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총 치우면 그녀를 풀어주지. 뒷심은…… 저 멍청이는 네가 가져도 좋아.”
“뭐? 아니, 잠깐?!”
뒷심이 놀랐지만 미카엘이라는 청년은 덤덤했다.
그러나 그때 시현이 총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뒷심이 더 이상 살인을 하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엔 관심이 없어. 네가 가져가지 그래?”
“뭐?”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고객이 아냐. 아직 계약을 안 했거든?”
“어?! 어어어?!”
“큭……. 크크크크.”
미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당신 역시 좋군. 아주 좋아! 아쉽네. 난 당신 같은 사람 좋아하는데.”
“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겠지.”
시현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미카엘이 박수를 쳤다.
“저 경찰 아가씨 풀어드려. 그리고 뒷심 데려와.”
“네.”
류하리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이가 칼을 치우고 류하리를 앞으로 밀어 시현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른 이가 뒷심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텔 복도의 양탄자에 새카만 발자국이 새겨진다.
“으억?!”
뒷심은 그걸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정말 내 영혼을 이렇게 쉽게 넘긴다?
방금 전까지 은평 크루와 젠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지라 영혼을 넘기고 난 뒤의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현이 경고하긴 했었지만 그는 그저 그게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협박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 * *
처음에는 정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는 멍하니 존재했다.
“뭐야? 아프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잖아? 괜히 겁먹었네.”
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한줄기 빛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이 어둠 속에서 오직 한줄기 실낱같은 빛줄기만이 존재한다.
그걸 제외하면 고통도 슬픔도 없다.
“별거 아니군.”
뒷심은 그리 생각하면서 앉았다.
시간이 흘렀다.
* * *
뒷심은 허공에 손톱이 떠다니는 걸 보았다.
어느새 초조해진 그가 손톱을 물어뜯은 것이었다.
이빨로 물어뜯어 삐뚤빼뚤해진 손톱이 무중력 상태에서 떠다니며 그의 눈앞을 지난다.
“으…… 얼마나 지난 거야? 대체?”
그리 생각한 뒷심의 눈앞으로 손가락 끝 마디가 지나간다.
“헉?!”
깜짝 놀란 뒷심은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이미 잔뜩 물어뜯었다.
손톱을 물어뜯다 물어뜯다 아예 손가락을 물어뜯어 잘라버린 것이다.
그의 입 안에 피 맛이 감돈다.
“아, 아니?!”
어느새 수염이 자라고 그는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져 있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그제야 뒷심은 자신이 이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몇 번이고 미쳐서 자해하고 자해하다가 그때마다 되살아났다는 걸 떠올렸다.
여긴 무한한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아…… 안 돼! 뭐야 이건?!”
경악한 뒷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잘린 손, 팔다리, 치아 등이 그가 온 길 뒤쪽으로 쭈욱 늘어서 있었다.
빛 한줄기 외에 아무것도 없는 어둠의 공간에서 그는 오로지 저 빛을 향해 달려갔었나 보다.
빛의 방향은 깨끗하다.
그가 온 길은 온통 그의 팔다리, 육체, 심지어 뒷심 자신의 잘라낸 머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뒷심은 겁에 질려서 다시 빛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그가 빛을 향해 다가왔을 때, 그 빛은 아주 오래된 거대한 CRT들의 군집이라는 걸 깨달았다.
“TV?”
TV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리고 TV밑에는 회색으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몸들…….
그제야 뒷심은 자신 역시 TV 머리의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
형언할 수 없는 괴성이 뒷심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 * *
“허억?!”
뒷심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시현에게 짓눌린 채, 불타고 있는 양탄자를 바라보는 상황,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지금 그게 꿈이라고? 이렇게 긴 게?’
그는 자신의 수염을 만져보았다.
턱수염이 없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염이 없이 매끈한 얼굴 그대로다.
정말 그건 꿈이었나?
꿈에 불과했나?
그때 미카엘의 사주를 받은 이가 또 한 걸음 내딛는다.
바닥이 불타오르고…… 다시금 어둠이 뒷심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히익?!”
뒷심은 다시금 한줄기 빛만이 흐르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안 돼!”
매 걸음 걸을 때마다 이걸 반복한단 말인가?
머리가 좋지 않은 뒷심이지만 그 다음 벌어질 일은 알 수 있었다.
저 악마가 그에게 완전히 다가와 그의 영혼을 수확하면 이제부터 이곳이 곧 그의 현실이 될 것이라는 걸.
경악한 뒷심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다시금 빛을 향해 뛰었다.
* * *
“그만! 알겠어! 계, 계약할게! 하면 되잖아!?”
뒷심이 그리 외치자 다가오던 이가 멈칫했다.
그는 미카엘을 바라보며 걸음을 내딛어도 될지 말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계약할게!”
“들으셨지요?”
시현은 권총을 그들에게 겨누고 물러나라고 총구를 까딱 해서 지시했다.
“대단하군. 훌륭한 고객서비스네.”
“과찬의 말씀을…….”
“후우. 이거 부러운데?”
미카엘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호텔에 불이 다시 들어오고…… 호텔 곳곳에 설치된 방범카메라도 정상 작동되기 시작했다.
“아, 자, 잠깐만요!?”
류하리가 뒤돌아보았지만 미카엘과 난입자들은 전력이 복구되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그럼 안녕히 계시길. 데드맨과…… 류하리 씨.”
“엑?!”
류하리가 떨떠름해하건 말건 미카엘 일당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물러났다.
당황한 류하리가 돌아와 보니 시현은 어느새 권총을 품에 감추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자, 그럼 고객님. 일어나시죠.”
뒷심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시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뒷심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다.
“으어어어어어.”
“뭐야 이거? 혹시 감형 받으려고 수 쓰는 건가요?”
류하리가 투덜거렸다.
“아니, 진짜입니다. 저 미카엘이…… 뒷심에게 손을 썼네요. 정신이 이 모양이니 분신도 곧 사라질 겁니다.”
과연, 류하리와 시현이 보는 앞에서 뒷심의 분신이 흐릿해지더니 소멸해버렸다.
“정신이 진짜 맛이 갔다고요?”
“네.”
“그럼 당신 그 권총은?”
“아, 그건 가짜입니다.”
“…….”
“가짜예요. 자, 그럼 또 다른 고객님, 젠다나 만나 볼까요?”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1029호 객실로 향했다.
* * *
BJ젠다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 정전. 그때도 그랬는데…….”
뒷심이 습격한 경찰서, 그리고 그녀의 오피스텔에서도 늘 그랬다.
습격 전마다 갑자기 전기가 나갔고 어둠 속에서 뒷심이 공격해왔다.
그런데 그때 호텔 문의 차임이 울리는 게 아닌가?
BJ젠다 대신 사복 형사가 문 앞에 섰다.
“시현탐정사무소입니다.”
“?”
“열어주세요.”
젠다가 그렇게 요구하자 시현과 류하리가 걸어 들어왔다.
“어?”
“이게 무슨?”
그때 시현이 젠다의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어떻게 여길 알고 오셨어요?”
“전에 말씀드렸지요? 그런 재주가 있다고.”
“…….”
“의뢰는 완수했습니다. 이제 고객님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고객을 좀 늘려서 말이지요. 혹시 괜찮다면 뒷심을 위해서 증언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해서 증언이라니요?”
“그가 은평 크루 내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고 얼마나 몰려 있었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 받고 있었나. 뭐 그런 것 말입니다.”
“…….”
“정 그가 미워 견딜 수 없다든가 상관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만. 아주 약간이라도 정이 남았거나 불쌍히 여기신다면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도 고객이라서인가요?”
“네. 물론이지요. 시현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시현은 품에서 사탕을 꺼냈다.
“드시겠습니까?”
“아뇨. 저는…….”
그런데 그때 뒤에서 보고 있던 류하리가 손을 내밀었다.
“저 주세요.”
시현은 류하리에게 사탕을 건네고 일어났다.
“그럼 정산 부탁드립니다. 정산하겠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산’…… 이요?”
“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현은 또 하나 사탕을 꺼내서 입에 털어 넣고 그 자리를 떠났다.
* * *
막히고 있는 퇴근길 차량 행렬들 사이에서 류하리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젠다는 뒷심을 위해서 증언하려 할까요?”
“하겠죠. 이런 해괴한 일을 겪었는데 누군가의 원한을 계속 사고 싶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일이니 아무리 번거로워도 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자세한 건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열심히 뭔가 하고 있다는 건 알겠네요.”
시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 와중에 범인과 피해자 둘 다 계약해서 우려내고? 아, 뒷심에게는 정산 어떻게 받을 거예요?”
“뭐, 뒷심에게는 걱정할 거 없어요. 말을 제대로 못 하거나 의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자동으로 징수가 됩니다. 수수료가 좀 더 붙긴 하지만.”
그런데 그때 류하리에게 전화가 왔다.
성신아였다.
[어머어머, 류 경위~. 우리 사건 해결로 종결이래. 종결! 한때는 어떻게 되나 했는데 역시 선배님이야. 대단하지?]
“그래서? 무슨 이유로 전화한 거야?”
[좋은 일이 있으니까 알려 주려는 거지. 아, 그리고 나 선배님이랑 이제 뒷풀이 가려는데 혹시 하리도 생각 있냐고 물어보라는데? 그런데 하리는 우리 팀도 아니었잖아? 그런데도 굳이 와서 가시방석 위에 앉을 생각은 아니지?]
‘아니, 그런데 이게? 너 엿 먹이려고 가고 싶긴 하다.’
그러나 류하리는 지금 피곤하다.
시현을 따라서 열심히 달리고 뒷심, 그리고 수수께끼의 난입자들과도 싸웠으며 목에는 칼에 긁힌 상처가 생겼다.
구급밴드 한 장으로 깔끔히 가려지는 얕은 상처긴 하지만 만약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놈이 정말 찔렀으면 즉사했을 거다.
“뭐, 됐고. 축하한다고 전해드려. 선배님이나 너나.”
[어, 그래. 하리 안 온대요!]
성신아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야? 아직 끊으라고 안 했는데?!”
“재밌는 친구군요?”
“친구? 아니에요. 원수지 원수. 그나저나 이번 일로 선배는 꽤 득 보겠네요? 전국에 방송된 대사건을 빠르게 처리한 젊고 잘생긴 재벌집안 검사라니. 앞으로 커리어 관리 잘하면 대통령도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일이 쭉 계속 있나요?”
“……왜요? 계속 따라다니시게요?”
“아, 아니죠. 아니야. 서장님 문책당할 것 같으니까. 서장님 문책당하고 나면 이 일도 끝이겠네요. 개인적으론 대체 당신이 뭔지. 그 미카엘이라는 놈은 누군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이런 일에 머리 들이밀면 좋지 못한 꼴을 볼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드네요.”
“네, 현명하시군요. 하지만 서장 문책된다고 끝은 아닐 것 같은데.”
시현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 * *
“아함.”
미카엘은 국에 수저를 넣고 휘적휘적 젓고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무슨 짓이냐?”
그의 맞은편에는 윤 회장, 레반테스 호텔의 사장이자 유흥업계의 대부라는 윤 회장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늘은 입맛이 좀 없네요. 먼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미카엘은 그리 말하고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한 다리로 다른 다리의 종아리를 긁적이더니 자신의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곳은 텅 빈 공간…….그 텅빈 공간 안에 무수히 많은 CRT 머리를 가진 인간들이 유영하는 뒷심이 보던 공간이었다.
“역시 데드맨은 탐나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게 이건가?”
그렇게 말하며 미카엘은 천천히 걸어가 한 CRT 머리의 인간 앞에 멈춰 서서 앉았다.
“그래도 내 떡도 꽤 크지. 더 키워야겠어. 데드맨에게 지지 않도록.”
최형림 검사가 성신아에게 곤란해하는 모습이 CRT모니터 안에서 비추어지고 있었다.
“후후후후후.”
미카엘은 쪼그려 앉은 채 그 CRT 모니터를 보며 웃고 있었다.
데드맨31
촉법의 사각 #1