, 면담을 신청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서장님이 몸이 달아올라서 절 힐책하더군요.”
“그래. 그렇겠지.”
“네?”
“말 계속하게.”
“아, 예. 그러니까 지금 경찰 서장에게 이상한 놈이 붙었는데요.”
“감찰? 아니면 언론인가?”
“감찰이나 감사도 아니고 언론도 아닌 것 같습니다.”
조경식은 있었던 일을 대충 요약해서 전해 주었다.
“흐음. 서장 임기가 얼마나 남았지? 강남에서…….”
“2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윤정식은 새로운 클럽을 오픈하려 준비 중이었다.
헥사곤은 대중적인 클럽이다.
오픈 전부터 입구에 사람들이 줄서 있다 들어오는 그런 클럽.
안에는 VIP룸, VVIP룸이 있지만 입구 구조가 잘못되어 있어서 같은 곳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유흥을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구조다.
이걸 바꾸기 위해서 건물 설계부터 관여해서 VVIP들은 다른 입구로 따로 입장하도록, 새로운 형태의 클럽을 구상 중에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각별하게 공을 들이고 있는데 지금 강남경찰서에서 변고가 일어나면 곤란하다.
“2년이면 새로 오픈할 클럽이 제자리를 잡기엔 충분한 시간이군. 전력을 다해서 서장님을 보필해드려야겠어. 서장님도 그걸 원하시던가?”
“아, 예. 그렇습니다. 저 그리고…….”
“그리고 뭐?”
“직접 뵈었으면 한다고.”
“…….”
윤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네. 아마도 절 연락책으로서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부하를 믿지 말라고 되어 있는 투서는 단지 종이일 뿐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자신을 조여 오는 위기에서 권 총경은 자신이 커리어 관리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너무 윤 회장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아무리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물주와의 끈을 부하에게만 맡겨두었으니 갑자기 투서가 생각난 것이리라.
‘부하를 믿지 마라.’
근거 없는 낭설이 적힌 투서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다.
“흐음. 야심이 있으시군. 하긴 그러니까 강남경찰서의 서장이겠지. 알겠네. 만남을 주선해 보게.”
“아, 알겠습니다.”
* * *
“역시 이 건물은 좋아. 강남 한복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주 잘 보이는군.”
시현은 역삼역의 강남 파이낸스 타워 안의 복도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북쪽, 레반테스 호텔과 서쪽 ID 트레이드 사무실에서 태그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ID트레이드 사무실에서 반짝이는 태그가 점차로 레반테스 호텔을 향해 이동한다.
건물을 뚫고 보이는 태그의 빛 덕분에 그는 지금 경찰들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총경이 직접 ID트레이드에 출두까지 했구만. 역시 경찰 엘리트 관료 코스를 밟아 오신 분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취약하군. ID트레이드 쪽 사람들은 월급쟁이일 뿐 결정권자가 아니니까 결국 윤 회장이랑 직접 만나려 하겠군.”
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는다.
ID트레이드 사무실에서 챙겨놓은 사탕이다.
방문했을 때 많이 챙겨놔서 아직도 여유분이 많다.
“미치신 분아.”
그런 시현의 앞에서 안경을 쓴 남자가 벌벌 떨고 있었다.
KR신용정보의 직원 정대식이었다.
“왜 우리 사무실에 온 거예요? 미치신 분아?”
“그야. 여기는 강남이 한눈에 잘 보이니까.”
“……벽 보고 지랄하는 거로밖에 안 보이거든요?”
시현의 눈은 벽을 투과해 태그를 쫓을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벽 보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의기양양해하는 걸 보아하니 상대를 다 몰아넣었나보군요. 성격도 나쁘지.”
그러자 시현이 정대식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하나?”
“사양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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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3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