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어두운 사무실 안에 타자기가 혼자서 타다닥 글자를 치고 있었다.
그때 시현이 걸어 들어와 불을 밝혔다.
‘훌륭히 성공하셨군요. 당신은 이번에 꽤 많은 수명을 얻었습니다. 한동안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내게는 31일만 남겨줘.”
시현이 그렇게 말하고 노파와의 계약서를 찾아 거기에 가필을 하기 시작했다.
얻은 수명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부분을 작성해 넣는 것이었다.
‘또 그런 식입니까?’
“처음에 분명히 그렇게 계약했었지? 내 여명이 31일만 남게 된다면……. 무조건 어떻게든 내게 다음 계약을 가져온다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나와 그녀 모두 계약에서 자유롭게 해방된다고.”
‘…….’
“그러니 부지런히 다음 고객을 물어와.”
‘제가 제 계약을 관리하지 못해 파탄이 나길 바란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군요. 시현.’
타자기는 그렇게까지 쳐댔다.
“그럼 계약은 이대로 정산이 끝났으니까 이걸 이렇게 분배하면 되겠지?”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시현은 타자기에 계약서를 넣고 드럼을 돌려 종이를 안으로 넣었다.
계약서에 써져있던 글자들이 타자기에 넣고 돌리자 전부 녹듯이 사라져 타자기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현의 머리에 떠오르던 숫자가 변화해 다시 31일이 되었다.
‘저는 인지를 초월한 존재입니다. 당신들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 밖의 존재, 제가 실수를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굳이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십니까?’
“상관없어. 설령 실수하지 않더라도…….”
시현은 의자에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댔다.
“이게 내 나름의 저항이지.”
그렇게 말한 시현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뉴스를 살펴보았다.
* * *
돈세탁하고 뇌물먹이는 업체, ID트레이드가 세무서와 금융감독원에 의해서 압수수색을 당하게 되자 ID트레이드에 연관된 이들은 다들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ID트레이드에서 누구에게 얼마 먹였는지 자세히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 왜 뇌물 먹이는 놈이 굳이 장부를 써서 화를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하곤 한다.
그까짓 장부 안 쓰면 증거가 없어서 괜찮지 않겠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장부를 통해서 누구에게 얼마 줬는지 기입해 두고 확인하지 않으면…….
별거 아닌데 남들보다 더 달라고 해서 주먹구구로 더 받아가는 놈이 반드시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누가 더 받아갔다더라 하고 소문이 나면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도 더 달라고 한다.
웃긴 게 없다가 생긴 돈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다들 무슨 빚쟁이 같다.
나는 저놈보다 급이 높으니 얼마를 더 받아야겠고 적어도 저놈보다는 더 받아야 한다는 그런 자기들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찔러주는 쪽이면 모를까 본격적인 뇌물 수수에 관여된 이들은 십중팔구 장부를 쓴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통제가 안 되는 게 뇌물 받아먹는 놈들의 본성이니까.
그래서 꼬리가 잡힌 경찰들은 이제 대가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 * *
[대가성 없이 그저 교회에서 만나서 알게 되어서 재테크하는데 좀 도움을 받겠다. 그래서 우리가 돈을 낸 거예요. 전 어음사기 당했습니다! 이게 정말 뇌물이고 그런 거면 제가 왜 어음사기를 당하겠습니까? 아, 참, 이거. 전 억울합니다!]
TV쇼프로에서 인용된 장면이다.
권 총경의 형 권오창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강변하고 있지만 방송 프로의 다른 패널들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이분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경찰들이 재테크를 위해 접촉했을 뿐, 뇌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단 말이에요. 참 나.]
[그런데 정말 뇌물이 아니라 재테크일 수도 있지 않나요?]
반대쪽 패널이 옹호의견을 내세웠지만 변명이 옹색하다.
[그게 말도 안 되는 게 이분들 투자 수익률이 1년에 200%입니다. 제일 낮으신 분도 140%의 수익률을 냈단 말이에요. 이 정도 수익률이면 금융계의 전설입니다. 전설. 이럴 거면 펀드매니저 하지 왜 경찰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패널들이 신나게 찧고 빻는 것을 보며 한 남자가 리모컨을 눌러 TV를 껐다.
윤 회장이었다.
“하아. 그래. 권 총경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경찰 상부에서는 동화 슈퍼 살인사건의 강압수사 책임도 이 기회에 물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형이 대신 돈을 받았으니까 얼굴에 철판 깔고 형을 손절해버리면 어떻게 감옥까지는 안 갈 수 있겠지만…….”
“경찰 조직에서는 끝장이 났다?”
“네. 그리고 아마 다음부터는 강남경찰서를 특별인사관리지역으로 지정한다고…….”
“ID트레이드는 처분하고, 송 매니저 가족은 잘 돌봐줘. 그리고 다음 경찰 서장이 누가 되는지 알아보고. 서장이야 뭐 평소에도 옮겨 다녔잖아?”
“예!”
“그 탐정 놈, 그놈 뭐라고 했지?”
“시현이라고 합니다. 이쪽 업계에서는 꽤 유명하더군요.”
“유명하다고?”
“네. 불륜조사나 사람 찾기 전문이라고.”
“뭐?”
윤 회장은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불륜조사 전문가가 왜 이런 일에 머리를 들이밀었지? 게다가 그놈, 우리 애들 여섯을 혼자 처리했다며?”
“네, 그놈에게 당한 애들이 다들 입을 모아 말하는데 불사신이라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불사신의 불륜조사원? 지금 이거 무슨 농담인가?”
윤 회장은 그리 말하며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시현탐정사무소의 명함이었다.
한동안 명함을 만지작거리던 윤 회장은 혀를 찼다.
“일단 건드리지 말고 좀 지켜보도록 하지. 어차피 이 친구는 경찰들이 예의주시할 거야.”
* * *
경찰공제회 결혼식장.
웨딩피로연이 한창인 곳 한편에서는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모일 수 있도록 따로 독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경찰정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경찰들이 모여 있었다.
“우선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조카 결혼식이라 사실 오실 의리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다들 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극무궁화 두 개를 어깨에 빛내고 있는 남자가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태극무궁화 두 개, 치안감 계급장이다.
대한민국 내 단 20명만 존재하는 고위급 경찰이 직접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뭘 별말씀을요.”
“그런데 최근 불상사가 있었지요.”
“아…… 그렇지요.”
경찰들은 최근의 불상사라는 말에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강남경찰서의 추태를 떠올렸다.
경찰은 승진이 매우 적체되어 있는 조직이다.
군대의 장성되기 힘든 것 이상으로 매 계급마다 승진의 장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종로, 강남, 서초는 경찰의 꽃, 최전선으로 여겨져 그곳에서는 승진이 비교적 잘 된다.
아니, 종로, 강남, 서초 경찰서장이라면 그야말로 경찰의 꽃, 선택받은 자라 불러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강남경찰서장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으니…….
“권 총경은 안됐지만 여기까지인 걸로…….”
“애초에 저는 동화 슈퍼 사건 때부터 그 친구를 반대했습니다.”
“뭐, 일은 잘했어요. 어쩌다 보니까 그런 거지.”
“그런데 이 사건에 손을 댄 자가 있었지요?”
“강남구 시 의원 도현숙 말입니까?”
도현숙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순간 경찰들 사이에서 한기가 감돌았다.
그때 이 모임을 주최하던 치안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젊었을 때 제가 그 팬이었는데.”
“원 참.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아, 그래서 그, 도현숙씨에게 사진을 찍어 넘긴 친구가 있더라고요. 그게…….”
“마포구였지요?”
“네?”
저 밑에 자리 구석에서 초밥을 먹고 있던 총경 한 명이 깜짝 놀랐다.
마포경찰서 서장 장하원 총경이었다.
“마포구에 이 친구 사무실이 있다는 모양입니다.”
치안감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홀 서빙 직원이 쟁반에 서류를 가져가 장하원 총경에게 건네주었다.
멀리서 찍은 시현의 사진과 그의 명함, 그리고 사무실 위치를 포함한 자잘한 신변 자료들이었다.
장 총경은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꿀꺽 삼키고 그 자료들을 보았다.
이 자료들을 그에게 넘겨주는 이유는 뻔하다.
하지만 정식으로 명령하거나 부탁하진 않겠지.
알아서 기어서 이 녀석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리라.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현재 저희 서에는 경찰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우수한 재원이 썩고 있습니다. 좋은 기회로군요.”
* * *
류하리 경위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경찰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지만 앞으로 해 나갈 자신감이 없어져버렸다.
경찰 조직에 대한 신뢰 문제는 아니다.
그런 건 경찰 대학 문턱을 넘어 이 거대한 관료조직의 실체를 체험했을 때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녀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임관한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찾아온 컨디션 난조 때문이었다.
영문을 모를 병 때문에 한 달을 입원했지만 그 후 또 갑자기 멀쩡해졌다.
월말쯤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이 빠지곤 했지만 다음 달이 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력이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스트레스성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소견을 제시했지만 이런 병명으로 임관 후 가장 중요한 한 달을 날려버린 인물이 진급적체가 극심한 경찰 조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뜩이나 승진할 자리가 없어서 경찰대학 출신의 엘리트들도 승진만을 기다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경찰 조직에서 그녀는 너무 명확한 약점이 있는 인물이었다.
몸이 약해서 한 달이나 근무를 방기했다면 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이상한 구원의 손길이 와 닿았다.
“저기 류 경위님!? 서장님 호출!”
“네? 서장님이요?”
류하리는 반신반의하면서 서장실로 향했다.
* * *
류하리 경위가 근무하는 마포경찰서의 서장 장하원 총경은 비대한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점거한 인간들이 으레 보이는 요괴 같은 모습을 한 남자였다.
광택 나는 대머리와 그보다 더 빛나는 안광은 범속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끔찍한 종류의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그녀에게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자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만약 류하리 경위가 극단의 연출가라면 이따위 연기를 하는 남자를 쳐내고 두 번 다시 극단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을이고 저 남자가 갑이다.
류하리 경위는 최대한 공손하게 장 총경의 앞에서 그가 베풀어주는 관심과 애정에 감동한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서툰 배우들의 촌극이 경찰서장실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류하리 경위. 그래. 몸은 좀 어떤가?”
“아무 이상 없습니다.”
류하리는 그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의문의 컨디션 저하 때를 제외하곤 그녀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힘과 활력이 너무 넘쳐서 탈이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자네 아버님도 한 시름 놓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 여성청소년과에서 근무하고 있지?”
“네.”
역시, 아버지를 언급하는 장 총경에게 류 경위는 식은땀을 흘렸다.
류하리 경위의 아버지는 코스닥에 상장된 중견 건설자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 높으신 공무원이 관심을 보이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일은 많고 사람도 많고 힘들 거야. 경찰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을 좀 더 유용한 부서에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부터 정보3팀으로 옮기게.”
“네, 알겠습니다!”
류하리는 그렇게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정보3팀이요? 2팀이 아니라?”
“정보3팀이네. 자세한 이야기는 박 팀장에게 듣게나.”
서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기대하고 있겠네. 류 경위.”
데드맨31
스트리밍 살인사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