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윽?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류하리? 날 비웃으려고 온 거야?”
성신아의 표정이 좋지 않다.
평소라면 언제나 웃으면서 엿을 먹이는 소리를 하던 그녀가 이제는 내숭을 떨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긴, 수사 중에 경찰서 안에서 BJ칼리가 죽었다면 수사본부에 참여하고 있던 이들 모두 최소한 시말서 감이다.
“딱히 널 비웃으려고 온건 아냐. 나도 지금 상황이 곤란하거든.”
“와아. 얘 말하는 것 봐. 비웃으려 온 건 아냐? 내 꼴이 비웃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내숭 떠는 건 그만 뒀나보구나? 하지만 지금 나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그래, 너 신경 쓰려고 나온 거 아냐.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살아남아야지.”
그때 차량이 한 대 도착했다.
그걸 본 성신아는 즉시 품에서 거울을 꺼내서 자신의 얼굴 상태를 살펴보는 게 아닌가?
“좋아. 화장 무너진 데 없고. 어디 고춧가루 낀 데도 없고.”
‘뭐하는 거야?’
류하리가 궁금해하는 걸 무시하고 성신아는 표정도 몇 번 지어보면서 얼굴을 풀더니 활짝 웃으면서 차량으로 다가갔다.
‘와. 순간적이지만 순정만화 같다. 얼굴이랑 분위기가 확 변하네.’
류하리는 순간적으로 성신아의 태도 변화에 감탄했다.
그러나…….
-턱!
문이 열리며 내려선 운전자는 성신아를 미처 보지 못하고 문으로 칠 뻔했다.
“꺅!”
“아, 실례. 괜찮습니까?”
차에서 나온 인물은 류하리도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아, 성신아 양? 아니, 성신아 경위님.”
“네. 선배님. 오래간만이에요.”
성신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소곳하게 선배라는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정말 내숭을 저렇게 심하게 떨어도 되나?’
류하리가 기막혀 할 때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류하리를 발견했다.
“아. 류하리 경위님도 있군요.”
“네. 선배님.”
그러자 박 경위가 물어보았다.
“뭐야? 둘의 선배라면 저분도 경찰대학 출신이야?”
“네. 하지만…….”
“서부지검 최형림 검사입니다.”
선배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 * *
최형림. 훤칠한 키, 잘생긴 용모, 학업에도, 운동에도 발군의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대기업인 SH그룹의 방계라 할 수 있는 한영건설 사장의 아들이었다.
재벌 일가의 일원이면서 경찰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한 것은 물론 전 과목에서 높은 고과를 기록하면서 그 용모 때문에 경찰대학 홍보용 포스터 모델도 되었다.
경찰들로서는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인재였다.
그런 그가 폐지 직전의 사법시험에 응시해서 사법시험 막차를 탔으니 경찰대 관련자들로서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경험일 것이다.
경찰대학출신들 중에 법조인이나 의전원으로 옮기는 이들은 많았지만 설마 경찰대학 홍보모델을 할 정도로 윗사람들이 예뻐하는 인재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그런 그가 경찰들의 실수로 지휘권을 상실한 ‘인터넷 방송인 살인사건’ 합동수사본부에 오게 되었으니 경찰들은 이제 뒤통수만 얼얼한 게 아니라 이마까지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런 상황이지만 합동수사본부에서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하려 애쓰는 성신아는 최형림에게 아양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배. 차 막히는 시간에 오시느라 피곤하시죠? 제가 합동수사본부로 안내할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성 경위님. 지금 저는 부장검사님 오시기 전에 먼저 상황을 좀 정리하려고 온 거니까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알겠지요?”
그렇게 말하던 최형림 검사가 문득 류하리를 돌아보았다.
“류하리 경위님, 당신도 합동수사본부에 있습니까?”
“아뇨. 선배. 저는 따로 일이 있어요.”
“흠. 경찰대학을 수석 졸업한 재원을 이런 사건에 투입하지 않다니…….”
“자자. 선배. 복잡한 사정이 있답니다. 그건 가면서 제가 말씀드릴게요.”
성신아가 히죽 웃으면서 최형림을 잡아끌었다.
‘아니, 저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류하리는 그게 걱정되었지만 합동수사본부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멍하니 최형림과 성신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둬도 괜찮겠나?”
박진감 경위가 그렇게 물어보더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도 들어가 봐야지.”
“아. 저, 박 팀장님? 저는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서장님 거취가 결정될 때까지, 아…….”
박진감 경위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류하리에게 서장 모가지 날아가길 바란다고 뭐라고 한 주제에 본인이 그런 말을 하다니.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나도 뭐라고 하질 못하겠군. 일단 서류 작업이라도 하면서 상황을 기다려 보자구, 류 경위님.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박진감 경위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아아…….”
온갖 연줄이 다 끊어진 류하리로서는 멀어지는 박진감 경위의 모습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박진감 경위도 고작 경위. 현장직 출신 팀장이라지만 그녀와 같은 경위에 불과하다.
그에게 구원이나 조력을 바랄 수는 없다.
“못살아. 진짜…….”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롤리팝 캔디를 내밀었다.
“드시겠어요?”
시현이었다.
“맙소사. 당신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예요?”
류하리가 돌아보니 시현은 이미 롤리팝 하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은 웃는 건지 뭔지 모를 기이한 빛으로 빛나고 있다.
“의뢰를 받아서.”
“네?”
“아니, 정확히는 받을 예정이라고 해 둬야겠지요. 그런데 보아하니 아무래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것 같군요. 류 경위님.”
“네네. 그렇습니다. 왜요? 혹시 경찰 그만두면 저 스카웃이라도 하시게요?”
“그럴 리가요? 당신은 경찰 조직 안에 있을 때 빛이 난답니다.”
“바꿔 말하면 경찰 아니면 난 가치가 없다?”
“후후. 그렇게까지는…….”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부정하진 않겠다.
그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어때요. 우리 서로 상부상조하면 경위님은 경찰조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고, 저도 경찰들에 박힌 미운털을 뽑지는 못하더라도 한동안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체 뭐야? 이 인간은?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남자, 수완이 이상할 정도로 좋지?’
류하리는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이라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경찰들보다는 제가 해결할 가능성이 높지요.”
“대체 무슨 근거로……. 알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협력하지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경찰서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겠습니까?”
“네?”
“용의자들을 직접 이 눈으로 봐야겠어요. 카메라나 영상이 아니라 육안으로.”
“대체 왜?”
“뭐 육감 같은 거라고 해 두죠.”
“탐정이나 형사들의 감 같은 거 말인가요? 그런 거에 의존하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 텐데?”
그러나 류하리는 시현에게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입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경비실로 가서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보며 슬쩍 서랍에서 방문용 명찰을 꺼내왔다.
그리고 방문용 명찰이 있어야 하는 곳에는 자기 운전면허증을 대신 넣었다.
아무리 서장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라도 경찰들에게 미운털 박힌 시현이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자, 이거 목에 걸어요.”
“감사.”
시현은 그녀에게 명찰을 받아들고 씨익 웃었다.
“왜 그렇게 징그럽게 웃어요?”
“아니, 역시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하고.”
“네?”
“당신은 모를 이야기예요.”
시현의 표정이 복잡해 보여서 류하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빨리 이동하죠. 걸리면 저도 골치 아프니까.”
* * *
서장 장하원 총경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서 부하들을 책망하고 있었다.
“경찰서 안에서 사람이 죽다니 그게 말이 될 일이야? 너희들 눈은 다들 단춧구멍이냐?! 대체 뭘 하고 있었어?! 이렇게 많이 있으면서! 응?! 이 월급도둑놈들아!”
장하원 총경은 전형적인 경찰 관료지만 그렇다고 부하들에게 막말을 퍼붓던 이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지금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었다.
“CCTV에도 아무것도 안 찍혔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뭐 지금 우리가 뭐 유령이랑 상대하고 있기라도 하냐?!”
장하원 총경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지만 다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유령을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인범은 분명히 인터넷 방송이 켜져 있을 때, 생방송일 때도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화면이 나가버렸다.
그와 똑같은 현상이 BJ칼리가 살해당하는 순간의 경찰서 내 CCTV에서도 발생한 것이었다.
‘애초에 경찰서에서 살인을 하는 것도…… 보통 놈에게 가능한 건 아니지.’
‘정말 유령을 상대하고 있는 기분인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경찰들은 방방 뛰고 있는 서장의 분노를 감내하면서 당혹의 시선을 나누었다.
그들로서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만 조언을 해도 될까요?”
“응?!”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서부지검 수사1부 최형림입니다.”
경찰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경찰서에서 피의자가 살해된 장면은 말하자면 경찰들의 치부다.
그 치부에 외부자가 나타났으니 다들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 최형림 검사가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금 즉시라도 피의자들을 경찰서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뭣?”
“앞으로도 이들을 노리고 살인이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은 그 수법을 모르죠. 그 말인즉, 경찰서에 그들을 구류하고 있으면 또 경찰서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날 겁니다.”
“…….”
“경찰서 안에서 살인이 또 일어나면 그때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하긴, 검찰에서 수사권을 인계받고 나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번에는 검찰도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러게?”
형사들 중 몇몇이 빈정거렸다.
“물론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정말 또 경찰서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국가공권력 위신의 문제입니다. 피의자들을 경찰서 밖으로 내보내주시면 당연히 저희 쪽도 최대한 협력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흥분해있던 경찰들이 찬물 맞은 취객처럼 정신을 차렸다.
경찰서 밖으로 피의자들을 내보내 주면 검찰에서도 경찰들에게 피해 덜 가게 배려해 주겠다.
그런 소리가 아닌가?
‘역시 최 선배로군. 대단한데.’
성신아는 최형림의 수완에 감탄했다.
‘방금 전까지 모든 경찰들은 서로서로 책임을 따지며 문책할 분위기였어. 하지만 지금은 문책할 상황이 아니야.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문책보다는 그걸 최대한 회피해야지. 하지만 선배도 서부지검의 평검사인데 이런 일을 결정해도 되나?’
그런데 그때 인상이 순해 보이는 젊은 경찰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 하지만 밖에 내보내면 피의자들이나 관계자들이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우리들이 그들을 죽으라고 내던진 것처럼 보일 수도…….”
“물론 도의적으로는 피의자들을 철저히 보호해야겠지요. 하지만 살인범의 수법이나 정체를 알고 계십니까?”
“…….”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면 이상론 말고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해 봐야겠지요. 경찰서 안이 아니라 밖이 오히려 피의자들을 보호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구속영장도 없는데 피의자들을 무작정 경찰서 안에 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이미 차장님의 허가를 받은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경찰들은 최형림의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얼떨떨한 상황에서 누가 갑자기 총대 메고 뛰쳐나와서 자기가 책임질 테니 이렇게 하자고 하면 혹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법이다.
데드맨31
스트리밍 살인사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