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단 하루 만에 만들었어요? 아니 어제 오후였으니까 반나절밖에 안 지났는데?”
“이건 그다지 좋은 게 아니에요. 우선 인간의 손가락은 곡면인데다 신축성이 있어서 그냥 도장으로 찍으면 사람 손이 아니라 도장이라는 게 티가 납니다.”
“…….”
류하리는 지문 도장을 모서리부터 바닥에 대고 눌러보았다.
시현이 만든 이 지문 도장은 매우 탄력이 있는 고무 같은 것이어서 쉽게 둥그렇게 찍힌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점점 수사기술이 발달해서 지문이 그냥 생리식염수로 찍혔는지 정말 인간의 땀으로 찍혔는지도 분간할 수 있지요.”
‘하지만 보통 그 정도까지 수사를 하진 않잖아? 사람들이 몸 좀 안 좋다고 병원 가서 다들 비싼 돈 내고 정밀검진을 받진 않는 것처럼. 이건 정말 범죄에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류하리는 시현이 만든 지문도장을 보며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뭐, 정말 증거를 위조하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뒷심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한 요소니까 상관없겠지. 음?”
그때 시현의 전화가 울렸다.
“누구예요? 설마 뒷심?”
“이쪽도 예상보다 너무 빠르군요.”
시현은 전화를 받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요. 벌써 자수할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뒷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하리도 잽싸게 의자를 끌고 달려와 시현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이 정도 거리만 해도 쩌렁쩌렁 잘 들릴 정도로 지금 뒷심은 흥분해 있었다.
[자수라니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심신미약! 심신미약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저희는 언제나 고객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므로 그런 자백(?)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 혹시 자백과 자수의 차이를 아시나요?”
[그놈들이 절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요? 이건 정당방위예요!]
“자자. 진정하시고. 지금 고객님은 도청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크게 말씀하시는 건…….”
[아, 도청?! 맙소사!]
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전화기를 머리 옆에서 내려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류하리가 한마디 했다.
“이런 새가슴으로 잘도 사람을 죽였군요.”
“원래 무고한 대다수의 시민들도 착해서 착한 게 아니라 처벌받기 싫어서 성질 죽이고 사는 거죠.”
즉, 뒷심이 저러는 건 처벌 안 받을 줄 알고 저질렀다가 뒤늦게 책임져야 하니 정신이 나간 것이다.
‘충분히 한심해 보이는데. 전국을 뒤흔든 엽기 살인의 범인이 이따위 한심한 놈이라니.’
류하리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녀 또한 그 한심한 놈에게 농락당하는 경찰의 일원이 아닌가.
시현은 다시 전화기를 잡았다.
“진정이 되셨습니까? 무슨 일이지요?”
[여, 영장이 나왔어요!]
“영장? 설마 영장 가져오지 않으면 수사에 협력하지 않겠다, 뭐 그런 거 한 건 아니죠?”
[검사 놈이 날 범인이라고 의심하잖아요!]
“…….”
[네?]
“아, 저 고객님. 물론 법률상으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긴 하지만 관료와 공무원들은 매일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까 인성이 마모되어 있어요.”
[무슨 소리죠?]
“그러니까 일을 쓸데없이 귀찮게 만드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복합니다. 영장 가져오라는 식으로 상대를 자극하면 반드시 보복하겠네요.”
[이미 했는데…….]
“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범인 맞잖아요? 보복 받기 전에 감방가면 됩니다.”
[으아아. 싫어…… 군대도 20개월 이었는데! 15년이라니!]
듣고 있던 류하리가 어이가 없어서 투덜거렸다.
“아니, 그 15년도 모범수여야 그렇다는 소리지 왜 벌써부터 제멋대로…….”
“쉬잇.”
시현은 류하리를 조용히 시키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검사는 왜 당신의 알리바이를 무시하고 당신을 의심하던가요?”
[내가 알리바이로 제시한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하던데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는데! 역시 이놈들!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거야! 내가 만만하니까!]
“누명?”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뒷심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형림 검사, 바로 그가 정말 증거를 조작해 뒷심을 잡아넣으려 한다는 뜻이 아닌가?
“선배가?”
“누명은 아니지요. 하지만 빨리 자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검사가 그렇게 나서면 자수할 기회도 안 주고 끝나니까요.”
[자수는 싫어! 적어도 젠다 그년은 죽이고 나서…….]
“그녀를 죽이면 당신이 그것들과 맺은 계약을 물릴 수 없습니다.”
[…….]
“그래서. 계약하시겠습니까?”
[아니, 냉정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당신과 계약해서 굳이 수명을 날릴 필요도 없잖아? 그냥 자수하면 되지!]
“냉정? 지금 고객님에게 냉정이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꾸 딴소리하는 뒷심의 말에 시현의 인내심에 살짝 금이 갔다.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시현이 처음으로 뒷심에게 짜증을 냈다.
“아, 실례했습니다. 시현탐정사무소는 항상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계약을 안 하셨으니 고객이 아니지요?”
[그게 계약을 하려고 잠정적으로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냥 자수하면 되지 굳이 당신에게 수명까지 빼앗길 이유는 없지 않나요?]
“그럼 물어보지요. 지금 경찰에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입증할 수단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 경찰서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관심종자들이 드글거릴 텐데 그들과 달리 자신이 진범이라는 확신을 안겨줄 수 있습니까?”
[능력을 보여주면…….]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그런데 경찰이나 언론에 능력을 보여서 대중에게 노출되면 바로 영혼을 빼앗길 텐데요? 굳이 시험해 보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당신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이 될 겁니다. 그건.”
[…….]
시현은 미간을 눌렀다.
“좀 더 부를걸. 1년 수명 받아선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그, 그럼 만약 당신이랑 계약한다 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우선 고객님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만들 겁니다. 고객님이 워낙 화끈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증거를 위조하는 건 매우매우 힘든 일이 될 겁니다. 그걸 감안하면 진짜 1년 수명 정도는 파격 할인가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당장 지금 저도 상당히 후회하고 있는 걸요. 아, 그렇지. 지금 계약하지 않으시면 다음부터는 3년으로 늘려서 받겠습니다.”
[1년으로 해요! 1년!]
“그럼 지금 계약하시겠다고?”
[아니, 그건 자, 잠깐만요.]
“네, 다음부터는 3년으로 그럼.”
시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아, 안 돼! 당신들 뭐야?! 으아악!]
뒷심의 비명소리와 함께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
“고객님?”
시현은 전화를 귀에서 떼고 이번엔 자신이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이지?”
“3년으로 올렸다고 끊어버린 걸까요?”
“그럴 만큼 딱 부러지는 놈 같지는 않은데요? 습격당한 것 같은데?”
시현이 그렇게 대답하다 문득 TV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TV에서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의 뒷심이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채 구속되는 장면이 나오고 기자들의 플래시라이트 세례가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속보, 스트리머 살인사건, 이모씨 구속 집행.’
* * *
경찰과 검찰이 증거를 조작할 것이다.
류하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현은 그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너무 과하게 비난하는 게 아닌가?
옛날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민주주의 시민사회다. 경찰이나 검찰이 그렇게 심하게 사건을 조작하면 반드시 큰일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현의 말에 크게 반박하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이 경찰의 치부였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자신들을 모욕한 일개 탐정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표적수사를 시작했다.
그 표적수사의 장본인인 류하리가 시현이 경찰을 불신하는 말을 한다고 반박해 봤자 웃기는 꼴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시현의 악담이 현실화 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뒷심은 초능력자다.
즉, 일반적인 증거나 수사로 뒷심이 범인이라고 구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현이 말한 대로 경찰이나 검찰이 증거를 조작했다.
“거, 검찰 짓일 거예요.”
류하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경찰인 그녀에게야 경찰이 했냐 검찰이 했냐가 중요하지만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공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서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검찰이 했냐 경찰이 했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시현은 외투를 걸치고 뭔가 챙기고 있었다.
“젠다 및 다른 은평 크루의 멤버들이 위험해요.”
“네?”
“뒷심의 능력을 생각해 보세요. 원격으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자가 지금 자신이 범인으로 잡혔다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할까요?”
“하지만 검찰은 뒷심을 살인교사로 기소했어요.”
류하리는 TV를 가리켰다.
TV에 자막으로 ‘이모씨, 외국인 범죄조직에 살인교사.’ 라고 뜨고 있었다.
“살인청부라면 뒷심이 잡히고 난 후에 살인이 일어나도 뒷심의 혐의는 벗겨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혐의를 벗기 위해 추가로 살인을 할 이유는…….”
“뒷심은 젠다에게 아직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혐의를 벗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자수도 못 하고 그냥 잡혀 들어가느니 젠다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아, 그, 그렇죠.”
“갑시다! 녀석의 표적은 젠다입니다만 다행히 위치를 모르는군요!”
시현은 류하리와 함께 사무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아, 망했다. 설마 자버리다니.”
성신아는 아침부터 울상이었다.
어젯밤, 그렇게 벼르던 최형림과의 저녁식사를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집이다.
최근 수사가 너무 힘들어서 철야를 하다 보니 술 한 잔 들어간 순간 버티지 못하고 혼절하듯 자버린 것이다.
‘젠장. 망했어. 어제 술 취해서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냐? 큰일이네.’
기껏 공들여서 최형림에게 호감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의 실수로 다 망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한 그녀는 아침에 출근해 최형림을 찾아보았다.
‘부끄럽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빠르게 수습하는 게 이득이야. 부끄럽다고 도망치면 사회생활 못하는 거지.’
그리 생각한 성신아는 표정을 싹 일신하고 최형림에게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젯밤은 제가 너무 취해서 결례를 범하지 않았는지 걱정이네요.”
“아, 성 경위님. 괜찮습니다. 격무에 너무 지치셔서 바로 주무셨어요. 이거 참, 괜히 제가 저녁식사를 하자고 해서 오히려 제가 결례를 범했지요.”
그 말을 들은 성신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이 괜찮은데. 이 사람이 매너가 좋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추태는 부리지 않았구나. 어제의 나.’
그럼 이제 일보 전진할 때다.
“기껏 선배님과 저녁식사를 했는데 먼저 자버리다니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이런 큰 결례를 범하다니.”
“하하.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 다시 약속을 갖도록 하지요.”
최형림이 그리 말하자 성신아는 반색했다.
‘아싸. 애프터다! 휴우. 다행이네. 그런데 너무 배려가 좋은데? 뭐지? 혹시 재벌가 자제라서 내 앞에서 자버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뭐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성신아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데드맨31
스트리밍 살인사건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