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타인은 지옥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 아니더라도 남과 접하다 보면 누구나 살인 충동을 간혹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들 공권력과 법치 앞에 순응하며 참고 살아간다.
하지만 만약 법치의 벽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청부 살인처럼 수고나 번거로움, 막대한 지출과 역으로 협박당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쉽게 미워하는 이를 죽일 수 있다면?
물론 처음부터 살인을 저지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능력이 생겼다 하더라도 어떻게 작은 이득을 보는데 사용하든가 하면서 그리 쉽게 살인의 문턱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실수만으로도 이제 이 인간은 쉽게 살인자가 되어버린다.
‘초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흔한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런 일이 많이 있나 봐요?”
류하리는 시현의 말투에서 어째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해 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무슨 초능력이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데 태도가 너무 그럴싸하고 말이 돼.’
류하리로서는 이 상황이 미칠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이 계약은 진짜겠군요.”
BJ젠다는 계약서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사인을 했다.
“어이. 젠다.”
장변이 당황해서 그녀를 보았지만 젠다는 코웃음 쳤다.
“뭐 수명 1년 줄어봤자 늙고 병들었을 때의 1년이 더 짧아지는 것 뿐 아녜요? 지금 이대로는 1년은커녕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보다는 낫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이로서 시현탐정사무소는 전심전령을 다해서 고객님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시현은 서명 받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미소를 지었다.
“이봐요. 이거 진짜…….”
장변과 류하리는 반신반의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BJ젠다는 자신의 수명을 넘겨주는 계약에 납득하고 서명했다.
류하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당사자인 BJ젠다가 납득해버렸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절 쭉 경호해 주실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시현은 젠다의 머리 위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네? 왜요? 계약도 했는데?”
“저희도 인간이고 쉬어야 머리가 잘 돌아가기 때문이지요. 체력을 보충하고 오지요. 안심하세요. 한동안 습격은 없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우리 조수가 반격해서 상대에게 부상을 입혔거든요. 그리고 제게도 상대의 공격을 알아채는 그런 재주가 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드릴 수 없군요.”
시현은 젠다의 머리 위 숫자를 확인하고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저희가 지친 채로는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24시간 밀착경호는 인력 소모가 심한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시현의 시선이 창밖의 경찰들을 향했다.
“알겠어요. 뭔가 있는 것 같으니까 당신을 믿지요. 어차피 이 보수라는 건 성공한 후에 지불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야.”
시현은 젠다를 납득시키고 그녀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 * *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건가요?”
류하리가 시현을 따라 나오며 물어보았다.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나 있다고요?”
경찰들도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이 사건을 이 남자는 혼자서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중 첫 번째는 그냥 뒷심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류하리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경찰인 그녀 앞에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법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범죄자가 살인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이쪽도 초법적인 수단을 쓰는 것이 가장 간단하지요. 법에 저촉되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젠다를 습격해 오는 순간 죽여버리면 여기서 죽여도 시체는 뒷심의 집에서 발견될 테니까요. 뒷심의 능력이 오히려 우리에게 알리바이를 주는 셈이지요.”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물론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설마 제가 그런 방법을 쓴다면 당신에게 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그럼 둘째는 뭔가요?”
“증거를 날조하는 겁니다.”
“아,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던 류하리가 짜증을 냈다.
“물론 이것도 제가 경찰이 아니니까 불가능하겠지요. 수사권을 가진 쪽이 직접 증거를 조작하면 모를까 제3자인 제가 증거를 조작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습니다. 고로 이것도 기각.”
“그럼 세 번째는 뭔가요?”
“세 번째는 설득입니다.”
“네?”
“당사자를 설득하는 거지요.”
“오늘은 뭐 헛소리 바겐세일 기간인가. 살다살다 허튼소리를 안 들어 본 게 아니지만 오늘만큼 많이 들어본 날은 처음인 것 같군요.”
“그런데 이게 의외로 할 만해요.”
“할 만하다고요?”
“네. 왜냐면 범인은 초인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에요. 그저 생각 짧은 쪼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충분한 위협이 다가오면 불안해지고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설득도 가능해지지요.”
“잠깐만요. 충분한 위협이 다가온다니? 설마 뭔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위협할 생각인가요?”
“네. 하는 건 제가 아니겠지만.”
시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 드렸지요. 두 번째 방법. 수사권을 가지지 않은 제가 쓰기엔 애매하지만 수사권을 가진 쪽에서는 어떨까요?”
“…….”
류하리는 시현이 하는 말에 숨겨진 뜻을 깨닫고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시현은 지금 경찰이나 검찰이 증거 조작에 나설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경찰서 내에서 BJ칼리가 살해당한 다음날, 모든 TV와 신문지면에서 스트리머 살인사건을 헤드라인으로 다루고 있었다.
사건은 이제 경찰만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가질 정도였다.
스트리머 살인사건은 이제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TV 어딜 틀어도 특집으로 경찰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고 마포경찰서장은 물론 경찰청장과 청와대 대변인까지 나서서 대국민 담화를 해야 했다.
경찰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언론이 사방팔방에서 경찰을 물어뜯고 있는데 실무자들은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 * *
그리고 여기 그 정신이 나가버린 실무자 한 명이 있었다.
“아이고, 골병들겠다.”
성신아 경위는 편집자 뒷심의 밀착 경호 상황을 점검했다가 기자회견 준비에 불려나와 기자 회견 준비 원고를 쓰고 기자실과 언론 데스크에 협조 공문을 돌리는 일을 했다.
이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녀는 복도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하는 거야? 장판파의 장비야? 왜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어?”
출근하던 류하리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누군 좋겠네. 경찰조직이 지금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이라서. 부모 잘 만나서 덕 보는 걸로 부족해서 운도 좋아요.”
잠이 부족해서일까?
성신아는 가식 없이 솔직한 모습으로 빈정거렸다.
그러나 류하리는 성신아가 꼽 준다고 혼자 분을 삭이며 스트레스 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표정 보아하니 정신이 나갔구나? 잠을 충분히 자. 그러다가 심장 발작으로 훅 간다? 기왕 경찰된 거 나중에 연금 오래오래 받아야지?”
“…….”
성신아는 괜히 빈정거렸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그보다 혹시 이 스트리머들에게 후원한 사람들은 조사해 봤어?”
“무슨 소리야?”
“아니, BJ젠다인가 하는 여자가 그러는데 최근에 별 말없이 갑자기 큰 금액을 쏴준 시청자가 공통적으로 한 명 있는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거야. 그녀만이 아니라 은평 크루 사람들 모두에게 고루 크게 돈을 후원했다는데 아이디가 ‘미카엘’이었다고 해.”
“도네 한 사람 말하는 거야? 시청자가 죽이진 않았겠지. 이 사건은 면식범 소행인데 무슨.”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류하리도 이 사건이 면식범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니, 실행범이 편집자 뒷심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경 쓰이는 건 미카엘이라는 자에 대해서 BJ젠다가 말할 때 시현의 반응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아니다.’
시현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범인이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하겠지 범인은 아니라니. 신경 쓰인단 말이지.’
그래서 류하리는 성신아에게 넌지시 정보를 흘려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성신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몸 매무새를 다듬는 게 아닌가?
‘마치 번식기의 수컷 새가 자기 깃털 단장하는 것 같구나. 성신아가 이러는 걸 보면…….’
류하리가 뒤돌아보니 과연 최형림 검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은 아니군요. 성 경위님, 류 경위님.”
“아이 참,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오늘 그거 보셨어요? 기자회견?”
“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합동수사본부에서 현장수사팀을 만들 것 같은데 제가 담당할 것 같습니다. 그 팀에 합류할 만한 인재를 찾고 있는데…….”
검사와 경찰은 수사권을 두고 기묘한 알력관계가 있다.
그런데 평검사가, 그것도 경찰대학 물 먹이고 튀어나온 평검사가 경찰의 인력들에게 수사지시를 내리는 현장조사팀이라면 확실히 팀을 짜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성신아는 적극적으로 최형림에게 가세했다.
“저요. 절 뽑아주세요.”
류하리는 적극적인 성신아를 보며 당황했다.
‘경찰청장이랑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회견 할 정도의 일이 되었는데 평검사가 이끄는 수사전담팀이라니. 공을 세우기 좋은 자리기도 하지만 일이 잘 안되면 총알받이 되기 딱 좋은 자린데 왜?’
‘최형림 선배는 재벌가 자제잖아. 수사가 잘되면 공을 세워서 좋고 안되더라도 뭐 이 기회에 선배랑 인연 쌓기 좋지. 너야 부잣집 딸내미라 그런 거 생각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회는 무조건 잡을 거거든?’
성신아는 적극적으로 최형림에게 붙으면서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BJ젠다라는 그 어제 습격당했던 피해자가 한 말인데요. 누가 후원을 엄청나게 했는데 그게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더군요. 뭐 살인사건이야 면식범 소행이겠지만 그쪽으로도 조사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돈 문제는 아무래도 민감하니까요.”
“…….”
류하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는 성신아를 보며 류하리는 혀를 찼다.
* * *
어떤 아파트의 1층 엘리베이터 입구, 그곳에서 시현과 류하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류하리는 성신아의 일을 말하며 짜증을 냈다.
“글쎄 내 앞에서는 내가 한 말을 헛소리 취급하더니만 선배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써먹는 거 있지요? 대체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요.”
시현은 자신의 앞에서 성신아의 일을 말하며 짜증을 내는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검경합동수사팀에 합류하기로 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무리 지금 마포경찰서가 뒤집어졌다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서장님이 직접 지시한 일을 무시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이번 사건으로 마포경찰서장은 문책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부패, 비리비위 사건이 아니라서 잘리진 않을 것이고 끽해야 나중에 한직으로 이동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겠지.
그러니 류하리는 자기 입으로 그 수사팀에 합류시켜 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최형림 검사가 류하리를 지목해서 ‘그녀를 자기 수사팀에 합류시키고 싶다.’고 요청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성신아가 먼저 잽싸게 합동수사팀에 참가했으니 류하리는 물론 다른 여성이 들어오지 않게 쳐내려고 할 게 분명했다.
데드맨31
스트리밍 살인사건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