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아니, 그거 별거 아녔어. 별로 도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망신당할 뻔했으니까 네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걸? 본래 네가 했어야 할 수고와 번거로운 일을 내가 대신 한 셈이니까.”
성신아는 그리 말하고 뒷심의 집으로 향했다.
“으음. 별 게 아니었다고? 단순히 내 착각인가?”
류하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참. 이 남자 어디 갔어? 놓쳤잖아!”
시현이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 * *
“함부로 들어오지 마!”
류하리와 헤어진 성신아가 뒷심의 집에 들어왔을 때는 뒷심이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뭐야? 왜 저래요?”
성신아가 그렇게 물어보자 현장의 순경이 대답했다.
“영장 없으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저러지 뭡니까. 전에 받은 영장은 만기가 되어서…….”
“뭐 그게 원칙이긴 하지만 밀착 경호인데도? 이전까진 잘 협력했었다면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예요?”
“그 검사님이 뭐 물어보니까 갑자기 자길 의심하냐면서 저러는 거예요. 아마도 변호사를 만나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아하.”
성신아는 혀를 찼다.
“류하리 이것이 뭔가 손을 썼구만.”
* * *
편집자 뒷심과 BJ젠다의 복잡한 연애사는 일반 인터넷 방송 시청자들에겐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경찰이 조사하자 그 내용은 바로 드러나게 되었다.
BJ젠다의 복잡한 연애사와 그에 얽힌 남자들의 알력다툼, 그 와중에 제일 약자였던 뒷심이 고통 받았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니 사정을 두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뒷심이 범인이라고 심증이 갈 수밖에 없다.
다만 뒷심은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고 이것은 적어도 증거재판주의 하에서는 깰 수 없는 강력한 알리바이일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경찰들은 뒷심이 살해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를 용의자 선상에서는 치워뒀었다.
게다가 뒷심을 경찰이 밀착경호하고 있을 때, 그 시간에 BJ젠다가 습격당하면서 알리바이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그런데 최형림 검사는 달랐다.
‘살해동기가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설령 아무리 강력한 알리바이라 해도 살해수법을 전혀 짐작도 못 하는 만큼 용의자 채택을 다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경찰들은 아주 간단한 업무상 질문을 몇 가지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뒷심이 돌변해 과민반응을 하더니 변호사 대동하지 않고 영장 없으면 수사 협력 안 한다고 뻗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사실 이것 또한 시현이 원하던 바였다.
시현은 뒷심에게 경찰이나 수사조직에 대한 의심을 심어두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능력에 취해 뒷생각 없이 울분을 풀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던 뒷심은 이제 경찰들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자신을 잡아넣을지 모른다는 의심에 빠져버렸는데 그때 하필 최형림 검사와 경찰들이 명백히 그를 의심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의심에 사로잡힌 뒷심은 발작적으로 수사협조를 거부하겠다고 나섰다.
“뭐 영장을 청구하면 금방 나오겠지만…… 분명히 이전까지는 협조적이었다고 했지요? 왜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꾸었는지 아십니까?”
최형림 검사는 경찰들 말단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원래 검사들을 칭하는 칭호는 ‘영감(令監)님’이었다.
노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조선시대 정3품, 종2품, 당상관 이상의 고관대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시민사회에서 너무 부적합한 칭호라서 2000년 이후로 금지되긴 했지만 대한민국 검사가 가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생각하면 영감이라는 칭호조차 오히려 약하다.
그런데 그 영감인 최형림이 말단 경찰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해 주는 것이다.
또 따지고 보면 원래 경찰대학생 출신이라지 않는가?
그래서 경호하던 경찰들이 술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방금 전에 변호사를 만나고 나더니만 돌변했습니다.”
“아마 이 변호사가 이상한 개소리를, 아, 아니, 바람을 불어넣은 것 같은데요.”
헛바람이나 개소리라고 하기에는…… 눈앞에 검사가 있다.
검사와 변호사는 서로서로 다투는 관계 같아도 선후배나 지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경찰들은 분을 삭이고 장 변호사에 대해서는 입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라고요?”
“네. 장변TV라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변호사인데 어제 합정에서 BJ젠다가 습격당할 때도 그곳에 왔었다는군요.”
“그런데 그 변호사가 지금 여기에도 왔다면 인터넷 방송을 하던 인맥으로 수임 요청을 받았나 보군요. 뭔가 특이사항이 있나요?”
“아, 그, 마포경찰서의 여성 경위님 한 분이 따라다니던데.”
“네?”
“류하리 경위예요.”
성신아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류하리 경위는 왜 그 변호사와 함께 다니는 겁니까?”
“아, 그게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게 좀 말하기가…….”
성신아는 최형림에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경찰도 아닌 외부인에게 강남 경찰서장의 비리를 까발린 놈을 표적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으음. 경찰 조직에 충성하느냐 재벌집 검사 아들과 친해질 기회로 삼느냐. 난감하네.’
성신아도 바보는 아니다.
‘재벌 집안 남자에게 아무리 아양을 떨고 추파를 던져봤자 내 집안은 너무 안 좋아. 결혼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지. 하지만 매주 복권 사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 같은데? 떡고물 부스러기만 떨어져도 큰 걸 노려야 큰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결국 성신아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그럼 저녁 식사를 사시면 그때 이야기 해드릴게요. 선배님.”
성신아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살리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어떠세요?”
“네? 오늘 저녁이요? 조, 좋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예약을 해 두지요. 하지만 그전에 영장청구부터 해 둬야겠군요.”
* * *
“으윽…… 피곤하네.”
성신아는 혼미해진 정신으로 걸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잠이 부족하다.
‘내가 미쳤지. 연일 철야해놓고서 무슨 저녁 약속이야. 지금이라도 당장 자지 않으면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데 컨디션을 관리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재벌가 집안 자제랑 저녁 식사를 할 기회라고. 내 평생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겠어?’
에너지 드링크를 콸콸 들이킨 그녀는 겨우 숨을 돌리고 눈앞의 호텔을 바라보았다.
호텔 레반테스.
“여기는 강남경찰서장이 골로 간 거기잖아?”
최형림은 굳이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그리고 호텔. 으음. 가, 각오는 해야겠는걸?”
성신아는 긴장하고 레반테스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 * *
시간이 밤 10시를 넘어 강남대로의 퇴근 행렬이 잦아드는 때.
성신아는 테이블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마시다만 와인 잔이 그녀의 옆에서 반짝인다.
그동안 쭈욱 최형림과 저녁식사를 할 기회를 노렸지만 최근 연달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몸으로 음주까지 했으니 피로를 버티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맞은편에서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던 최형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간만에 왔다 했더니만 여자를 데려오다니 의외인데? 최형림?”
최형림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술이나 담배를 살 때 민증을 요구받을 것 같은, 청소년인지 성인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나이의 청년이 최형림의 뒤에 서 있었다.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그는 최형림에게 친한 척하며 다가왔다.
“우리 아버지랑 엮이기 싫어서 여기 안 오려고 하지 않았어?”
그는 뒷짐을 진 채로 상반신을 숙여 최형림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웃고는 있지만 차가운 눈동자 너머로 보랏빛 불꽃이 번뜩인다.
“저녁시간에 예약 없이 바로 잡을 수 있는 마땅한 약속장소가 생각나지 않더군요. 미카엘.”
“흠, 제법 미인이네? 역시 보는 눈이 있어.”
미카엘이라 불린 청년은 잠들어 있는 성신아의 얼굴을 살펴보고 씨익 웃었다.
최형림의 뒤에 서 있던 그가 어느새 같은 테이블 빈 좌석에 앉아 있다.
최형림과 잠들어 있는 성신아를 동시에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그가 양손으로 앵글을 만들어 성신아와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선남선녀네. 잘 어울려.”
“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녀는 경찰입니다. 경찰에서 있던 일을 좀 듣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요새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 그만 와인 한 잔에 이렇게 되었군요.”
“그래? 룸이라도 하나 내줄까? 쉬라고.”
미카엘이라는 청년이 그렇게 말하자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즉시 카드키를 가져와 대령했다.
“괜찮습니다. 아직 수사가 바빠서 그녀도 잠깐 눈 좀 붙였다 다시 일어나야 할 겁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택시나 불러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쳐서 쓰러졌는데 바로 내일 출근이란 말이지? 경찰도 할 게 못되겠네. 알겠어. 택시면 되겠지?”
최형림과 미카엘이라 불린 청년은 술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된 성신아를 호텔 로비로 데려가 택시에 태워 보냈다.
술에 취했다기보다는 잠에 곯아떨어진 성신아를 택시에 태우고 두툼한 돈 봉투까지 던져 준 미카엘을 향해 최형림이 말을 던졌다.
“그런데 미카엘. 이번 일은 너무 과한 게 아닐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앞으로 하려는 것에 비하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다 해도 지금 이 단계에서 경찰들을 이렇게까지 망신 줄 필요가 있었는지요?”
“덕분에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었잖아? 이제 당신이 이 사건을 해결하면 스타 검사 탄생이지. 이대로 인기를 끌고 승승장구하다 정계에 진출하면 단번에 높은 데까지 올라갈 거야.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렇긴 합니다만 그들은 받은 모욕을 기억할 겁니다. 게다가 흔적을 남기셨더군요.”
“흔적?”
“이번에 인터넷 방송인 살인사건에 후원을 제법 많이 하셨다고…….”
“그래서. 뭔가 문제라도 되는 거야?”
“그냥 누군가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혹시 시현탐정사무소라고 아십니까?”
“시현탐정사무소?”
“강남경찰서장을 날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 그…….”
“네. 그가 이번 일에도 개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부지런하군. 데드맨은…….”
“알고 있는 사이인가요?”
“뭐 개인적으로 안다기보다는 건너건너 아는 사이라고 해둘게.”
미카엘이라 불린 청년은 그리 말하고 싱긋 웃었다.
* * *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류하리는 거의 새벽시간 대중교통 첫차가 움직이는 시간부터 시현의 사무소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사무실 안에서 문이 열렸다.
“새벽 일찍 오셨군요. 들어오세요.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제 왜 그냥 간 거예요?! 부르는데도 무시하고. 그 후로 전화도 안 받고?”
“지문을 복제하는 모습을 경찰에게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고무도장 같은 것을 내밀었다.
“여기요.”
“이건?”
“실리콘 도장입니다. 끝에 뒷심의 지문이 붙어 있지요.”
데드맨31
스트리밍 살인사건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